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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조선을 사랑하는 블랙 마운틴의 미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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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기독교는 올해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맞아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북한의 수도 평양은 과거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기독교가 번성한 도시였다. 이런 명성 때문에 1900년대 초반부터 1940년까지 조선과 일본, 중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기독교 선교사들은 자녀들을 평양의 외국인학교 (PYFS)로 유학보냈다. [BestNocut_R]

    조선 근대화와 함께 한반도에 대학과 병원 등을 세우며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던 이 학교 졸업생들 중 일부와 그 후손들이 현재 미국 동부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블랙마운틴이라는 한적한 산골도시에 살며 지금도 북한을 계속 돕고 있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이 전하는 이들 후손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 평양외국인학교, 그 아름다운 기억

    미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윌슨가 4세대 대가족이 한 자리에 모였다. 가족사진을 촬영하는데 느닷없이 60명이 넘는 푸른눈의 대가족이 ''김치''를 함께 외친다.

    윌슨 가족의 왕할머니인 올해 97살의 엘리자베스를 비롯해 7남매 중 6명이 모두 한반도가 갈라지기 전 옛 조선땅에서 태어나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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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초반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된 의사 로버트 윌슨 부부의 자녀들인 이들 7남매는 전라도 순천에서 자랐고, 모두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했다. 윌슨가에서 조선을 빼놓으면 가족의 역사를 쓸 수 없다.

    수십 명의 윌슨 가족이 이달 중순 블랙마운틴의 몬트릿 장로교 휴양지에 모인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엘리자베스 할머니는 몬트릿 휴양지는 지금으로부터 1백년 전인 지난 1907년, 자신들의 모친인 윌슨 여사가 처녀의 몸으로 조선에 선교를 떠나기로 서약한 장소다. 그녀의 자손들이 정확히 1백년 뒤에 다시 같은 장소에 모인 것이다.

    1907년은 윌슨집안 뿐 아니라 조선의 기독교 역사와 세계 기독교 부흥사에 빼놓을 수 없는 평양 대부흥이 일어난 해다. 1907년 평양에서 불기 시작한 평양 대부흥 운동은 기독교 불모지였던 조선땅에 신도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고, 그 결과 현재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1만 5천여명의 선교사를 세계 각지에 파송하는 나라가 됐다.

    윌슨가의 조선 선교1백주년 기념모임을 축하하기 위해 4대째 조선 선교를 하고 있는 린튼 집안의 노장 유진 린튼 박사와 드와이트 린튼 목사 형제가 이 도시를 방문했다.

    1930년대 후반 평양외국인학교에서 잠시 공부한 경험이 있는 린튼 형제들은 어린시절 부모의 선교지였던 전라남도 순천에서 윌슨 남매들을 만났었다.

    윌슨가와 린튼가는 모두 미국 남장로교 소속으로 조선에 파송됐다. 두 집안의 후손과 조선에서 활동한 다른 은퇴 선교사들이 이곳 블랙마운틴에 살고 있는 이유는 몬트릿 휴양지가 미국 남장로교 모임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평양외국인학교 출신으로 한국에서 의료와 학원 사역을 했던 84살의 마리엘라 프로보스트 할머니. 한국전쟁 때도 미국으로 피신하지 않고 계속 남아 한국인을 도왔던 마리엘라는 대학시절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자녀들이 방학 중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블랙마운틴의 몬트릿이었다고 말했다.

    부모들은 세계 각지의 선교지에 나가 있고 자녀들은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방학에는 몬트릿이 집과 다름 없었다고 마리엘라 할머니는 말했다. 외국에서 자란 이들은 은퇴한 뒤에도 딱히 갈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다시 이 곳 블랙마운틴으로 돌아와 짐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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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했거나 조선에서 선교사 생활을 한 뒤 블랙 마운틴에 정착한 미국인 수는 20 명이 넘는다. 지난 1986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평양외국인학교 출신 총동창회 모임이 블랙마운틴에서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졸업생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고 10여명도 채 안되는 노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블랙 마운틴에 남아 살고 있다.

    평양외국인학교 40년사에 관한 종합앨범을 들여다 보며 옛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당시 평양외국인학교 남학생들은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학교,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조선크리스천컬리지 등 평양 시내의 다른 조선인 학교 학생들과 자주 운동경기를 가졌다. 윌슨 박사는 축구는 조선인 학생들이 거의 이겼고 농구와 아이스하키는 자신들이 더 잘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지금은 그 모든 순간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93살의 라바트와 91살의 존 윌슨 박사 형제. 이 정도 고령이면 잊을만도 한데 평양외국인학교의 교가를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1928년 졸업생인 누나 엘리자베스 씨도 기억을 더듬으며 노형제들의 장단에 끼어든다.

    평양외국인학교는 1900년에 개교해 40년 간 지도자를 육성하다 1940년 11월 미국과 전쟁 중이던 일본 정부의 탄압으로 폐교됐다.

    이 학교는 1914년 학생 기숙사가 세워지고 미국에서 유능한 교사들이 건너오며 급성장했다. 평양이 동양 기독교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조선 전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선교사, 외국인 상인들이 자녀들을 평양외국인학교로 보냈다.

    존 윌슨 박사는 40년 동안 5백84명이 이 학교에 등록해 수학했고, 그 가운데 1백88명이 졸업했다고 말했다.

    중간에 학제가 개편됐지만 중등학교 과정 7년제로 운영된 이 학교에는 세계적인 기독교 부흥사 빌리 그레엄 목사의 부인인 고 루스 그레엄 씨를 비롯해 수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배출됐다. 졸업생들은 전세계로 퍼져나갔으며 그 중 다수가 한국에 남아 이화여전 등 수많은 대학과 병원을 설립하며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1996년 평양외국인 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존 윌슨 박사. 평양 보통강변 기차역 옆에 있던 학교의 흔적을 찾으러 방문을 시도했지만 북한 당국의 규제로 접근하지 못했다.

    학교와 기숙사 건물은 모두 사라졌고 인근에 러시아대사관이 들어섰다는 얘기를 지인들로부터 들었다고 윌슨 박사는 말했다. 반세기가 넘은 뒤 방문한 평양은 그러나 예전과는 무척 달랐다.

    윌슨 박사는 과거 북한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고 산업시설도 우수했다며, 그에 비해 남한은 논밭이 많은 농촌지역이 대부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지금은 남과 북이 정반대가 됐다. 조선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인지 북한을 방문한 윌슨 박사나 린튼가족 모두 "다 아는 이야기 아니냐"며 북한의 열악한 현실에 대해 말을 아꼈다.

    대신 이들 노인들과 후손들은 북한을 위해 기도하며 인도적 지원에 적극 나서고 있다.

    ◈ 조선을 사랑하는 블랙마운틴의 미국인들

    미국 동부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랙 마운틴시. 은퇴노인들이 모여 사는 한 한적한 동네의 주택 앞에 ''부례문''이란 한글 명패가 선명하다.

    북한과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보낼 모자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84살의 마리엘라 프로보스트 할머니가 이 집의 주인이다.

    "안녕하세요. 나 전라남도 광주가 내 고향이다. 내 부모는 1910년부터 1957년까지 한국서 선교사 일 했다. 나는 1948년 전주예수병원 간호원일 나가러 갔다. 결혼한 후 대구로 이사하고 대구동산병원에서 일했어요. 한국말 많이 잊었지만 사랑은 잊지 않았어요. 늘 한국을 사랑하겠다."

    선교사 부모 때문에 조선 전라도에서 자랐고 평양외국인학교 출신이기도 한 마리엘라 할머니!

    한국전쟁 때는 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남한에 남아 간호사로 한국을 도왔다. 1960년대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초기 한국 유학생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설립했고, 은퇴 뒤에는 블랙마운틴의 노인들과 함께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Christian Friends of korea) 이란 단체에 가입해 북한을 돕고 있다.

    블랙마운틴에 살고 있는 존 윌슨 박사 남매 역시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의 회원dl다.

    90대의 이 노 남매는 전라도 순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린시절 조선인 친구들과 함께 상두꾼들이 상여를 지고 가며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어느덧 1백 살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윌슨 남매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나병 환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윌슨 선교사이다.

    "살려주쇼! 살려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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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거지 나병 환자를 도우며 시작된 환자 사역!

    로버트 윌슨은 광주에서 조선 최초로 나병 환자 요양소인 애양원을 세웠고 이후 일본정부의 박해로 여수, 소록도로 이동하며 1956년까지 1만명이 넘는 조선인 나병 환자들을 돌봤다.

    역시 의사인 아들 존 윌슨 박사와 누나 엘리자베스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애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젊음을 불태웠다.

    이제 백발 노인이 된 윌슨 박사의 눈은 50년 전 남한의 의료 현실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북한으로 향한다.

    고난의 행군 소식을 들은 1990년대 중반. 존 윌슨 박사는 미국인 친구 의사들에게 연락해 결핵약을 모으고,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과 옥수수와 콩, 시금치씨 등 농사에 필요한 지원품을 사서 북한으로 보냈다.

    1996년에는 북한 정부의 초청으로 평양외국인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북한에 들어가 비닐하우스 재배 기술을 전수하고 북한 내 의료시설을 둘러 봤다. 반세기만에 다시 찾은 평양. 윌슨 박사의 볼에는 그러나 눈물이 흘렀다.

    전기부족으로 밤에는 암흑천지로 변하는 평양!

    유일하게 거대한 조명을 받는 김일성 동상. 지원품 강냉이는 전동기차가 움직이지 않아 도착할 생각을 안하고, 병원은 엑스레이 기계 하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윌슨 박사에게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된 곳이 아니라 하나의 조선이며, 자신이 태어나 자랐고 친구들과 뛰놀던 모교가 있는 푸근한 집과 같은 곳이었기에 마음이 더욱 아팠다.

    노스캐롤라니아주 블랙마운틴에 사는 조선 출신 선교사 노인들과 후손들은 대부분 CFK 회원들이다. 이들의 북한사랑에 물고를 튼 사람은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엄 목사 부부이다.

    1992년 김일성 주석은 그레엄 목사의 부인 루스 그레엄 씨가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인연을 들어 그레엄 부부를 평양에 초청했고, 이들의 이웃이자 한국어를 잘하는 린튼가의 어른 중 한 명인 드와이트 린튼 목사가 통역으로 함께 북한에 들어갔다.

    린튼 목사는 당시 빌리 그레엄 목사는 한반도 분단 이후 서방세계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레엄 목사는 김일성 주석의 특별허가로 평양의 한 실내체육관에서 기독교 집회까지 열었다.

    1994년 그레엄 목사는 다시 김 주석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방문했고 당시 통역을 맡았던 드와이트 린튼 목사의 조카 스테판 린튼 현 유진벨 재단 회장은 두 노인이 마치 오래 사귄 죽마고우처럼 평화롭게 대화를 나눴다고 말했다.

    드와이트 린튼 목사는 김일성 주석이 당시 그레엄 목사와의 대화에서 자신과 기독교와의 인연에 대해 언급했다고 말했다.

    목사인 외삼촌이 교회에 가자고 여러 번 제의했지만 김일성 주석은 낚시를 더 좋아해 교회에 따라가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린튼 목사는 전했다.

    김일성 주석의 어머니 강반석 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외삼촌인 강량욱 씨는 기독교 목사였다. 북한은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지금 세계 최악의 기독교 탄압국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빌리 그레엄 목사의 통역을 계기로 북한의 현실을 보게 된 린튼가 사람들은 1995년 스테판 린튼 회장이 주축이 돼 북한주민을 돕기 위한 인도주의 단체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 을 세웠다. CFK는 현재 의료와 식량, 농기계, 비상구호품, 우물 찾는 기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북 인도지원 활동을 펴고 있다.

    창립자인 휴 린튼 선교사의 차남 스테판 린튼 박사는 이후 한국 내 활동을 넓히기 위해 ''''유진벨 재단'''' 을 세워 독립했고 CFK는 현재 블랙마운틴에 거주하는 삼남과 사남인 제임스(54)와 앤디 린튼, 그리고 앤디의 아내인 하이디 린튼 씨가 맡아 운영하고 있다.

    블랙마운틴 노인들의 조선 사랑을 이제 후손들이 이어받아 계속 돕고 있는 것이다. 가난했지만 늘 인정이 넘쳤던 조선의 친구들. 블랙마운틴의 노인들은 그런 조선을 외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평양외국인학교 출신으로 남한에서 의료선교를 했던 91살의 케네스 스콧 박사. 그에게 평양은 예수를 만난 곳이자 자신의 믿음을 뜨겁게 해준 신앙의 고향이다.

    조선 사람들과 선교사 자녀로 조선에서 자란 자신들은 한 가족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마리엘라 할머니!

    90대의 윌슨 남매가 애절하게 부르는 조선의 전통 구전가 ''''나비야'''' 가 블랙마운틴의 사랑을 싣고 지금도 조선으로 날아가고 있다.

    ◈ 블랙 마운틴에 거주하는 린튼가 사람들

    한반도에서 4대째 인도주의 선교 활동을 하는 미국인 가정이 있다.

    바로 ''유진벨 재단''과 ''조선의 기독교 친구들'' 이란 대북 인도주의 단체를 설립한 린튼 집안으로 50대에 접어든 이 린튼 집안의 막내 4형제가 직.간접적으로 대북한 인도주의 지원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북한의 허리를 잇고 있는 낭림산맥처럼 미국 동부의 남북을 잇는 험준한 애팔래치안 산맥에 위치한 블랙 마운틴시. 산수가 좋기로 유명한 이 산촌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에 린튼 형제들의 모친인 베티 로이스 린튼 (81) 씨가 살고 있다.

    두 노인이 살기에는 매우 큰 집. 그러나 이유가 있다. 블랙 마운틴을 찾는 남북한 사람들이 자주 이 집에서 단체로 묵고 가기 때문이다. 린튼가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관리들도 가끔 이 곳을 방문해 휴식을 취하곤 한다.

    지난 해 5월에는 우물개발 기술 교류차 북한에서 3명의 기술자가 이 곳을 다녀가기도 했다.

    산기슭 아래 살며 어머니를 돌보고 북한과 남한 손님들을 안내하는 삼남 제임스 린튼 (54)씨.

    블랙 마운틴시에서 자동차 수리업과 건축업, 지하수 개발 등 다재다능한 사업을 하고 있는 제임스 씨는 북한을 이미 열 차례 넘게 방문해 우물 기술을 교류하며 인도적 지원을 했다.

    북한 사람들이 이 미국 첩첩산골에 위치한 린튼가를 종종 찾으며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는 서로 간에 깊은 신뢰가 쌓여있기 때문이다.

    한국 전라남도에서 결핵퇴치 사업을 활발히 펼쳤던 휴 린튼 선교사 부부 아래 태어난 6남매. 이들 가운데 둘째 스태판 린튼과 셋째 제임스, 넷째 앤디, 그리고 현재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이자 막내 존 린튼 씨 등 4형제가 모두 북한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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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린튼가 형제들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5년부터 ''조선의 기독교친구들''(CFK) 과 ''유진벨 재단''을 세우고 북한에 결핵약과 의료장비, 식량, 우물 기술 지원, 농기계와 구호품 등을 꾸준히 보내며 북한주민들을 돕고 있다.

    남북이 하나된 조선을 사랑하는 린튼가의 역사는 18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돼 광주기독교병원 (제중병원) 과 여러 학교를 설립한 유진 벨 선교사를 시작으로 그의 막내딸 샬롯 벨과 결혼한 윌리엄 린튼이 그 뒤를 이었고, 이들 부부 사이에 태어난 셋째아들 휴 린튼과 다섯째 드와이트 린튼이 다시 남한에서 뿌리를 내리며 결핵퇴치 등 의료와 학원 사역에 열정을 쏟았다. 이제 휴 린튼의 자녀 6남매 가운데 4형제가 방향을 북한으로 돌려 인도주의 지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77살의 드와이트 목사는 린튼 집안 4세대의 장점이자 공통점은 모두 남장로교의 선교 전통에 따라 내정간섭 등 정치적 입장과 문화 충돌을 배제하고 의료와 학원, 전도에 집중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드와이트 목사의 부친인 윌리엄 린튼 선교사가 일본 정부의 신사참배에 강력히 반발해 조선에서 추방당하기도 했지만 내정불간섭 전통은 린튼가 막내 형제들이 북한 깊숙한 지역까지 들어가며 인도적 지원의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린튼가 이웃들은 이 집안의 장점으로 능숙한 한국어와 겸손, 신뢰, 일관성 등을 지적한다. 그러나 가족의 전통을 잘 살펴보면 부모의 독특한 교육이 린튼가의 지속적인 조선 사랑에 크게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1978년 남한을 떠난 드와이트 목사는 부친인 윌리엄 린튼 선교사는 자신들이 선교사의 자녀가 아니라 부모와 함께 하는 선교사임을 늘 강조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고, 그 결과 그는 능숙한 한국어 실력 때문에 1992년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레엄 목사의 북한 방문 때 통역을 맡기도 했다.

    드와이트의 형인 휴 린튼 부부도 이런 전통에 힘입어 자녀들을 모두 한국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휴 린튼의 부인인 로이스 린튼 여사는 당시 거주하던 전라도 순천에는 외국인 학교가 없어서 자녀들을 한국 초등학교에 보냈다고 겸손해 한다. 6남매는 이후 대전의 외국인학교에서 중등학교를 마쳤지만 당시 선교사들 가운데 가난한 한국 초등학교에 자녀들을 보낸 부모들은 많지 않았다.

    덕분에 휴 린튼의 자녀 6남매는 모두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파란눈을 가진 한국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어 이유만으로 4형제 가정이 북한을 돕고 있는 것은 결토 아니다.

    턱수염을 기르고 몸집이 큰 삼남 제임스 씨!

    그는 자신을 성경에 나오는 요나에 비유한다. 하나님이 가라는 도시로 가지 않고 다른 도시로 가다가 고래 배 속에 들어간 뒤에야 깨달음을 얻었던 요나처럼 그 역시 미국으로 온 뒤 한동안 조선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성질이 참 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늘 인내를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고집이 많아요. 내 뜻으로 돌려야 하는 거예요. 이게 힘들어요. 하나님 시키는 일 하면…우리 뜻대로..하나님 뜻대로 해야 하니까..내 고집을 끊어야 한다. 내 마음 속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린튼가 형제들은 모두 조선을 돕는 일을 헌신과 희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과 특권이라고 말한다.

    6남매의 모친인 로이스 린튼 여사는 1954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에 결핵진료소와 요양소를 세우며 결핵 퇴치에 앞장섰다. 당시 풍토의 영향으로 자녀 6남매 중 3형제가 결핵에 걸리기도 했었다.

    로이스 여사는 당시 조기 투약으로 결핵이 완치됐지만 차남은 결핵 2기까지 발전했었다고 말했다. 그 차남은 북한에서 십 수년째 결핵퇴치 사업을 가장 활발하게 벌이는 유진벨 재단의 회장 스테판 린튼 박사다.

    상처가 아픔으로 남지 않고 다른 상처를 감싸며 더 큰 사랑으로 발전한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린튼 형제들이 세계 최악의 명성을 얻고 있는 북한 정부의 인권탄압과 탈북자들을 무시한 채 북한 정부에 협력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린튼가는 각자가 받은 소명이 다를 뿐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인의 목적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각자 맡겨진 분야에서 부르심에 순종하며 충성을 다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이란 것이다. 정치적 의도없이 4대째 묵묵히 사랑을 펼치는 린튼가의 이런 조선 사랑에 북한 정부도 감동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조선 사람보다 조선을 더 사랑하는 파란눈의 린튼 가족들!

    그들의 사랑을 통해 북한에 희망이 싹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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