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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백향주 "'흐르는 섬' 몸짓 통해 희망 전하고파"

무용가 백향주 "'흐르는 섬' 몸짓 통해 희망 전하고파"

  • 2007-09-14 09:48

[아주 특별한 인터뷰] 국경을 넘나드는 춤꾼, 백향주

무용가 백향주

 

동아시아 대륙의 지붕 아래, 나라와 민족과 이념을 초월해 유랑하는 무용가가 있다. 국경을 넘나드는 춤꾼, 백향주…

재일교포 3세인 그녀는 2살 때 무용을 시작했다. 일본과 평양을 오가며 무용을 배웠고, 중국 북경에서 무용 대학을 졸업했다. 2001년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한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대학원을 마쳤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춤도 아니고 일본춤도 아니고 중국춤도 아닌 백향주의 춤은 대체 어느 나라의 것이냐고…

하지만 그건 단지 '춤'일 뿐이다.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소통하는 '몸짓', 다양한 가치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믿음’, 화합을 향한 간절한 '염원' 등을 담아 낸 '백향주의 춤'일 뿐이다.

경계를 짓지 않는 무용가 백향주 씨. 오늘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만나본다.

◇ 저의 춤은 동아시아를 넘나드는 과정의 여행

▶ 경계 없는 춤이라는 표현도 했는데요, 들으시는 애청자들께서 우리말이 조금 어색하기도 하구나 라고 생각되실 겁니다. 그만큼 여러 나라를 다니신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한국 국적을 취득하신 것이 언제죠?

= 2001년이에요.

▶ 재일교포시죠?

= 네. 정확히 재일교포 3.5세입니다.

▶ 일본에서 춤을 2살 때 시작하셨고, 중국, 북한, 한국에서도 춤을 배우시고... 어느 나라에 바탕을 뒀냐 정말 그런 말을 하기도 하겠어요?

= 그런 질문을 받으면 역시 저의 춤은 동아시아를 기반으로 두고 있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일본에서 나서 자랐고, 평양에서 어릴 때부터 춤을 배워왔고요, 15살 때부터는 중국에서 동아시아 실크로드 춤부터 해서 아시아 춤을 섭렵했고, 2003년도에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한국전통예술을 접하게 됐어요.

그래서 저의 과정은 완전히 동아시아를 넘나드는 여행이었고요, 저의 춤에는 그것의 모든 엑기스들이 다 융합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무용가 백향주

 

▶ 춤만 국적을 넘나든 것이 아니라 장르도 경계를 짓지 않는 호기심이나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이 많은가봐요. 비보이(B-boy)와 함께 무대에 오른 것이 작년인가요?

= 네. 작년 가을입니다.

▶ 우리의 춤하고 비보이의 첨단 현대적인 몸짓이 어떻게 보면 연관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해보시니까 어떻던가요? 그 생각을 어떤 분이 기획을 하셨나요?

= 제가 우선 비보이의 춤에 대해서 굉장한 관심을 갖고 있었거든요. 비보이의 춤에서 제가 어느 부분에서 감명을 받았는가 하면, 지금 일반적으로 무용을 하는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있는 정말 춤에 대한 즐거움이라든가 젊은이들의 폭발력이랄까 즉흥적인 춤들 그런 부분은 저와 같이 체계적인 춤수련을 받아온 사람들은 이런 부분이 굉장히 부족하거든요.

어릴 때부터 수백 번, 수천 번 반복연습을 하면서 기능을 축적해 온 사람들은 아무래도 이런 부분이 굉장히 부족해요. 저는 그 사람들의 공연장면을 TV를 통해서 봤는데, 한 번 같이 공연을 하면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 저 자신이 춤의 재미랄까 즐거움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번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을 하고 시작을 했거든요.

저한테 있어서 그건 어디까지나 한 과정이에요. 앞으로 더 새로운 장르나 융합을 더 시도할 것이고요. 비보이와의 공연은 파격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저에게는 그다지 파격적인 일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일본춤을 접하든 중국춤을 접하든 실크로드의 춤을 접하든 다 새로운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 과정에서 비보이의 춤하고 만남이 있었던 것이지 갑자기 저에게 눈에 띄인 것은 아니에요. 새로운 만남, 새로운 춤동작으로 새로운 희망이 생기니까 참 즐거운 과정인 것 같아요.

◇ 무용가셨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2살 때부터 발레를 배우기 시작

무용가 백향주

 

▶ 2살 때는 한창 걸음마 할 나이인데, 누가 시켜서 무용을 배우신건가요?

= 물론 집안환경이 있었죠. 아버지가 무용가였고, 집에서 무용에 관한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1살 때 걸음마 시작하면서 2살 때는 발레학원에 다녔어요.

▶ 그럼 정말 천재이셨던 것 아니신가요?

= 천재는 아니에요. 그냥 2살 때 발레를 시작하면서 어찌나 좋았던지 엄마 손에 이끌려서 발레 학원에 다녔는데...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가 살아계실 때 이야기 하시기를 비가 너무 와서 폭풍이 칠 때 발레 하루 쉬자고 그랬대요. 그 때가 제가 2살 때인데 제가 막 울면서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솔직히 2살 때 기억은 그렇게 분명하게 없어요. 그렇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워낙 춤에 대한 매력 때문에 좋아 했던 것 같아요.

▶ 어머님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나시겠어요? 언제 세상을 뜨셨나요?

= 3년 전이요. 이 곳 한국에서 대학원 다닐 때요.

▶ 전부를 다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고 하셨겠어요?

= 예. 아직 꿈하고 현실을 왔다갔다 하는 것 같구요. 아직도 어머니가 눈앞에 있는 것 같고... 죽음에 대한 충격이 컸던 것 같아요.

▶ 너무 어릴 때부터 어떤 한 일에 천재처럼 몰두하는 것도 있지만, 좀 개구쟁이처럼 놀기도 하고 아이들과 어울려 놀 시기에 발레를 했다는 것은 물론 본인이 그것을 즐겼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너무 그 나이 때의 즐거움이나 추억이 없이 밤낮 춤에 매달리고 너무 속박된 생활을 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없으세요?

= 그것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인 것 같구요. 일반 학교를 다니면서도 저는 시간이 되면 바로 친구들과 헤어지고 일주일 내내 무용학교를 가야 했기 때문에요. 밤 10시까지 연습을 하고 집에 와서 자고 일어나면 다시 일반학교 가서 공부하는 생활의 반복이었거든요. 연습하는 데 주말은 더 바쁘고요. 그러다보니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다니고 하는 것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였죠.

특히 무용은 육체노동이다보니 인내력과 통제력이 굉장히 필요하거든요. 통제가 없는 곳에서는 절대로 무용이 발전을 못해요. 그런 면에서 많은 통제를 받고 자란 것도 사실이고요. 그런데 그런 부분은 제가 잘 소화해 내려고 해요.

◇ 12살 때 김일성 주석 앞에서 춤 선보여

▶ 천상 춤꾼이셨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열심히 하셔서 12살 때 북한의 무용교육과정에 입학을 하셨다. 당시의 최연소 합격 맞습니까?

= 네. 초등학교 때부터 오디션을 나가면 전부다 최연소였어요. 그래서 12살 때 평양의 무용교육과정에 입학해서 해마다 몇 달 동안 배우는 엘리트 과정을 할 때도 최연소였어요.

▶ 그럼 일본에서 북한으로 유학을 가신 겁니까?

= 네. 그런데 그것은 일 년에 길어야 두 달, 석 달씩 방학 때마다 왔다갔다 하면서 공부를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저는 일본에서 러시아 발레 인스티튜트와 공교육을 배우는 다른 학교도 다니는 등 세 군데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방학 끝나고 돌아오면 저는 또 두 군데 학교를 다녀야 하고, 방학 때는 평양의 학교에 가서 배우고 했어요.

▶ 열 한 살 때 김일성 주석 앞에서 군무(群舞)를 추셨다고 하던데요.

= 네. 20명 정도로 추는 춤이죠. 초등학교 5학년 때 전국에서 오디션을 몇 차례 해서 20명을 뽑는 데 합격을 하고 거의 넉 달 동안 평양에 체류한 것 같아요. 설맞이 공연이라고 해서 12월 31일에 김일성 주석을 모시고 하는 공연에 20회 정도 공연했었어요.

▶ 아주 평범하게 말씀하시는데, 그 당시에 김일성 주석 앞이라고 하면 막 떨리기도 하고 상당히 특별하셨을 텐데요?

= 이제는 20년 전의 과거의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상당했죠. 그 앞에서 춤을 춘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사람들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 때 최고 대우를 받고 최고의 공간에서 연습을 하고 했죠.

◇ 우연한 기회에 김해춘 선생님과 만나 최승희 선생의 춤 전수받아

▶ 11살 때의 그런 경험을 보면 천재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양의 무희로 불리면서 세계의 찬사를 받았다는 생각이 드다. 그래서 북한에서 무용의 전설적인 인물인 최승희 선생의 양아들이자 만수대 예술단의 안무가였던 김해춘 씨라는 분을 만나게 되고 최승희 선생의 춤을 전수받게 되셨다구요?

= 네. 15살 때입니다. 그 때 제가 중국 베이징에 유학을 하면서 전국무용콩쿨에 참가하라고 추천을 받았는데, 그 준비를 위해서 평양에 갔거든요. 그 때 김해춘 선생님과 처음 만났어요.

그 때부터 8년 동안 최승희 선생님 작품을 계속 전수 받게 되었죠. 처음부터 최승희 선생님 춤을 배우고자 간 것은 아니고요. 처음에는 김해춘 선생님이 저를 어린 처녀가 나한테 배우러 일본에서 왔냐고 당돌했다는 식으로 생각했는데, 딱 레슨을 해보니까 제가 많이 부족하지만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흡수력에 굉장히 빨랐다고 나중에 얘기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저를 찍으신 것 같고 그 분이 저에게 모든 것을 전수하겠다고 그 때부터 시작을 했는데 저는 그 때는 최승희라는 이름조차 몰랐어요. 나중에 공연을 하고 평가를 받으면서 최승희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최승희 선생님 작품을 전수받고자 찾아간 것은 결코 아니에요.

▶ 어느 인터뷰를 보니까 김해춘 선생이 너무 혹독하게 연습을 시켜서 귀신처럼 느껴졌었다던데, 얼마나 혹독했길래 그랬나요?

= 최승희 선생님의 ‘초립동이’라는 작품을 일본에서 처음으로 솔로 공연을 할 때 했었어요. 그 때 총 9개의 솔로 작품을 준비했는데 그 때 김해춘 선생님께서 몇 작품을 창작해주셨어요.

그 중에 최승희 선생님의 ‘초립동이’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대단한 테크닉을 요하는 작품이었거든요. 너무 힘들어서 연습 중간에 제가 쓰러져 버렸어요. 힘든 턴을 수십 번을 시키시니까 너무 어지러워 쓰러졌는데 아무 소리 안하시더라구요. 그냥 혀를 깨물고 일어나라고, 그러면 아프지 않을 것이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때 저는 선생님께서 너무 혹독하게 하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선생님의 예술에 대한 집념이었고, 최승희 선생님이 숙청 당하면서 최승희 선생님의 양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북쪽에서 안 좋은 영향을 많이 받으셨거든요. 그런 예술혼이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어서 그걸 저를 통해서 푸시려고 한 것 같아요. 선생님도 나이가 있으시니까 전수를 빨리 해야 되고 본인이 살아 있을 때 하나라도 작품 전수하고 이어가고자 하신 것 같거든요. 그런 마음을 나중에 제가 알게 되어서 선생님의 마음이 이해가 가더라구요.

▶ 어떤 분이 정말 독하게 시킬 때는 정말 재목감이다 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은데, 힘든 동작을 연습하면서 쓰러졌을 때 선생님이 일어나서 춤추라고 했을 때는 마음이 어떠셨어요?

= 정말 춤이라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힘들다는 것을 그 전부터 느꼈지만 그 때 솔로 공연을 준비하면서 정말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런데 나는 춤춰야만 사니까, 그것을 위해서 자기 목표, 저를 키우기 위해서 많은 분들의 희생 위에 제가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그 은혜를 제가 당연히 갚아야 하는거죠. 이미 저 혼자의 인생이 아닌 거에요. 이미 저는 공적인 입장이었고, 저 혼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십대 때 이미 느꼈고요.

저는 부모님 혹은 선생님, 저를 위해서 정말 심혈을 기울여주셨던 많은 분들과 저 자신을 위해서 당연히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해요. 그 정도 고통도 못 이겨낸다면 어릴 때 이미 포기했어야죠. 그래서 저는 감사한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조금이나마 좋은 무용수가 되고 좋은 표현을 할 수 있고 그래야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그 때가 10대에서 20대 사이인데, 멋있는 남학생과 데이트도 있었습니까?

= 있었죠. 없으면 인간이 아니죠. 무용 대학 다닐 때 친구도 만나고 공연 같이 다니고 하니까 서로 좋아 할 수도 있는 것이고요, 또 팬들이 꽃다발 갖고 와서 마음 끌릴 때도 있었죠. 저는 인간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모든 분들이 겪는 일은 당연히 겪죠. 같이 무용하는 분들 중에 저를 좋아하는 분들이 좀 있었어요.

▶ 김해춘 선생님께 배운 실력을 중국 무용콩쿨에서 처음 선보이신 건가요? 그 때 장내 규모가 2만에 가까울 정도로 대단히 컸었나봐요?

= 아무래도 중국 인구가 12억이기 때문에 무용인구도 대단히 많다. 여기 한국의 규모로 생각하시면 안되고요. 무용인구가 많기 때문에 1년 정도에 걸쳐 다 제치고 올라오는 거죠. 결선 하는 기간만 거의 석 달이 걸려요. 석 달 간 계속 비디오심사, 현장심사 하면서 마지막 결선에는 100명 정도에요. 그래서 저는 석 달 동안 심사를 거쳐서 결승까지 다 올라 건 것이고 마지막에 금메달까지 받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금메달 수상자 중에서 또 뽑혀서 CCTV로 전국에 방송되는 갈라콘서트까지 올라갔어요. 16살 때였죠.

▶ 2만명이 모이는 데서 어떻게 금메달을 땄습니까?

= 저도 10등 안에만 들어가면 굉장히 영광이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중간 심사 같은 경우는 우리 한반도의 춤만으로는 안되거든요. 외국춤도 추어야 되요. 전 티벳춤을 티벳에서 석 달 동안 배워서 췄는데 그 점수는 그렇게 높지가 않았을 거에요.

왜냐하면 그 쪽에 사는 분들은 워낙 어릴 때부터 배워 온 사람들이지만 저는 석 달 배운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점수가 높을 수가 없거든요. 하지만 제가 춘 장고춤이 점수가 굉장히 높았어요. 거의 만점 가까웠어요. 그 작품 때문에 제가 금메달 따게 되었죠. 저는 일본에서 있을 때 민족적인 차별을 받아왔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나는 한국 사람이고 예술을 통해서 차별을 극복하겠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중국에 가면서 다민족 국가에서 한 번 제가 우리나라의 멋있는 춤을 보여주고 싶다, 꼭 1등을 해서 우리나라 춤의 우수성을 알리고 싶다는 어린 마음이었어요. 그런 마음으로 했더니 금메달 받았어요.

▶ 장고춤은 다른 참가자들은 하는 사람이 없었나요?

= 장고춤을 추는 다른 참가자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볼 수 없고 아무도 못했던 ‘백바퀴 회전’이라는 최고도의 테크닉을 마스터해서 선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죠. 그리고 민족적인 정서, 장고도 사물놀이 하시는 김덕수 선생님의 가락을 남몰래 일본에서 배웠거든요. 그런 것들을 다 융합시켰어요. 남도의 가락들, 동아시아 춤의 테크닉들을 집약 시켜서 만들어서 최고의 춤을 선보였죠.

그 때부터 진짜 공연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중국 국가에서 고맙다고 감사패도 받고, 외국인이기는 하지만 특수한 경우로 국가대표로 많이 다른 동아시아 사람들과 같이 공연 많이 다녔어요. 4천m 히말라야에서도 한 달 동안 머물면서 공연했어요. 그렇게 지방곳곳을 다니며 공연 했는데 그것이 저한테는 굉장한 공부가 되었어요. 동아시아를 보고 배우고 예술을 접하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아요.

◇ 예술은 현대에 맞게 승화시키고 이어나가야 다시 환생되고 살아남는 것

▶ 그런 경력들이 쌓여서 한국에서는 백향주 씨를 가리켜서 ‘돌아온 최승희’다 라는 표현을 받으셨다. 어떠셨어요?

= ‘최승희의 재래(再來)’ 라는 평이 처음 나온 곳이 일본이었어요. 제가 니케이 컬럼에 세 번 나왔는데 논설위원이 저의 공연을 보시고 ‘최승희의 재래’라는 평을 쓰셨죠. 그런 평을 문화일보에서 보시고 저를 초청하고 공연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솔직히 한국에서는 최승희에 대한 평가가 높았지만 저는 최승희라는 사람을 잘 몰랐기 때문에 처음에 실감이 안났어요.

그래서 그 때부터 알아보기 시작하니까, 이번에서 한국에서 대학원 다니면서 논문도 썼지만, 알면 알수록 그 분의 춤에 대한 도전정신과 얼을 지켜 나가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여기서 제가 처음 최승희 제례악 공연을 했을 때 일부 사람들은 최승희와 동작이 다르다, 최승희는 이렇게 췄는데 왜 이렇게 다르게 추냐, 이것은 아니다 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건 저한테 있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평인거죠. 왜냐하면 예술은 그 사람의 예술이지 내가 했을 때는 달라야 나의 예술로 승화가 되고, 그런 정신과 기법을 현대에 맞게 승화시키고 이어가야만 살아남는 것이라고 생각해요다.

전통은 그냥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물과 공기와 잘 어우러졌을 때 그것이 다시 환생이 되고 살아남는 것이라고 본다. 최승희 선생님의 예술 정신 역시 그 당시의 새로운 춤을 만들고자 얼마나 힘들고 고통 속에서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제가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힘들고 몸도 여기저기 성한 곳이 없지만 지금부터가 정말 승부라고 생각을 해요. 그것이 최 선생님의 인생철학에서 제가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고, 우리 한반도의 전설적인 무용가의 맥을 이어서 더 열심히 21세기에는 세계에 인정을 받고 예술을 창조해나가는 것이 저의 몫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위해서 많이 노력해야죠.

▶ 이렇게 일본, 북한, 중국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고 하셨으면, 돈도 많이 버셨겠어요?

= 솔직히 저는 15살 때부터 출연료를 받고 공연을 해왔어요. 그렇지만 계속 투자해야 되요. 자기가 잘 되면 잘 될수록 더 많이 투자를 해야 되더라고요. 이것이 반비례가 되요. 자기가 잘 되면 더 버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면 의상 한 벌을 만들더라도 예전에는 50만원짜리 의상이면 됐는데 지금 같은 경우에는 한 벌에 300만원짜리 의상을 만들어야 되거든요. 말하자면 음악도 계속 퀄리티가 올라가고 투자를 계속 해야 하는거죠. 그렇다보니 계속 적자지요. 아직도 투자가 계속됩니다.

▶ 아까 몸이 성한 곳이 없다고 하셨는데, 몸이 어디가 안 좋으신가요?

= 저는 몸 전체가 비뚤어져 있어요. 약간 척추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한 쪽 어깨가 항상 비뚤어져 있어요. 저는 몰랐는데 남편이 말해주더라고요. 왜 몸이 비뚤어졌냐고 제대로 서라고 하는데 나는 제대로 서있는데 하면서 거울을 보니까 어깨 자체가 사선으로 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알고 보니 목디스크도 있어서 치료도 받고, 중간에 유학을 하면서 너무 무리해서 허리도 완전히 상했구요. 직업병이죠. 2살 때부터 30년 동안 몸을 혹사해왔기 때문에요.

▶ 그래도 무대에 올라가시면 다시 힘이 나시죠?

= 네. 춤을 춰야 몸이 편해지니까.. 몸도 비뚤어져 있는데도 춤을 춰야 기분이 좋아지고 맑아지니까 해야죠.

◇ 조총련이신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행 결심

▶ 한국에 둥지를 틀게 된 것이 1998년 남북 화해 무드를 타고 한국에서 첫 공연이 있었다. 1998년이나 되서야 가능했습니까?

= 네.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계실 때 한국의 정세가 많이 달라졌어요. 그래서 교포들이 많이 한국국적을 취득하게 되었어요.

▶ 부모님께서는 조총련이셨죠? 그러면 부모님께서는 북한에서 활동을 계속하지 왜 남한으로 가느냐 라고 엄청 반대하셨겠어요.

= 부모님이 30년 넘게 조총련에서 일을 하고 인맥을 두고 계셨는데, 한국에 간다는 것은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거든요.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우리 어머니는 직장에서 딸을 잘못 키웠다고 해서 직장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죠.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동포이지만 적이라는 정치적인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요. 접촉 자체도 어려웠는데 제가 한국에 와서 공연을 하겠다고 하니까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셨죠.

▶ 상황이 그런데도 본인이 한국에 가시겠다고 하신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나요?

= 저의 최종 목적이 어느 나라를 위하거나 어떤 좁은 범위, 경계를 넘어서는 월경인(越境人)이 되고 싶었어요. 사람이 경계를 만듦으로써 적이 생기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싶었고, 그런 경계가 있음으로 해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불편을 겪었고, 경계인이기 때문에 항상 월경인을 지향했고, 저는 남북은 항상 하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한민족 사람이잖아요. 북에 가도 우리말 쓰고 남에 가도 우리말 쓰잖아요. 같은 언어와 역사를 갖고 있는데 문화도 공유해야 하지 않겠어요?

▶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어떠셨나요?

= 감회가 깊었어요. 여기에 살고 계시는 분들은 느끼지 못하시겠지만, 간판에 쓰여 있는 한글만 봐도 감동적이었어요. 우리말과 글을 학교에서 배워왔지만 우리나라에 대한 동경심이 있고 고향이 그립잖아요. 그래서 저의 아버지 고향인 경주에 가봤어요. 고향 향기 맡으면서 새마을호 타고 갔는데 감회가 깊었어요.

우리나라 산과 물을 보면... 저처럼 외국에서 오래 살고 외국에서 차별을 받다보면 자기의 민족을 부정하려고도 하거든요. 자기 이름도 당당하게 못 쓰는데 왜 조선 사람으로 태어났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여기 오면 내 이름도 당당히 쓸 수 있어서 좋았어요. 역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 감회가 정말 남달랐어요. 그래서 처음 한국에서 공연을 할 때 제가 북쪽과 남쪽 모두에서 공연하고 제 춤을 선보일 수 있다는 자체가 정말 감동이었어요. 미국이나 유럽이 아니라 한국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굉장히 준비를 많이 하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8-9개의 솔로 작품 들고 왔어요.

▶ 아버지 고향인 경주에 도착하셨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시던가요?

= 내 선조인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태어나신 이 곳에 이제야 올 수 있게 되었구나 싶었죠. 한국이라는 나라가 가고 싶어도 제일 가까운데도 유일하게 못 가는 나라였어요. 그러나 지금은 자유롭게 왔다갔다하고 여기서 결혼을 하고 딸도 낳고 살고 있잖아요. 지금도 여기서 살면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잖아요. 이런 것은 10년 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 한국 국적도 취득하시고, 신랑도 경상도 사나이시죠? 어떤 점이 좋아서 결혼 하셨어요?

= 대학원 다닐 때 만났거든요. 예술학 전공하는 공부하는 사람이었어요. 만나면서 얼마 안 지나서 아마 이 사람과 결혼할 것 같다, 내 인생을 같이 걸어갈 것 같다는 직감이 오더라구요. 그래서 저의 예술에 대한 좋은 선생님으로서 저를 항상 인도해주고, 저는 잘 따르고 믿고 실천하는 파트너쉽이 잘 된 것 같아요.

◇ 동시대의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경계를 넘는 춤의 장르 개발을 위해 더욱 노력하고 싶어

▶ 지난 가을에 동아시아 춤 컴퍼니를 창립하셨는데, 앞으로 많은 성과가 있어야 할텐데요?

= 아직은 시작하는 단계이고 깃발을 꽂아놓은 상황이고요. 이제부터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지향하는 경계를 넘는 춤 장르를 개발하고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예술을 만들어 나가서 그것을 동시대의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저의 바람직한 케이스고요,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 인터뷰를 하면서 보면 개인적으로는 노마드 기질이 있고, 정치상황적인 면에서는 이방인의 대우를 많이 받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남편 분이 ‘당신은 흐르는 섬 같대이.’ 라는 표현을 하신다고요?

= 남편이 ‘흐르는 섬’이라고 저의 별명을 지어 주었어요. 저를 만났을 때부터 그런 말을 했었어요. 저는 그 때는 이해를 못 했는데 지금에는 좀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디서 뿌리를 내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저의 예술이 어떻게 넓게 여러 사람들과 접근을 할 수 있는가 세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나의 춤 하나가 내 육체 하나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어떤 보탬이 될 수 있는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정말 앞으로도 힘든 일이 계속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시다시피 예술을 창조해 나가고 자기 장르를 개발하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기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거든요.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흐르는 섬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저의 예술이 있고 저의 원동력이었어요. 저는 편한 자리에 있었으면 예술을 이렇게 못했을 거에요. 불안정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예술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에 와서도 그런 것을 느끼고 있어요. 내 나라에 와서도 편안한 것 하나도 없어요. 여기에 와서도 역시 나는 나일뿐 인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이라는 나의 입장이 역시 예술을 만들어가는 데 힘이 되고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가야만 힘든 과정을 넘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좋게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 정말 춤으로 세계인에게 희노애락을 주는 그런 백향주 씨가 될 것 같다. 이제 단순한 이방인, 노마드가 아닌 춤으로 희망을 주는 에뜨랑제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늘 말씀 잘 들었다.

감사합니다.

※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정리/김은옥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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