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해방 60년, 재조명되는 몽양 여운형

  • 2005-01-09 18:49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해방 60주년을 맞아서 정부가 그동안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던 좌익 계열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서훈 작업을 추진한다는 소식인데요.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손꼽히는 인물이 여운형 선생입니다. [시사자키가 만난 사람] 오늘 첫 번째 손님은 몽양 여운형 추모 사업회 강준식 사무총장과 함께 합니다.

◎ 사회/정범구 박사>
몽양 여운형 추모 사업회는 언제 만들어 졌나.


◑강준식 사무총장>
1991년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몽양 선생의 공식적인 추모 행사가 시작된 것은 1965년부터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그 행사의 고문이었다. 이효상 국회의장, 윤보선 전 대통령 등 당시 각계각층의 저명인사 359명이 대거 참가했다. 그렇게 된 배경은 박정희 대통령이 개인적으로는 여운형 선생을 좋게 생각하고 있었고, 또 육영수 여사가 여운형 선생의 딸과 배화고녀 선후배 관계였다는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그 때는 화려했는데 그 이후에는 조금 시들해졌다. 아마도 정치적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 사회/정범구 박사>
5.16쿠데타 이후에 몽양 추모 사업회가 만들어졌고, 더구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고문을 맡았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의외다.


◑강준식 사무총장>
현 추모 사업회가 결성된 것은 91년도이고, 그 전에는 공식적인 추모 행사를 가질 수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이 박정희 대통령이 주선하는 바람에 규모가 커졌던 것.


◎ 사회/정범구 박사>
여운형 선생과 동시대를 같이 사셨던 원로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인물도 출중하셨다고.


◑강준식 사무총장>
한국 사람도 그랬지만 특히 일본 사람들이 몽양을 많이 평가했다. 그래서 조선 총독의 사위되는 사람은 자기가 여자라면 몽양에게 시집가야겠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요즘 말로 하면 얼짱에 해당됐던 모양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실제로 옥고도 몇 차례 치렀던 몽양이 왜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걸까.


◑강준식 사무총장>
아마도 몽양 선생이 해방 정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정치인이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불리하게 작용했는데, 해방 정국에서 몽양의 정적이었던 정치 세력이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여운형 선생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인다. 그것이 그대로 존속되면서 몽양은 공산주의자가 아님에도 공산주의자로 치부됐다.


◎ 사회/정범구 박사>
몽양은 해방 이전 44년경부터 건국동맹이라는 것을 전국적으로 준비했는데.


◑강준식 사무총장>
44년 하반기였다. 그 때는 몽양이 감옥에 갔다가 출옥하면서부터부터다. 어떤 사람들은 예지력이 있었다고도 하지만 몽양은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도메이 통신의 기자였던 김아무개씨는 외신 기자였기 때문에 AP, UPI를 다 봤다. 그것을 발설하면 이 사람은 감옥에 가는 거다. 그런데 이 분이 몽양과 비밀 커넥션을 가지고 있었다.


또 아사히 신문에 정국은 기자가 총독부를 드나들면서 상당한 정보를 몽양 쪽으로 흘렸다. 그런 정보의 바탕 위에서 몽양 자신이 일본 고위층과 만나면서 나름대로 감지한 정보 등을 통해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건국 동맹은 그 조직책이 조선 13도에 다 있었다. 웬만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런 일을 못했을 것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더군다나 몽양은 박헌영처럼 지하에서 숨어서 활동하는 분이 아니라 완전히 공개 활동을 하는 명사 아니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지하 조직을 꾸린 것은 상당히 대담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강준식 사무총장>
그래서 지하적인 방법을 썼다. 건국 동맹의 장소가 한의원이었고, 환자들이 드나드는 것처럼 위장했다. 또 몽양 선생은 좌파 진보 세력만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우파 또는 보수 세력을 같이 껴안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우파에 대한 배려를 많이 했다.


그래서 초기에 부장도 다섯 개 밖에 만들지 않았다. 우파가 들어와서 협력할 때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 조직에 되도록 좌파 세력을 심지 않고, 공정하게 하느라고 본인은 많이 노력했던 것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건준도 결국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 위한 사전 단계로 있었던 조직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나.


◑강준식 사무총장>
몽양 자신은 인공을 만드는 것을 그렇게 찬성하지 않았다. 경성 3대 수재라는 사람들이 몽양 산하로 들어오게 되는데, 그런 분들이 박헌영 산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분들이 주도해서 몽양이 딸려 가게 된 것.


◎ 사회/정범구 박사>
그런데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몽양이 조선인민공화국 선포를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나.


◑강준식 사무총장>
부주석으로 이름은 나갔다. 그러나 그 내막을 보면, 나중에 남로당이 주도를 해서 몽양이 우파에게 여러 차례 러브콜을 했는데 우파가 응하지 않으니까 딸려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45년, 미군이 아직 들어오기 전에 수도 서울에서 나름대로 준비 조직을 갖추고 있던 것은 몽양의 건국동맹이었고, 또 그런 것을 기반으로 해서 건준도 구성했고. 그러다가 9월 8일 하지가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나. 그러면서부터 몽양을 의심하고 배척하고, 국내에 있던 보수 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몽양이 급속하게 위축된 것 아닌가.


◑강준식 사무총장>
몽양이 좌파와 같이 해나간 부분이 있지만 몽양이 급격히 좌파로 몰리게 된 배경은 우선 조선 총독부에 17방면군이라고 있었다. 조선군 사령부이기도 한데 거기서 오끼나와에 있던 하지와 무전 교신을 한다. 그 주요 내용은 ''''큰일 났다. 북한은 이미 좌파가 장악했고, 남에는 남로당 공산당이 다 장악했는데 그 상징적인 사례가 인공이다''''는 것이었다.


미군 쪽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초기에 미군정의 G2가 만나는 인물들이 기독교 계통사람들, 주로 연세대 교수 등 미국 통들이었고, 그들이 주로 우파였다. 몽양은 이들의 정적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몽양을 많이 비난했다. 그러니까 미군은 자연히 그런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러면 몽양 선생의 출생부터 이야기해 보자. 1886년 경기도 양평 태생인데, 양반집안에서 노비를 해방시켰다고. 당시에는 상당히 파격적이었을 것 같은데.


◑강준식 사무총장>
몽양이 노비를 해방시키니까 동네 양반들의 항의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런데 몽양은 당시 젊은 나이에 계몽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나보고 정신 나갔다고 하는데,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이제부터는 상전도 없고, 종도 없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평등하므로 주종주의는 어제까지의 풍습이다. 오늘부터 그대들은 종이 아니라 나의 형제자매니 모두 자유롭게 행동하라''''면서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런 몽양의 말에서는 기독교적 박애주의도 느껴지는데. 어떤 영향을 받은 걸까.


◑강준식 사무총장>
몽양뿐 아니라 그 시절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초기에는 러시아, 영국, 일본 등을 생각하다가 막판에는 미국에 구원이 있는 것으로 봤다. 그 때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서울에 많이 들어와 있었는데, 몽양은 클라크, 우리 이름으로는 곽안련이라는 미국 목사의 집에 드나들면서 영어를 배웠다. 그래서 몽양이 영어를 잘한다.


특히 집결지가 승동교회였다. 이시영, 이회영 이런 분들이 다 승동교회 출신들인데, 몽양도 거기에 다니면서 기독교적 사상을 갖게 된 것이다. 몽양 자신도 평양 신학교에 들어갔고, 목사가 되려고 했었다.


◎ 사회/정범구 박사>
올해 해방 60주년 기념사업으로 가장 첫 번째로 몽양의 서훈을 추진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몽양은 어떻게 해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게 됐나.


◑강준식 사무총장>
몽양 선생은 을사보호조약 때, 민영환씨가 자결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방 연설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하도 연설을 잘해서 청중들이 감동해서 엉엉 울었다고. 또 하루는 지나가던 양평 군수가 지나가다가 몽양의 연설을 듣고, ''''정말 훌륭한 젊은이다. 내가 그대 연설을 듣고 일진회를 탈퇴할 생각이 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일진회는 친일 조직 아닌가. 그런 일화가 남아있을 정도로 젊어서부터 말솜씨는 뛰어났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한국에 건너와서 연설하는 것을 듣고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도산도 미국에서 왔으니까. 그런데 그 뒤에 손문이 신해혁명을 일으켜서 청나라를 없애고 중화민국을 세우지 않나. 그것을 보고 중국에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것이 1914년이었다. 남경에 있는 금릉대 영문과에 들어가서 졸업한 것이 1917년도.


졸업 후 몽양은 협화서국이라는 미국인이 운영하는 서점에서 일을 하면서 상해 교포들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주다가 조직한 거류민단의 단장이 된다.


그 무렵 1차 대전이 끝나면서 국제연맹을 주도하고 있던 윌슨 대통령이 상해에 크레인 특사를 보냈다. 이 분이 민족자결주의를 부르짖던 분 아닌가. 그 것은 피압박민족에게는 복음처럼 들렸을 것이다. 몽양도 크레인 특사를 만나고 고무돼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도 파견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런데 나라 없는 백성이기 때문에 대표 기관이 없어서 상해에 있던 터키 청년단을 본 따 신한 청년단을 결성한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이것은 아직 임정 구성 전의 일인가?


◑강준식 사무총장>
구성 전이다. 그래서 정치사회에서는 한국 최초의 정당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김규식 박사를 파리 강화 회의 대표로 보냈는데, 이것이 여운형 선생의 공식적인 독립운동의 시발이 된다.


◎ 사회/정범구 박사>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면서 상해에서도 4월에 임시 정부가 성립되지 않나. 임시정부가 성립 될 때 초기부터 참여하셨나.


◑강준식 사무총장>
3.1운동이 나서 손병희 이하 모두 검거되지 않았나. 지식인들이 국내에서는 활동을 못하게 되니까 중국으로 건너오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상해는 조계지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활동이 보장됐다. 여운형 선생이 1914년도부터 거기에서 유학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터줏대감으로서 이 분이 모든 것을 제공했고, 초석을 다졌다.


그런데 이분은 유학을 가기 전에는 무명 청년이었고, 한국에서 온 분들은 전부 명망가들이었으니까 외교부 차장으로 시작을 했는데, 결국 임정은 명망가 중심이 된다.


◎ 사회/정범구 박사>
여운형 선생을 독립운동 지도자로 당시 조선 국내 뿐 아니라 특히 일본에서도 이름을 알리게 한 것은 일본에서의 연설 때문이었는데. 그 때 어떻게 해서 일본으로 가게 됐나.


◑강준식 사무총장>
임정은 명망가 중심으로 움직이는데다 내부에서 파벌이 심했다. 감투싸움도 심했고. 그러니까 젊은 여운형으로서는 ''''나라를 잃어 독립 운동을 하는 단체가 감투 사업이나 하는 단체냐 그러면 나는 임정에서 일하기보다 외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상해에 와 있던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외교관 급들을 찾아다니면서 영어로 연설을 많이 했고 그것이 영자지에 많이 보도됐다.


그런데 일본도 3.1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조선 인민을 회유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그래서 누군가 영향력 있는 사람을 고르려고 했는데, 참신한 여운형을 선택하게 된 것. 그런데 상해 임정에서는 일본의 목적이라는 것은 여운형 선생을 통해서 한국 민족의 독립 운동을 누르고 회유하자는 것 일테니까 몽양의 일본행을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여운형 선생이 가는 것을 찬성했던 것은 안창호 선생이었다. 여운형 선생은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가 가지 않으면 깨끗해서 좋은데, 그렇게 한다면 까마귀 세상이 될 것 아닌가. 내가 까마귀 세상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변절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가서 자신의 독립 사상을 피력하게 된 것이다.


많은 일본의 정치가들이 여운형 선생을 회유하려고 했지만, 이 분이 워낙 정신이 투철하고, 말을 잘해서 일본의 어떤 장관은 ''''너와 말하다가 밑졌다''''며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다.


◎ 사회/정범구 박사>
상해는 우리 임시정부의 본거지이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고려 공산당의 본거지가 되기도 했는데.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이 여운형이었다고.


◑강준식 사무총장>
그렇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은 독일어판이 아니라 영어판이었다. 그 뿐 아니라 부하린의 ''''공산주의 ABC'''', 또 ''''직접 행동''''을 포함해서 세권 정도 번역했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런데 그 때는 이렇게 이념적 대립이 있었던 때는 아니었는데.


◑강준식 사무총장>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고, 나중에 우파인 장덕수도 깊이 가담했다. 당시에는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는 세력이면 됐다는 맥락에서 접근했던 것이지 공산주의나 무슨 주의를 갖고 했던 것은 아니다.


◎ 사회/정범구 박사>
몽양이 레닌을 만났다는 것도 사실인가.


◑강준식 사무총장>
사실이다. 몽양은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 대표로 가서 레닌을 만났는데, 레닌이 ''''조선은 과거에는 문화국이었으나 현재는 혁명역량이 모자라는 국가''''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 사회/정범구 박사>
몽양은 중국뿐 아니라 동남아 각국을 많이 여행한 모양인데.


◑강준식 사무총장>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냄비 근성이 있지 않나. 3.1운동 이후 1~2년은 요원의 불길처럼 내외에 독립열기가 타올랐는데 1~2년이 지나도 아무런 전망이 안 보이니까 다들 시들해져서 떠나 버렸다. 그래서 나중에 김구 선생만 외롭게 남아있게 됐는데, 그렇게 된 것이 불과 1~2년이다. 1~2년 정도 지나면 임정의 존재가 거의 유명무실해 진다.


그래서 여운형 선생도 신문사 통신원, 상해 동방대학 영어 강사 등을 하다가 상해 복단 대학 체육 담당 명예 교수로 있으면서 축구부원들을 데리고 원정 시합을 다녔다. 그래서 동남아로 다닐 때마다 필리핀 등도 다 식민지였기 때문에 아시아 민족의 단결을 주장하다가 마닐라 현지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고.


◎ 사회/정범구 박사>
스포츠에도 상당히 애정도 많았다는데.


◑강준식 사무총장>
조선 체육회 회장을 지낸 분이니 만큼 체육 인사들과의 유대관계가 깊고, 본인도 아령을 좋아해서 1930년대에 아령 상품 선전에 나가서 웃통을 벗고 찍은 광고 사진도 있다. 집에서는 아들과 투포환 던지기를 즐겼고. 또 축구를 좋아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 사회/정범구 박사>
상해에서 쭉 활동을 하다가 국내에 들어오게 된 것은 언제인가.


◑강준식 사무총장>
1929년인데 상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서 압송돼 온다. 체포된 과정이 재미있는데, 야구장에서 야구 구경을 하다 잡혔다고 하기도 하고, 일설에는 경마장이라고도 하고.


◎ 사회/정범구 박사>
29년에 들어와서는 무엇을 했나.


◑강준식 사무총장>
대전 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했다. 당시 재판정 앞에는 이 공판을 보려는 민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만큼 민중의 괌심사 였던 것.


그런데 3년간 형을 살고 나오니까 집도 없고, 직장도 없지 않나. 1914년에 유학 가서 중국에서만 살아왔으니까. 그 이후 평생 동지였던 조동호씨 등이 중심이 돼서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영입을 한다.


◎ 사회/정범구 박사>
많이 알려지기로는 동아일보가 먼저 손기정 선수의 배에 있던 일장기를 말소한 것이라는데, 사실 조선중앙일보가 먼저 한 것이라고.


◑강준식 사무총장>
동아일보 보다 13일 먼저 했다. 당시에는 특파원을 내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중앙일보에서 스포츠 아사히 표지 사진으로 실린 손기정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실었다. 그것을 동아일보가 13일 뒤 똑같이 하게 됐고, 결국 둘 다 정간이 됐다.


◎ 사회/정범구 박사>
그런데 끝내 조선중앙일보는 복간을 못하지 않았나.


◑강준식 사무총장>
재정 상태도 동아일보보다 약했지만, 또 의식이 있는 주주들이어서 이렇게 황군 만세나 쓸 바에는 차라리 문 닫자고 해서 문을 닫게 됐다고 한다.


당시에 사세는 조선일보가 제일 좋았다. 그래서 조선일보 사장을 광산왕이라고도 했는데. ''''조선일보 사장은 자가용으로 납시고, 동아일보 사장은 인력거 타고 끄덕끄덕,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은 걸어서 터벅터벅''''이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사세는 약했지만, 당시 중앙일보에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대거 기용됐다. 그래서 논조가 진보적이었고, 몽양은 특히 어린이를 중시해서 소년조선중앙지를 창간했다. 그래서 본인도 거기에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 사회/정범구 박사>
이미 44년부터 일본의 패망을 과학적으로 예견하고 건국 동맹 등을 준비하다가 해방을 맞고 건준을 결성하고, 그것이 조선인민공화국 선포로까지 가지만 곧 이어서 서울에 진주한 하지 군정 장관이 철저하게 무시했고, 또 좌우 대립이 격화하면서 중간에 있는 온건 중도 세력이 설 땅이 없어진 것도 여운형의 입지를 좁힌 것 아닐까.


◑강준식 사무총장>
크게 보면 그런데, 그것도 과정이 조금 있다. 미국이라고 해도 미군정과 미국무성의 입장에는 차이가 있었다. 미 국무성 쪽에서는 좌우 합작을 주도했지만, 미군정은 펜타곤 산하에 있었고, 펜타곤은 전략적으로 소련과의 대치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파를 지원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는 몽양이 하지 사령부로부터 무시를 당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미국 쪽에서 부단히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 사회/정범구 박사>
좌우 합작에 김규식과 몽양을 주역으로 하려는...


◑강준식 사무총장>
그래서 한 때는 굉장히 성공적으로 나가는 순간이 있었다. 좌우합작의 성공 기미가 보이니까 모든 좌파와 우파 세력, 특히 우파 세력이 다 몽양 쪽으로 쏠렸다. 그러니까 우파세력이 낙동강 오리알처럼 돼서 결국 몽양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


◎ 사회/정범구 박사>
그래서 47년 7월 19일에 암살을 당하게 되는데, 암살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그 후에 밝혀졌나.


◑강준식 사무총장>
형식적으로 한국 정부에서 발표한 것은 있는데 그것은 엉터리이고, 어쨌든 우파 행동대, 뒤에는 국립 경찰이 있었고, 그들을 진두지휘 하던 국내 세력과 미군정, 그리고 미 군부의 묵시적인 동의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 사회/정범구 박사>
오늘의 시점에서 여운형 선생의 삶과 사상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뭐라고 보나.


◑강준식 사무총장>
이 분의 생을 보면 사심과 무력이 없었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실패할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갖고 있었지만, 민중에 대한 사랑을 사실상 몸으로 실천했던 분이다. 그래서 미군 헌병을 경호원으로 붙여주겠다는데도 ''''대중과 나는 격리될 수 없다''''며 여러 차례 거절을 하다가 결국은 암살을 당했는데. 합리적 진보세력이었다고 하는 점에서 앞으로 이런 것들은 우리가 이어 받아가야 할 대목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진행:정범구박사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98.1MHz 월~토 오후 7시~9시)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