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게 영어였어?" 언어 좀 잘 한다는 친구들도 내가 원래 영어에서 둔갑해 우리말로 침투한 간첩들의 정체를 밝히면 깜짝 놀란다.
먼저 회계에서 필수라는 ''부기(簿記)''라는 말을 보자. 이 단어는 원래 영어의 장부 정리라는 뜻의 ''bookkeeping''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메이지시대 밀려오는 영어 단어를 어떻게든 한자로 정착시키려는 일본인들의 노력의 결실이다.
분수령(分水嶺)이란 말은 영어의 ''watershed''를 그 뜻으로 번역한 것이다. 전환점(轉換點)은 영어단어 ''turning point''를 옮긴 것에 불과하다.
일본인들은 이에 멈추지 않고 한자의 모양과 영어에서 쓰는 기호 가운데 비슷한 것을 골라 미국 달러화의 모습을 ''弗''이라고 옮겼다. 미국 달러화의 상징 표기를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금새 눈치챌 수 있다.
그럼 단어 하나 하나만 영어에서 온 것일까? 기독교의 전파를 계기로 엄청난 양의 서양 고전이 우리나라에도 유입됐고 성서를 비롯한 여러 고전에서 비롯된 격언이나 속담도 우리말로 둔갑한다.
''돼지발에 진주''라는 말을 보자. 영어에서는 ''to cast the pearl before swine''으로 번역된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제법 유명한 말을 보자. 영어로는 ''the tip of the iceberg''가 된다.[BestNocut_R]
그 뿐이 아니다. 원래 우리말이었을 테지만 영어에도 놀랍도록 같은 표현이 있다. 누워서 떡먹기인데 영어로는 ''a piece of cake''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같은 표현으로 ''camel''s nose(낙타 코)''라는 말도 쓰기는 한다는데 아직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런 현상을 보고 "일본인들이 급조한 말을 비판없이 받아들이니 한자를 없애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한마디 한다.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100여년을 우리가 매일 써온 표현을 없애냐고 말이다.
거의 진시황의 분서갱유나 흥선대원군의 척화비 같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고 본다. 요즘 세상이 나라가 시킨다고 대통령이 나서서 하지 말자고 사람들이 따르는 시대인가 말이다.
쓰다 불편하면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영어로는 "Let it be"이다. 비틀즈의 노래 제목이 아니라 우리말로는 "그냥 이대로 살게 내버려 둬요"다. 제발 우리좀 조용하게 삽시다.
※필자는 영어, 독일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등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한국 토박이로, ''교과서를 덮으면 외국어가 춤춘다''의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