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지원
배우 도지원(39)이 사각의 링 위에 올랐다. 얼굴보다 큰 글러브를 낀 손으로 ''러시안훅''을 날리거나 다리를 뻗어 ''하이킥''을 차는 모습은 지금까지 봐온 도지원이 아니다. 그래서 영화 ''펀치레이디(강효진 감독)''는 낯설다.
"그동안 도지원이 갖고 있던 도시적인 느낌, 도도함이나 차가운 이미지 같은 현대적인 분위기를 버리고 싶었어요. 연기자로서 정말 바랐던 거죠."
[BestNocut_R]''펀치레이디''는 십여 년간 가정폭력에 시달린 주부 하은(도지원)이 이종격투기 챔피언 남편(박상욱)에게 링 위에서의 대결을 선언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대결까지 주어진 3개월 동안 이종격투기를 익혀야 하는데, 지도를 맡은 학원 수학강사 수현(손현주)도 이종격투기가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영화가 ''가정폭력''을 앞세워 홍보하는 것과 달리 도지원은 하은의 삶에 눈을 맞췄다.
"하은은 희망이 없는 삶이에요. 엄마는 암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마음속으로 의지했던 아버지는 사실 가정폭력을 가했던 사람이죠. 하나뿐인 딸은 하은을 ''아줌마''라고 불러요. 인생의 낙이 없죠. 그럼에도 답답한 현실에서 다른 생활을 찾으면서 웃음을 잃지 않는, 세상 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함도 있어요."
도지원은 하은에게 마음이 가는 이유가 "각박한 생활에서도 웃음을 띠기 때문"이라고 했다.
"연기 초기에는 나의 천성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배역에 욕심을 냈지만 남편에게 매질을 당하며 얼굴에 피칠을 하거나 주눅이 든 연기로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여배우로서 택하기 어려운 결정이다. 도지원에게 슬쩍 ''너무 과한 것 아니냐''고 물으니 비로소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연기하며 어떤 길로 접어들어야겠다고 결심한 뒤부터는 진짜처럼 현실적으로 보여야 한다고 믿죠. 영화에서 고정된 예쁜 여자일 필요 없어요. 정형화된 여자보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여성 캐릭터가 필요해요. 만약 하은이 화장도 하고 단아한 모습이었다면 공감을 살 수 있었을까요?"
이종격투기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 느슨하게 펼쳐지다가 결전의 순간 현란한 기법을 선보이는 하은의 모습은 놀랍다. 상대역 박상욱을 진짜 때리고 진짜 맞으면서 이어진 촬영이었다.
표현이 자극적인 구타 신에는 아예 ''피칠을 더 하자''고까지 요구했다고 한다. 예뻐 보이고 싶은 여배우의 본능을 버리고 리얼리티에 마음을 내놓은 ''결심의 계기''가 궁금했다.
"신인일 때는 연기도 못 하고 틀 안에서 저를 감추고 싶어했어요. 도지원이 도지원을 연기한다는 느낌이었죠. 늘 단정한 이미지로, 저의 천성을 알아주길 바랐어요. 캐릭터화 되면서 인물의 느낌을 받기 시작하면서 앞으로 가야 할 연기의 길이 뭘까 고민이 들었죠."
얘기 도중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극 ''여인천하''를 예로 들었다.
"''여인천하'' 찍을 때인데 어느 날 김재형 감독님이 ''사극 하면 진짜 연기하는 느낌이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현대극과 달리 표현할 게 많은 사극을 찍으며 비로소 연기의 자신감을 얻었죠. 사극은 오직 연기뿐이잖아요."
도지원
"뒤늦게 눈뜬 영화, 연기하기는 지금이 최적기"이렇게 연기에 품은 욕심을 넓힌 작품이 ''펀치레이디''다. 남편과 그것도 챔피언인 남자와 이종격투기를 벌이고 결국엔 이긴다는 설정이 무리가 따르지만 그만큼 도지원에게는 다른 모습을 선보일 작품인 까닭이다.
2004년 ''발레교습소''를 시작으로 ''사랑 따윈 필요 없어''와 ''신데렐라''를 거치면서 영화의 맛을 본 도지원은 앞선 작품과의 다른 매력으로 ''펀치레이디''를 택했다고 했다.
"저는 뒤늦게 영화에 눈을 떴어요. 어린 나이였다면 다양한 캐릭터를 맡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움은 있지만 연기하는 데는 지금이 최적기인 것 같아요."
다만 나이 탓에 연기할 배역이 한정되는 건 아쉬움으로 남는 모양이다.
"30대가 돼야 진짜 배우가 되는 것 같아요. 이종격투기요? 처음엔 무서웠죠. 시나리오를 읽어보니까 사람이 이해되는 거예요. 이종격투기가 필요하다면 배우면 되는 거죠."
도지원은 "느긋하게 영화 한 편 보면서 같이 슬퍼하고 같이 웃으면 돼요"라며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아닌 인간답게 사는 법을 얘기하는 영화"라고 ''펀치레이디''를 설명했다.
물론 영화를 통해 다른 색깔의 배우로 한 걸음 나가고 싶은 희망도 숨기지 않았다.
"그동안 제가 갖고 있던 도시적인 이미지 대신 새로운 맛을 봐 줬으면 좋겠어요. 배우로 가려는 길이 분명하고 못 할 게 없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