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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 "사랑 나누기도 바쁜데 어떻게 기타를 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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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대수 "사랑 나누기도 바쁜데 어떻게 기타를 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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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영원한 자유인, 가수 한대수

    한대수

     

    ''''행복의 나라로'''' ''''물 좀 주소''''의 가수 한대수는 가슴 아픈 성장기를 거친 한국 소년이었고, 빳따를 치는 한국 군대에 다녀온 유일한 뉴요커입니다.

    체제 정복 음악을 만들어 부른다고 낙인찍힌 사상범이기도 하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신문사의 기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헤어진 옛 아내의 애인이 곤경에 처하자 그 남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함께 살기도 했고, 신경쇠약에 걸린 옛 아내를 새로운 아내와 함께 사는 집으로 데려가 보살피기도 한 어처구니 없는 사람입니다.

    데뷔 앨범부터 항상 당대 가장 도전적인 음반들을 발표한 진정한 뮤지션의 표본이자 살아있는 신화인 가수 한대수!

    암울했던 시대에 자유를 노래하던 영원한 자유인, 한대수 씨를 어제에 이어서 8월 14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서로에게 과거가 되어버린 아버지와 가족, 그리고 16살의 나

    [BestNocut_R]▶ 어제,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놀랍기도 하고, 너무 드라마틱하기도 해서 도저히 하루로는 끝날 것 같지 않아서 오늘 다시 모셨습니다. 이틀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핵물리학을 공부하러 가셨다가 실종된 아버님을 만나신 이야기를 어제는 못 들었거든요.

    제가 16살에 부산에서 경남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미국 FBI에서 아버지를 찾았다는 연락이 온 거예요.고모님이 미국에 사셨기 때문에 확인을 해달라고 했더니 우리가 할아버지와 함께 처음 살았던 뉴욕 맨해튼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인 롱아일랜드에 아버님이 살고 계셨더라고요.고모님이 가서 ''''오빠'''' 하면서 부르니까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시다가 고모님이 우시니까 그때서야 희미하게 기억을 하시더래요. 확인하고 연락을 하다가 온 가족이 다시 미국으로 갔고 그때부터 아버님과 함께 살았어요.

    ▶ 아버님은 왜 실종이 되신 건가요?

    그것은 아직도 알 수가 없어요. 자의는 아닌 것 같고 제3자나 파워플레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50년대는 ''''뷰티풀 마인드''''라는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브레인워싱(brain-washing), 세뇌 작업을 정부에서 많이 했거든요.그런데 본인이 직접 말을 안 하니까 증거물을 댈 수도 없고 우리가 정확하게 결론을 못 내리는 거예요.

    ▶ 기억상실증은 아니시죠?

    기억상실 된 부분도 많아요. 그래서 제 앨범 중에도 ''''기억상실''''이란 곡이 있습니다. (웃음)

    ▶ 가족은 다 알아보시던가요?

    가족은 어느 정도 알아보시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명확하게 알아보셨고 언어는 완전히 잃어버리셨어요.

    ▶ 몇 살에 가셨는데요?

    21살에 가셨는데 한국말을 전혀 못하세요. 그리고 말 뿐만이 아니라 태도 자체가 완전히 미국사람이고 행동, 사고.... 모든 것이 정말 미스터리예요.

    ▶ 몰라서 안 하시는 건지 알면서 안 하시는 건지 그것도 모르시는 건가요?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무조건 하시는 말씀이 ''''Passed is the past'', 과거는 과거라고 묻지 말라고 강력하게... 할머님이 제발 말해달라고, 너 때문에 온 가족이 고생했다고 수차례 물어도 ''''Passed is the past''... (웃음)

    ◇ 기저귀를 갈아주지 않는 부모는 부모가 아니다

    ▶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한대수 씨 아버님이 예정대로 핵물리학을 공부하시고 한국에 오셨다면 우리나라가 미국을 제외한 최초의 핵보유국이 될 수도 있었겠구나...

    48년, 50년 초반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죠. 미국 다음으로 보유국이 되는 건데 아마 CIA나 여러 정부기관에서 한국의 학위를 딴 물리학자가 자기 나라로 간다고 하니까 ''''너 어디로 가니? 다시 돌아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까... 상상은 하는데 증명할 길은 없는 거죠. 본인이 말씀도 안 하시고 지금 연세가 81세 신데 아직도 롱아일랜드에 살고 계세요.

    ▶ 처음 만났을 때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셨어요?

    전혀 물리학과 상관이 없는 인쇄업을 대규모로 하고 있었어요.

    ▶ 돈을 어디서 버셨대요?

    그것도 의문이에요. 인쇄윤전기 한 대에 백만 달러 넘게 하거든요. 그런 것을 여러 대 가지고 크게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 학생으로서 이해가 안 갔어요.

    ▶ 결혼도 하셨겠네요?

    아이가 아홉 명이나 있는 이탈리아계 미국 여자와 결혼했는데.... (웃음)

    ▶ 정말 미스터리고 소설 같네요. 그분들 사이에 아이는 없으셨나요?

    유일한 혈육은 저 하나입니다. 제가 음악을 하게 됐고 또, 계속하고 있는 제일 개인적인 이유 중의 하나가 아버지와의 관계예요. 실종 때문에 굉장한 기대감을 가지고 이제는 다른 아버지들처럼 같이 낚시도 하고 야구도 하겠구나 하면서 꿈을 가지고 미국으로 갔는데 실망이 컸어요.새어머니가 계실 줄도 몰랐고, 아버지가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할 줄도 몰랐고... 그렇게 큰 사업을 해서 매일 밤 11시, 12시에나 들어오시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얼굴을 볼까 말까이고.... 제 방이 2층에 있었는데 기타를 배워서 계속 작곡을 하는 거죠.

    ▶ 부자지간에 대화 같은 것은 좀 되셨나요?

    전혀 안 되지요. 왜냐하면 아무리 가깝더라도 벌써 16살에 만나면 벽이 생기는데, 저는 지금 양호의 기저귀를 갈아주거든요. 기저귀를 갈아주지 않는 부모는 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때부터 살갗이 맞닿고 말이 안 통하는 언어, 그런 소통이 있는 건데 다 커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참 힘들죠.

    ◇ 음악만이 유일한 피난처이자 자기정체성을 줘

    ▶ 16살 사춘기, 굉장히 예민한 시기에 유일한 친구는 음악이었겠어요.

    음악이 고통의 표출구고, 방패였고, 하나의 정체성을 주었어요. 그 당시 제가 다니던 롱아일랜드 고등학교는 부촌이어서 전부 백인이었어요. 흑인은 물론 히스패닉도 없었고 저만이 유일한 황인종이었죠.

    ▶ 차별은 없었나요? 워낙 저 하나다 보니 차별이 아닌 오히려 마스코트가 되었고 집중의 대상이 되었죠. 여학생들과의 데이트도 재미있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기가 있었어요. (웃음)

    ▶ 아버님 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수의학과를 가신 건가요?

    아버님 집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수의학과를 갔어요.

    ▶ 수의학을 그만두시고 사진을 하실 때 반대가 심하셨죠?

    사진을 하게 된 동기가 저는 굉장히 미적인 것이 좋더라고요. 그 당시 사진이 하나의 상업미술로 전진할 때여서 패션잡지의 사진작가가 스타로 뜰 때에요.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았고 피를 보고 수술하는 것보다는 났겠다 싶어서 반대를 무릅쓰고 혼자서 독립을 하겠다고 나온 거죠.그때 열풍이었던 것이 64년 비틀즈가 뉴욕에 상륙하면서 ''''비틀마니아''''부터 시작해서 록 등... 전 뉴욕이 열광했을 때이고 마틴 루터킹의 인권운동, 베트남 반전운동, 페미니즘, 피임약의 등장으로 성의 해방...

    ▶ 사회가 완전히 소용돌이칠 때이군요?

    64년부터 74년 사이가 반체제운동, 명칭으로써는 ''''히피''''라고도 하고 모든 가치관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면서 발달하고 대중문화, 록 음악부터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 프란시스 코폴라, 아키라 구로사와, 문학도 발전하고 패션도 입생 로랑이 최고의 패션디자이너로 등장을 하고... 그래서 모든 것이 말하자면 열풍이었어요.그런데 그 열풍의 메카가 됐던 곳이 런던, 뉴욕, 샌프란시스코였죠.

    ▶ 그 가운데 계셨으니.... (웃음)

    제가 꼬마 때 왔다 갔다 하면서 왼쪽 오른쪽 얻어맞는 거지요. (웃음) ''''와~ 이게 뭐야?'''' 하면서....뿐만 아니라 마약이 미국에 처음 들어와서 과거 50년대 상류사회에서는 자기들끼리 많이 했지만 중류사회에서 젊은이들이 습관처럼 경험을 하는 것은 60년대 처음이었어요.

    그 당시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라는 약을 먹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러 가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어요.영화 중간에 빛이 한 20분 동안 내려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경험을 하는 거예요. 그러한 열풍 속에서 10대 후반을 보냈으니 저는 정신이 없는 거고, 많은 것을 흡수하고, 젊은이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혼자 살면서 학교에 다니고 그랬어요.
    한대수2

     

    ◇ 반전, 인권, 히피... 사회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다

    ▶ 돈은 어디서 났나요?

    아침 9시에서 5시까지는 학교에 다니고 6시부터 새벽 1시까지는 음식점에서 요리사 조수로 일했어요. 처음에는 조수로 일하다 나중에는 요리사로 일했죠.

    ▶ 요리사였으면 요리를 잘하시겠네요?

    좋아하고 집에서도 제가 다 합니다. 아파트가 말하자면 빈민촌이라 한 달에 방값이 50달러 한화 5만 원이었어요. (웃음) 지금은 방 한 칸에 2천 달러 하더라고요. 저는 그것도 줄이려고 클리브렌드에서 온 친구와 같이 살면서 반반씩 부담했어요.열심히 공부하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너무 아름다운 모델을 찍고 암실에 가서 작업하고 또, 그 다음 날 더 아름다운 모델을 찍고 또, 현상하고 (웃음) 빛이 어떻고, 색감이 어떻고... 완전히 매료되었죠.

    ▶ 카메라가 비싸지 않나요?

    처음에는 중고를 사서 하다가 차츰 좋은 것으로 바꿔갔지요. 사실상 사진을 잘 찍는 사람들은 카메라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미안하지만 아마추어들이 가장 비싼 카메라를 가지고 있어요. (웃음)음악가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백만 원 이상 가는 기타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천만 원 이상이 되어야 기타인 줄 알더라고요. (웃음)

    ▶ 전공은 사진을 하시면서 취미로 음악을 하신 거군요?

    음악은 항상 생활이었어요.

    ▶ 그러다 한국은 어떻게 나오셨어요?

    사진 전공하고 취직생활해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사실상 굉장히 혼돈스러웠어요.그러한 유토피안 꿈이 오래갈 수가 없었어요. 너무 무질서하고 마약 때문에 많이들 죽고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 제니 제플린이니 락스타들이 20대 때 스물다섯, 여섯, 일곱에 다 죽었어요. 락스타가 그 정도 죽으면 대중들, 젊은 대학생들은 얼마나 많이 죽었겠어요? 마약 때문에 길거리에서 다 늘어져 있는 거예요.

    그것에 대해서 교육도 없고... 지금이야 교육이 있지만 또, 베트남 전쟁의 많은 희생자와 결론적으로는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이 상당히 혼돈스러웠어요. 저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외삼촌이 찾아와서 저 사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당장 돌아가자고 하시면서 어머님께 말씀드리고 어머님은 항공엽서에 ''''대수야 사랑한다. 빨리 와라...''''

    ▶ 7살 때 헤어지고 처음 연락이 닿은 거네요?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맘대로 하지만 그전에는 애가 혼돈스러워한다고 내버려두자고 어른들끼리 모종의 협의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 쥐가 기어 다니는 50달러짜리 아파트도 예술과 함께라면

    ▶ 그때는 그랬을 거예요. 안 만나서 혼돈스러운 것은 생각 안 하고...

    어머님의 눈물 젖은 편지와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정책이라든지 또, 동료 사진작가도 ''''미국이게 뭐냐?''''며 더 이상 안 되겠다고 호주로 가버리더라고요.

    ▶ 미국사람인데요?

    네. 캐나다로도 이민 많이 갔어요. 미국 정책이 너무 싫다고요. 한국에 안 간지도 오래됐고, 어머님이 이렇게 원하시니까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죠.

    ▶ 외삼촌이 봤을 때 완전 거지였을 것 같아요. (웃음)

    완전 거지였죠. 5만 원짜리 아파트를 생각해보세요. (웃음) 저녁엔 쥐가 기어 다녔어요.

    ▶ 아버지는 잘 사시는데....

    2년 동안 살고 연락이 끊겼어요. 저도 연락하기 싫었고요.

    ▶ 어머님을 다시 만나셨나요?

    68년에 한국에 와서 명륜동 어머님 집에 본채 이외에 작은집이 하나 있어서 저 혼자 그곳에서 살았어요.

    ▶ 어머님은 잘 사셨어요?

    어머님은 큰 비즈니스를 하고 있었고 동생이 4명이었어요.시간적 여유도 있고 해서 기타치고 사진 찍으러 다니는데 미국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커피도 마시고 기타도 치고 동전도 돌리는 그런 곳을 찾다 보니 다방이 있더라고요.다방에 가니까 비틀즈니 롤링스톤즈가 들어와 있고 예쁜 여학생들도 많고... (웃음) 19살이라 음악 좀 한다고 했더니 무교동의 ''''세시봉''''을 소개해주더라고요.

    ▶ 그곳에서 다 만나셨군요?

    거기서 이백천 씨, 트윈폴리오의 송창식, 윤형주 씨, 조영남 씨 이런 분들을 다 만났죠.

    ▶ 그분들도 그때는 다 거지였었어요. (웃음)

    대학생들의 호응이 좋았어요. 음악을 하는데 반응이 있고 가치관이 있고..... 음악을 하는 사람 개인의 사유가 다른 사람과 연결이 되고 한 사람이라도 감명을 줄 수 있을 때 그 이상 기쁨이 없거든요. 그래서 저도 상당히 흥분이 되고 음악가로서의 길도 생각을 하게 됐죠. 또, 자연적으로 양희은 씨의 ''''행복의 나라'''', 김민기 씨의 ''''바람과 나'''' 등 저의 음악이 히트되고, 군대에 있는 사이에 그냥 대학생들 사이에서 히트가 돼 버린 거예요.

    ◇ 혹독한 군 생활 3년, 나를 살려준 것은 솔제니친

    ▶ 군대를 싫어하셨는데 가셨네요?

    안 갈 수가 없죠. 그때는.... (웃음) 미국에서도 사실 당시 징집제였어요.

    ▶ 잘 적응하셨어요?

    하나도 적응 못 했어요. 매일 같이 동네북이었어요. (웃음) 군기가 너무 세서 죽는 줄 알았죠. 저는 해군 세일러복이 좋아서 해군에 갔는데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구축함에 배치됐는데 운도 안 좋게 ''''충무함''''에 배치되어 ''''오늘 밤, 제발 안 맞고 잤으면 좋겠다!'''' 할 정도였어요. 그래도 참아냈죠.그때 결혼을 약속한 사랑하는 사람이 솔제니친의 단편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암 병동''''을 보내줬어요. 솔제니친이 노벨문학상을 받고 미국에 망명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책을 읽어 보니 제가 해군 충무함에서 당하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솔직히 솔제니친이 저를 살렸습니다. (웃음) 3년 동안...

    ▶ 여자 친구의 공이 크네요. (웃음)

    나중에 결혼해서 첫 번째 부인이 되었죠. 군 제대하고 코리아헤럴드에 기자로 취직하면서 바로 결혼했거든요.

    ▶ 결혼과 취직... 그 시절은 굉장히 안정적이었겠어요?

    그럼요. 가요제에서 작곡상도 타고...

    ▶ 기자생활을 하시면서 가수활동도 하셨어요? 신문사에서 그런 것을 인장해 줬나요?

    틈틈이 했는데 신문사에서 별로 안 좋아하지만 녹음은 가끔 했죠. 제대하고 앨범을 만들 기회가 생겨서 첫 앨범을 만들고 반응이 좋아서 두 번째 앨범을 만들다가 신문사에 취직을 했거든요. 신문사는 오후 2시까지 자기가 맡은 인터뷰내용을 기사로 올리면 나머지 시간은 여유가 좀 있어서 좋았어요.

    ▶ 신문사에서 몇 년간 일하셨어요?

    신문사에서 3년간 일하다가 또, 앨범이 금지되면서 희망을 잃고... 음악의 열정은 많아서 작곡은 자꾸 나오는데 자꾸 금지는 되고 아름다운 마누라와 양호하게 생활하면서 에너지는 받고 있는데 딱 중단하니까 화산이 확 타고 있는데, 중지된 듯이..... 그래서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죠. 비틀즈 이후에 데이빗 보이가 굉장한 영향을 받고 있고 뭔가 색다른 장르가 필요할 때다, 그 당시 음악의 열정이 대단하고 음악을 들어보니까 국제적이다, 다시 돌아가서 하는 것이 났겠다 싶었어요. 20대가 음악적 창작력이 가장 좋을 때거든요. 물론 월급 받고 사는데 큰 문제는 없는데 20대 때 그렇게만 살 수는 없잖아요. (웃음)

    ▶ 한대수 씨의 열정과 자유로운 영혼이 어느 한군데 묶여있는 것은 잘 못하실 것 같아요.

    스물여섯, 일곱 밖에 안됐는데 음반을 만드는 것은 다 금지되고... 그래서 다시 집사람과 뉴욕으로 간 거죠.

    ◇ 첫 번째 결혼과 앨범, 다시 돌아간 뉴욕에서의 아침

    ▶ 그런데 왜 헤어지셨어요?

    헤어진 것은 20년 후에요. 한국에서 7년 살고 뉴욕에서 13년 살았는데 저는 음악을 하면서 사진 일을 계속했고 첫 번째 와이프는 홍대 미대 서양화과를 나와서 그 당시 하이패션이 한창 무르익을 때라 뉴욕은 세계인 패션의 수도였어요.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처음 등장할 때고 베르사체는 나중에 등장하고 DKNY는 훨씬 후에 등장하고.... 미술공부를 했기 때문에 비주얼 상품화라고 해서 윈도우 디스플레이서부터 디자인을 하면서 굉장히 성공적으로 일을 했어요.

    ▶ 아이는 없었어요?

    64년에 피임약이 개발되면서 유행처럼 아이를 낳지 않는 것과 프리섹스의 풍조가 횡행했어요. 처음부터 아이는 갖지 않기로 해서 아이는 없었어요.

    ▶ 왜 헤어지셨나요?

    여러 가지 제가 실수도 많이 했고, 오랫동안 살다 보니까 여러 가지 다른 여성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기도 했고, 결론적으로 그쪽에서도 다른 방향의 결정을 내린 거죠. (웃음)

    ▶ 다른 사람을 만났군요?

    나이 40에 헤어진다는 것은 굉장히 치명적인 거예요. 왜냐하면 가장 자기 파트너가 필요할 때인데.... 뉴욕은 워낙 바삐 돌아가니까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뉴욕타임즈나 젊은이들 신문을 보면 남녀가 각각 파트너를 구하는 광고가 10면도 넘어요. (웃음) 서로 만나기가 너무 힘드니까요. 그리고 중매 에이전시도 있어요.그렇게 혼자 4년 살다가 옥사나를 만났어요. 희한한 것은 누가 항상 옆에 있다가 없으면서 뼈에 사무치게 외롭다 보니 작곡이 다시 시작되는 거예요.

    ▶ 그때 만든 노래가 무엇이 있나요?

    ''''무한대''''라는 노래가 있어요. 14년 만에 세 번째 앨범이 나오는데 신세계 사장님과 연락이 됐는데, 90년대 와서 금지가 풀려지기는 했지만 제 노래가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조용하게 유행했던 모양이에요.서울에 와서 음반작업을 했는데 처음 두 앨범 만들 때와는 달리 훌륭한 음악가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밴드멤버들도 좋고, 엔지니어링도 좋고, 스튜디오도 훌륭하고.... 제일 마음에 드는 젊은 뮤지션들 모아서 훌륭한 앨범을 만들었고 그 앨범은 저 혼자의 어떤 고독의 결실입니다. 지금은 다 대가가 된 기타 손무현, 베이스 김영진, 드럼 김민기... 훌륭한 코러스, 엔지니어들과 앨범을 만들었어요.

    그렇지만 뉴욕으로 돌아가니까 고독은 계속되는 거예요.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것을 너무 두려워했어요. 문을 열면 캄캄한 아파트가 너무 무서웠어요. 20년 동안 항상 누가 나를 반겨줬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굿모닝!''''하면서 같이 커피를 마셨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아무런 파트너가 없고... 그렇다고 애완견을 살 마음은 없더라고요. 누구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는데 옥사나를 만나게 됐어요.

    ▶ 옥사나 씨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아파트를 구하다가 우연히 만났어요. 브룩클린에 아파트를 구하다가 조용하고 좋은 데가 있다고 해서 가봤는데 내놓은 사람은 옥사나고 구경 간 사람은 저였죠.딱 보니 체구도 크고, 통도 크고, 미모의 여인일 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 넓더라고요. 쿨함에 매료되어 제가 데이트를 신청했지요. 모스크바에서 뉴욕으로 바로 이민 온 21살의 몽골과 유럽의 피가 섞인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40살이 넘은 홀아비 아저씨가 완전히 매료되었죠. 그날 바로 보드카를 사서 함께 마시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너무 좋았어요.

    ◇ 뼈에 사무치는 고독은 또다시 작곡을 하게 만들고

    ▶ 전 부인의 남편과 셋이서 함께 살았다는 얘기는 뭔가요?

    결혼해서 옥사나와 함께 살고 있는데 전 부인에게 문제가 좀 있었어요. 패션계는 또, 색달라요. 음악계도 색다르지만요. 뉴욕에서는 디자이너도 그렇고 패션계의 중역들도 거의가 게이라 상당히 색다른 세계예요. 특히 하이패션은요.전 부인은 거기에 종사를 하고 연하의 독일계 모델과 결혼했는데 위기에 빠진 적이 있어서 저를 찾아왔기에...

    물론 인간의 근본이 시기와 질투인데 그 이전에 우리 인간으로서 20년 동안 나를 살게 해 준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새로운 남자와 더 잘되기를 바랐어요. 더 잘돼야 잊을 수가 있으니까요. 잘 안되면 마음에 상처가 돼요. 그래서 더 잘돼야 그 사람을 잊을 수 있고 자기도 행복하고 그런 것이 해방감을 준단 말입니다.

    더 오래 살다가 헤어지는 사람들도 많은데 헤어진 전처나 전남편이 더 잘돼야 간단하게 잊을 수가 있어요. 그리고 자기 일을 추구할 수가 있는데 그렇지 않고 더 좋지 않은 환경에서 계속 불평만 하고 눈물만 흘리고 또, 한 번씩 전화를 해서 가슴을 괴롭혀 가면 그것은 말도 못할 죄책감과 괴로움이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러한 의미에서 최대한 한 적은 있죠.

    ▶ 두 분이 잘 안됐군요.

    그다지 상상대로 스토리가 이어지지는 않았죠.

    ▶ 전부인과 옥사나와 함께 셋이 잠시 산 적이 있다고도 들었는데 옥사나가 이해를 해주던가요?

    잠시 그런 적은 있었어요. 옥사나가 도와줘야 한다고 먼저 제의를 했어요. 사랑이라는 것이 일생에 한두 번 있는 것인데 곤경에 빠졌을 경우에는 도와야 한다는 거예요.

    ▶ 통이 크신가 봐요?

    러시아라는 대국, 몽골이라는 대국, 아마 거기서 나오는 것 같아요. 저도 상상을 못했고 놀랐어요. 그래서 잠시 그런 적이 있었지요.

    ▶ 전부인은 지금 잘살고 있나요?

    그 이후로는 헤어진 상태인데 더 이상 찾고 연락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서로 연락을 안 하기 시작했죠. 어느 정도까지는 제한, 한도(Limitation)를 줘야죠. 끝없이 갈 수는 없잖아요.

    ▶ 보통 우리의 문화와 정서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말씀을 들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60년대 이후로 결혼에 대한 많은 변화가 있었고, 문화도 급변하면서 결혼의 정의를 하나로만 내린다는 것은 쉽지가 않은 것 같아요.

    ◇ 인간의 소유욕과 질투, 그 무한대의 주제

    ▶ 10월에 무슨 행사가 있다고 들었어요.

    ''''원 월드 뮤직 페스티벌(One World music Festival)''''이라고 이천에서 합니다. 브라질, 쿠바, 노르웨이, 인도네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오고, 우리나라 국악인도 있고, 우리나라 월드뮤직 하는 분들과 협연도 하면서 3일(10/5~7) 동안 축제를 벌입니다.

    저는 원래 유치원 이래로 조직체 생활을 무척 싫어하는데... (웃음)91년에 구소련이 몰락할 때 갔더니 체제 몰락이 무섭더라고요. 사람들이 먹을 것도 없고, 그 이후로 더 많은 분쟁과 전쟁이 있어요. 이라크도 그렇고 아프가니스탄도 그렇고...결론적으로 전쟁이라는 것은 무지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서로 문화를 이해하고 종교를 서로 존경해 주면서 서로의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월드뮤직이 중요한 것 같아요.

    많은 다양한 문화가, 다양한 나라의 음악인들과, 또 그런 음악인들이 오면 외교관들도 오거든요. 그럼 외교적 교류도 되고.... 이것은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같이 하게 됐어요.

    ▶ 양호가 태어나면서 일도 많아지고 얼굴도 굉장히 편해지셨어요. 이제 새로운 인생을 맞으시는 것 같은데 한대수 씨 음악은 누가 들어도 ''''이것은 한 대수 씨 음악''''이라고 알 정도로 굉장히 특색 있고 개성이 있어요. 한대수 씨 음악의 특징이나 뿌리를 얘기하자면 어떤 걸까요?

    제 음악의 뿌리는 주로 소외감과 외로움이에요.왜냐하면 기쁠 때는 작곡을 많이 못 해요. 특히 제가 결혼 두 번의 신혼 때 전혀 작곡을 못 했어요. (웃음) 아름다운 사람과 사랑을 나누기도 바쁜데 어떻게 기타를 치겠어요. (웃음)

    ▶ 연극도 행복하면 잘 안되더라고요. (웃음)

    또 한 가지 요소는 아무래도 저는 세계관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는데, 뉴스에서 영감을 많이 얻어요. 이번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비도덕적인 전쟁, 또 인간의 더러운 두 가지면, 소유하고 싶어 하는 욕망과 질투하는 행위... 이런 것이 많은 주제가 돼요.그런 것들이 인간의 근본적인 성품이라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조절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 두 가지 요소 때문에 계속 전쟁은 생기죠. 이라크는 석유, 아프가니스탄은 지리도 중요하지만 의학계에서 제일 중요한 양귀비가 있어요. 전 세계 80%를 공급하는 양귀비의 최대 생산지죠. 물론 마약중독자도 문제가 되지만 수술에 필요한 진통제가 다 어디서 나옵니까....그런 여러 가지 소유와 질투 때문에 모든 것이 일어나는데 그런 것도 제 음악의 주제가 됩니다.

    ▶ 양호가 자랐을 때는 전쟁 없는 그런 좋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는데 양호가 어떻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음악 한다고 그러면 어떡하죠? (웃음)

    저는 양호가 열심히 자기 두 발로 살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해 도와줄 것이고 음악가는 안됐으면 좋겠어요.특히, 옥사나가 양호는 음악가는 안 될 거래요. 또, 안되기를 바라고요.왜냐하면 너무 행복할 것이니까... (웃음) 옥사나도 저를 15년 동안 지켜봐 오고, 앨범을 만들 때마다, 공연을 할 때마다, 너무나도 고뇌하는 모습을 보고 고통 때문에 음악을 하는 구나.. 알게 되었어요.

    한 가지 유리한 것이 옥사나도 태어날 때 사실상 아버지가 없었어요. 돌아가신 것은 아니고 헤어지셨기 때문에 어머니가 키웠고, 저는 저대로 그랬지만 양호는 양호할 것이다... (웃음) 부모도 있고, 러시아어, 영어, 한국어 다 잘할 것이고, 그리고 제가 자랄 때와는 달리 서울이 너무나도 풍요롭고.... 그래서 저는 양호는 양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웃음) 문제는 제가 화폐를 많이 벌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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