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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독립을 위해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글 쓰는 사진작가가 되었습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다큐멘터리안, 이지누. 그는 우리 주변의 모습을 섬세한 눈으로 탐구합니다.
1990년에는 진보적인 화가들과 함께 경의선 복원을 주장하는 사진을 찍었고, 6공화국 말기에는 민주화 운동의 시위 현장을 사진에 담아냈습니다. 92년에는 전교조 교사들과 함께 우리 교육 현장을 기록하기도 했고휴전선 일대의 문화기행을 최초로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땅 밟기''''라는 답사 단체를 만들어 14년째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한국식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지향하는 계간잡지 <디새집>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BestNocut_L]우리 땅 골골샅샅 밟으며 순정한 풍경과 소박한 사람들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가, 이지누 씨를8월 4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트렌드를 넘어 일상이 되어버린 사진 찍기▶ 저는 처음 뵙는데 어떤 분이실까 너무 궁금했어요. 정말 멋진 분이시네요. (웃음)수염은 언제 기르셨어요?
94년부터 길렀어요. 그전에는 머리를 길렀는데, 짧게 자르고 나니까 뭔가 허전하더라고요. 그래서 반대로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거죠. (웃음)
▶ 이름이 참 독특한데 누가 지어 주셨어요?
아버지가 지어 주셨어요. 한문으로 쓰면 바람지고 파도 그칠 지(止)에 누각 누(樓)로 어디 조용한데 앉아 있으면 세상 풍파가 다 조용해진다는 뜻이겠지요. (웃음)아마 아버님께서 그렇게 살라는 뜻으로 지어주셨겠지요.
▶ 아버님이 정말 멋진 분이시네요. 우문일지 모르지만 글과 사진 중에 어느 쪽이 더 좋으세요?
처음에는 글을 Tm고 싶어서 학교 다닐 때 신춘문예도 내고 그랬죠. 신춘문예에 두 번 냈다가 두 번 다 미끄러졌어요.군대에 갔다 와서도 계속하고 싶었는데, 먹고살아야 하니까 작가로서 먹고산다는 게 힘들다는 걸 그때 알았죠. 어느 정도 시간도 필요하고요. 사진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찍었어요. 글도 고등학교 때부터 썼지만 어떠한 다른 방법을 통해서 이동을 해보자는 생각을 해봤죠. 그래서 사진을 찍게 된 거고요.
▶ 글 쓰는 것보다 사진 찍는 것이 돈은 더 버나요?
지금에 와서는 그렇지는 않다고 봐요. 둘 다 엇비슷한데 광고사진이나 결혼사진은 돈이 좀 되죠. 그런데 저희들 쪽에서는 장르가 다르니까 비슷하다고 봐요.
▶ 요즘은 사진이 트렌드인 것 같아요? 많이들 찍잖아요.
요즘은 트렌드를 넘어서서 일상이 된 것 같아요. 길가다 누구를 붙잡고 봐도 하다못해 사진도 찍을 수 있는 전화기라도 나오니까 사진기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는 거죠. 특히 젊은 친구들 같은 경우는 디지털 카메라 하나씩은 다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사람들이 펜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카메라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펜보다 사진기를 더 많이 쓴다는 거죠.
◇ 북한을 걸어서 가지 않는 한 비행기를 타고 백두산에 가지는 않겠다▶ 저도 한번은 화장도 안 하고 허름한 옷을 입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아주머니가 핸드폰 카메라를 계속 누르는 거예요. 찍지 말라고 해도 좋아서 그런다고 하는데 먼저 물어보고 찍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런 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당연히 물어보고 찍어야죠. 거부의사를 밝혀야 하고요. 갑자기 많은 카메라가 등장하다 보니까 대중들이 정확히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거죠. 그게 기계적 기능만 발휘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순간에 찍어야 하며, 우리가 이미지를 획득하는 의미가 무엇이며, 그 상대방을 불쾌하지 않게 해야 하는데.... 예의가 없는 거죠.
▶ 엄밀하게 말해 초상권 침해인데 찍지 말라고 하면 굉장히 서운해 하시더라고요. 이지누 선생님은 전국 방방곡곡을 다 다녀 보셨죠?
대한민국은 안 가본 곳이 거의 없습니다.
▶ 선생님 자료를 보면서 대동여지도의 김정호 선생님이 생각났는데 최근에 다녀온 곳은 어디인가요?
작년부터 일 년 동안 한강을 걸었어요. 한강을 발원지에서부터 걸어서 지지난 주에 끝을 냈어요.
▶ 한강의 발원지라면 어디를 말하나요?
발원지가 지금은 강원도 태백이죠. 금대산이라고 하는 곳에 검룡소라고 하는 작은 샘이 하나 있어요. 샘보다는 조금 크고 웅덩이 같은 곳인데 지리학 적으로는 그곳이고,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한강의 발원지는 오대산에 있어요. 오대산 우통수라는 곳에 800m 정도 되는 높이에 있는 정말 작은 샘이죠. 저는 우통수에서부터 강화도까지 걸었는데, 매일 걷지는 못하고 매주 조금씩 47차례 정도 걸었어요.
▶ 북한도 가보셨어요?
평양도 가봤고, 개성도 가봤고, 곧 금강산에 갑니다. 북한은 맘대로 걸을 수가 없어서 많이 속상한데 옛 선비들이나 일제강점기 때 기행문들만 모아서 책을 낸 것이 있는데, 백두산에 관한 기행만 집중적으로 모은 책이었어요. 그 책의 서문에 ''''나는 아직 백두산을 가보지 않았다. 북한을 걸어서 가지 않는 한 나는 비행기를 타고 백두산에 가지는 않겠다.''''.라고 썼어요.
걸어서 간다는 것은 걷는 행위 자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무와 숲, 강만 보는 게 아니고 그 주변에 사람들이 있으니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더없이 행복한 거죠. 이번에 한강을 걸으며 마지막 날 강화도에 앉아서 예성강 쪽을 바라보며 ''''내가 지금 예성강을 거슬러 가면서 그 주변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순정한 이야기를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썼어요.
▶ 결국 걸어서 곳곳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데....
가슴깊이 남아 있는 것은 그렇죠.지금까지 제가 살면서 이렇게 다니기 시작한지가 83년부터니까 그래도 제법 됐죠. 그동안 아름다운 풍경도 무수히 봤고, 끝없는 자연의 변화도 무수히 겪었어요. 그러나 결국 제 속에 남아있는 그 무엇은 ''''그 골짜기의 누구, 그 강가의 누구...''''하는 그런 사람이죠.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서 제가 많은 것을 배웠어요.
교수님들이 들으면 서운하시겠지만 저는 단연코 학교에서 배운 것이 다는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길에서, 주변에서 만난, 정말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 나를 참 많이 변화시켰어요. 20대 때까지 이지누와 30대 후반부터의 이지누는 전혀 앞뒤가 다른 사람처럼 되어버렸죠.
◇ 교육의 탈을 다 벗어버리고 좀 더 원초적인 모습으로▶ 83년부터 시작하셨으면 맨 처음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이 나세요?
83년도에는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닌 과거의 사람들을 책을 통해서 만나고 다녔어요. 처음에는 말할 용기도 없었고... 지금은 어디를 다니든지 시골에서, 들판에서 일하는 분들이나, 어떤 것을 하는 분들이든 만나서 5분 정도면 상당히 가깝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데 그때는 숫기가 없어서 쭈뼛거리다가 시간 다 보내고 한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만나서 가려고 해도 몇 차례를 가고 그랬죠.
그래서 처음에는 훈련을 하기 시작해서 과거의 기록이 남아있는 옛 선비들이나 인물을 찾아서 그 자료를 들고 다녔어요. 그 흔적을 찾아다니다가 그동안 살아왔던 삶과 너무나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하니까 바람하고도 익숙해지고, 길하고도 익숙해지니까 그걸 가지고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죠. 3, 4년 정도를 그렇게 지내다가 그 이후부터는 오지로 다니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오지라는 것이 많이 희석이 되고, 교통이 너무나 좋아졌지만 그때는 어떤 골짜기에 들어가려고만 해도 아무리 좋은 지프차라고 해도 세워놓고 걸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만났던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그대로 머릿속에 남아있어요. 그리고 그것들이 계속 저에게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 거죠.
▶ 거의 연세가 드신 분들을 만나셨겠네요?
지금은 거의 돌아가셨고, 제가 나이 드신 분들을 만난 것은 젊은 사람들보다는 그분들에게서 이어져 오는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서였어요. 저는 고향이 대구임에도 사투리를 안 쓰는데 ''''저 사투리를 그대로 채록해서, 문자가 아닌 소리로 녹음을 해서 가지고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같이 했었죠.
채록을 하기 위해서는 젊은 사람들보다는 좀 더 나이 든, 우리말을 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옛날 말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그런 분들을 찾으려고 애를 쓴 거죠. 왜냐하면 그분들은 해방 이후에 일단 제도화된 교육을 받지 않았고, 그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어떤 자연의 현상을 보고 표현하는 것은 교육에서 배운 바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하는 거예요.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문자의 표현은 정말 엄청나요. 그런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한정된 어휘력밖에 하지 못해요.
그런 분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사전에는 없지만 뉘앙스는 파도처럼 덮쳐오죠. 그런 말들이 저는 참 좋았어요. 그래서 그분들과 이야기를 하면 마치 제가 본래의 사람이 되는 것 같고, 교육의 탈을 다 벗어버리고 원초적인 모습으로, 먹는 것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그런 느낌을 참 많이 받았었죠. 그래서 ''''좀 더 어르신, 좀 더 어르신...'''' 그랬던 거죠.
▶ 사투리도 그때하고 지금하고 변화가 있을 것 같아요?
상당히 그렇죠. 그게 미디어의 발달인데요. 깊은 산골에서도 작은 접시로 TV를 보게 되고부터는 말이 싹 달라지게 됐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방송의 난청 지역은 존재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웃음) 왜냐하면 강원도에 사는 사람들은 강원도의 말이 형성되고, 경상도에 사는 사람들은 그 경상도의 말이 형성될 때까지 자연현상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바람이 산을 넘고, 구름이 산을 넘고, 혹은 넘지 못하고... 그런 여러 가지 과정들, 또 제주도는 들판이 있고, 몽골도 들판이 있어서 말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고, 들판에서 멀리 있는 사람에게 말을 전해야 하니까 목소리가 크고 굵을 수밖에 없죠. 들판에서 일하고 바람이 세니까 바람이 말을 잘라 버리잖아요. (웃음)
제주도 방언 ''''하르방, 할망''''도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방'''', ''''-망'''' 끝이 힘이 있으니까 바람을 뚫고 가죠. 말이라는 것은 그 지역이 처해있는 자연환경에 따라서 다르게 형성된다는 것이거든요. 그게 어느 한순간에 TV, 라디오가 들어가면서부터 달라지고, 뭔가 좋은 소파도 있고 TV도 있는 전혀 다른 환경의 드라마를 보면서 마치 나도 흉내 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죠. 거기서 가장 빨리 형성될 수 있는 것이 말이죠. 서울사람들이 뭔가 와서 물어보면 그 사람들도 지지 않고 싶은 마음에 강원도 말도 아닌 것이, 서울말도 아닌 것이... 섞여서 이상하게 되어버린다는 거죠. (웃음) 저는 그게 참 싫었어요.
▶ 선생님은 그 지방에 내려가면 그 지방 사투리를 쓰나요?
가능하면 그렇게 합니다. 제가 서울말로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들도 서울말로 하려고 애를 써요. 그 사람들의 말과 표현을 채록해서 처음에 글을 쓸 때는 출판사나 잡지사 기자들과 매일 다퉜어요. 원고를 보내주면 매일 하는 얘기가 ''''이 말은 사전에 없는데요.''''였어요. 그 사람들은 사전으로 중무장 되어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웃음) 어떤 곳에는 표현에 관한 것에 주를 달은 적도 있지요.
▶ 특별히 생각나는 말이 있나요?
제가 쓰는 말들 중에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주로 지방사투리죠. 가령 ''''기와''''라는 말도 ''''기와''''라고 안 쓰고 ''''디새''''라고 쓰는데 시골의 아주 궁핍한 산골에서 사는 할아버지는 ''''디새''''라고 썼거든요.
◇ 마음을 여는 것은 오직 솔직한 진실뿐
▶ 기와집이라는 것이 ''''디새집''''이라는 건데 저는 처음 들어봤어요. 그것은 어디 사투리인가요? 사투리라기보다는 순수 우리말에 가까운데, ''''디''''라는 것이 ''''흙''''이라는 뜻이라고 해요. ''''새''''는 막는다는 뜻이고요. 그러니까 흙으로 무엇인가를 막는다는 거죠. 결국 기와 자체가 흙을 구운 거니까요.또, 최근에는 ''''톺아본다''''는 말을 썼었어요. 샅샅이 뒤져서 본다는 뜻인데 그렇게 쓰면 어떤 사람은 훑어본다는 말로 바꿔 써요. (웃음) ''''훑어본다''''와 ''''톺아본다''''는 말은 전혀 다른 뜻이거든요. 훑어본다는 것은 건성건성 전체를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보고 만다는 것이거든요. 우리 말 중에 아주 세밀하게 낱낱이 본다는 표현을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지 못했거든요.
▶ 저도 경상도 사람인데 처음 듣는 말이 많아요, ''''먼지''''를 ''''미금''''이라고 하고 ''''꼭대기''''를 ''''만디''''라고 해서 산꼭대기를 산만디라고 하거든요.
사전에 보면 말기, 마루 그러는데 거기서는 ''''만디''''라고 그러고 ''''삽''''같은 것도 경상도에서는 ''''수금포''''라고 그러죠.저는 그런 것들이 귀하게 생각됐어요. 그런 하나하나를 어떻게 보면 키로 바람에 까불려서 하나씩 추리는 거죠. 추려서 그런 것으로 사전을 만들고 싶었어요. 40대, 50대거나 그 이하 세대들은 우리말은 물론 지방말까지도 제대로 기억하거나 그걸 잘 살려서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거든요. 영어나 다른 나라말은 끝없이 배우려고 하지만 우리말은 그렇지 않거든요. 저는 그런 게 좀 안타까웠어요.
▶ 그런 말을 많이 쓰는 사람들을 83년부터 24년간 만나고 다니셨는데 그중에서 한두 분만 소개해 줄 수 있으세요? ''''첫날밤''''이라는 테마로 뭘 쓰신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웃음)
아직 쓰진 않았고 할머니들을 만나면 시골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그것도 처음부터 목적을 두고 한 것은 아니었고 어떤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가장 이분들에게 전체적으로 보거나 학설적으로 봤을 때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결혼에 대한 풍속이더라고요. 결혼에 대한 풍속들이 제대로 조사되어 있지 않았어요. 대부분 70, 80대 할머니들이 부끄러워하시다가 몇 번 찌르면 다 이야기하시거든요. (웃음) 자기가 시집올 때 얘기, 시집와서 일주일간에 관한 이야기들....
가장 기억에 남는 할머님은 강원도 영월 동강에 사셨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어요. 시집오면서 고생했던 할머니 중에 한 분이셨는데, 가마를 타고 산길로 가다가 배를 타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가 하면서 오는데 거의 12시간 가까이를 가마를 탔데요. 저는 처음에 강가에서 강가로 시집을 왔으니까 가마는 포기하고 당연히 배를 타고 왔을 줄 알았어요. 그랬더니 가마를 어떻게 포기 하느냐고 하시는데 경사가 워낙 가파른 산이라 가마를 타고 내려서 거의 하루 종일 무릎을 펴지 못하셨다는 거예요. 뒤집어 지니까 붙들고 있느라고 어깨도 다치고, 아주 작은 가마 안에 무릎을 굽히고 쪼그린 체 붙들고 있으니까 어린 16살 나이에 멀미도 표현 못 하고, 아주 작은 요강 하나 넣어주고, 그 안에서 열 두 시간을 떠밀려서 자기는 첫날밤이고 뭐고 굳은 채로 잠을 잤다는 거예요. (웃음)
대관령에 살다가 돌아가신 분도 있었는데, 양양의 어성전에서 17살에 시집오신 할머니세요. 그분은 가마로 수월하게 왔데요. 그런데 사흘 동안 신방에서 못 나오게 했다고 하더라고요. 시아버지가 나무를 파는 목상을 하셨는데 신혼집이라고 근사하게 본가 옆에 조그마하게 집을 지으셨나 봐요. 거기에 사흘 동안 감금을 당했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무슨 감금이냐고 그랬더니 사흘 동안 시어머니가 끼니때마다 밥을 해서 넣어줬대요. 이, 사흘이 지나면 집의 모든 살림을 해야 하니까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누려본 호상이었던 거죠. (웃음) 그 집에서 계속 사셨는데 제가 14년 동안 해마다 찾아뵀어요. 70살이 다 된 아드님과 사셨는데, 어떤 해에는 저희 부모님보다 더 많이 찾아갔었지요. (웃음) 저를 늘 기다리셨는데 3년 전부터는 정신을 조금씩 놓으시다 저를 알아보지도 못하셨죠.
▶ 그분들에게는 결혼할 즈음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었겠어요?그런 추억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게 굉장히 소중할 텐데 그분들의 마음을 여는 무슨 비법 같은 것이 있나요?
솔직한 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어떤 기술이 통하는 게 아니라 진정이 통하더라고요. 제가 혼자 있을 때는 밥을 한 공기 이상 먹지 않지만 그분들이 있을 때는 두 공기, 세 공기 먹어요. 시골에 가서 어른들하고 가장 가까워지는 방법이 밥을 많이 먹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반찬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 거죠.
한번은 주민등록상 나이가 96세인 할아버지가 경북 성주의 산골에 사셨는데 아마 100세가량 되셨을 거예요. 지금도 차가 하루에 3, 4번밖에 안 들어오는 곳이니 옛날에 성주 시내에까지 나가 출생신고를 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웠을 거예요. 또, 옛날에는 태어나도 3년 정도 사는 것을 보고 올리고 그랬잖아요. 그분은 혼자 밥을 해 드시고, 혼자 농사짓고... 그 매력에 빠져서 4년 정도 그분을 쫒아 다녔거든요. 4년 동안 일 년에 대여섯 차례 갔어요.
그 어른이 밥을 하시는데 설거지를 안 하세요. 그냥 한 끼 먹고 나면 물로 헹궈서 그걸 또 잡수시니까, 냄비 끝을 봤더니 지저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더라고요. 새까맣게 다 붙어 있는 거죠. 처음에는 움찔했는데 제가 만나본 사람 중에 100세는 처음이었거든요. 100세라고 하는 것은 한 세기가 움직이는 거잖아요. 제가 그분을 찍을 때 절대 가까이서 찍지 못했어요. 100년 세월, 한 세기를 보는 거니까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 그분을 봤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해주시는 밥이니까 거절을 못 하고 맛있게 먹었지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신이 나셔서 계속 주시는 거예요. 제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해도 절대 손을 못 대게 하세요. 객에게 그럴 수 없으니 저는 앉아서 먹기만 하라는 거죠.
나를 내세우면, ''''내가 이런 식으로 안 먹어 봤으니까 그렇지 이분은 이것을 먹고 이렇게 잘 살아오시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만날 때는 항상 그분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야 해요.나의 교육수준과, 생활수준과, 문화수준을 가지고 시골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절대 안 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는 없고 중년의 능글능글한 모습만 있는 거예요. (웃음)
◇ 산골 소녀 영자는 그곳에서 그만의 방법으로 살았어야▶ 그분들의 이야기를 하자면 며칠 밤을 새워도 모자를 것 같은데 그중에 많이 알려진 이야기가 산골 소녀 영자 씨 이야기죠? 그분은 지금 절에 가 있나요?
그 이후로는 보지 못했는데 스님이 되었다고 들었어요.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만 구태여 찾아갈 일은 아닌 것 같고...
▶ 처음 영자 씨를 만났을 때 이야기를 해주실 수 있으세요?
94년쯤 강원도 오지에 살고 있는 13살의 영자를 처음 봤는데 몇 년 동안 두고 봤어요. 저는 사람을 만날 때 한 번에 끝나질 않아요. 묘한 버릇인데 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몇 년 동안 줄곧 만나지요. 그중에 가장 오래 만난 사람이 14년이고 최소로 만나도 3, 4년은 기본적으로 만나요.영자도 한 4년 만에 어딘가에 글을 썼어요.
참 순박한 사람이었어요. 제가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가장 원초적인 사람의 모습들을 말씀드리는 건데요, 참 순박하고 제가 몇 번을 봐도 부끄러워하고 제가 돌아설 때마다 담장 뒤에서 봤어요.한 달에 한번 아버지와 삼척 시장에 나가는 것 말고는 사람을 볼 기회가 없었죠.글을 쓰고 나서 전화가 많이 왔는데, 저는 지금도 그렇지만 행정 명을 절대 안 써요. 그냥 강원도 어느 산골이라고만 썼거든요.
▶ 그런데 사람들은 꼭 알아내잖아요.
가능한 한 그런 것은 배제하고 기사의 신빙성은 확보를 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썼었는데 아마 방송에서 그 다음부터 나갔었나 봐요. 방송이 나가기 전에 저도 책을 보내 줬어요. 영자는 상당히 책을 좋아했었고 라디오가 보물 1호였는데 고물 라디오에 초록색 페인트를 칠해서 건전지로 들었어요.처음 만났을 때는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트로트를 정말 좋아했어요. 난청 지역에다 새벽 4시면 일어나기 때문에 그 시간대의 방송만 들었기 때문에 어르신들이 듣는 방송만 듣다 보니 아는 게 트로트뿐이었어요. (웃음)
17명의 사람이 모여서 책을 보내주는데 저에게 보내주면 모아서 보내줬어요. 옷 같은 것은 절대 안 받고 오로지 책만 받았어요.저는 옷가지를 도움 받는 것과 책을 받는 것은 다르다고 봐요. 쌀이나 돈이나 그런 것은 그 사람의 생활 자체를 흩트릴 수 있기 때문에 아닌 것 같아요. 민들레는 민들레가 피는 곳이 있고, 선인장은 선인장이 피는 곳이 있어서 자리를 옮겨가면 죽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사람을 만나면서 깨달은 큰 것이었는데 그 친구는 그곳에서 그 친구의 방식대로 살았어야 했어요. 그러면서 책을 양식처럼 조금씩 먹으면서 살았으면 되는데 그곳이 TV에 나오고 주소가 개방되면서 그 친구가 평생을 읽어도 모자랄 책이 도착을 했죠. 책을 위한 곳간을 따로 짓고 너무나 엄청났어요.
저는 보내고 싶은 책의 목록을 먼저 보내달라고 해서 뺄 것은 빼고 추려서 한 달에 15권 이상은 절대 보내지 않았어요.그렇게 조심스럽게 느린 속도로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터져버린 거죠. 참 가슴 아팠어요.지금도 제가 잊을 수 없는 것이 제가 돌아서서 가면 돌담 뒤에 숨어서 배꼼이 숨어보다가 제가 돌아보면 숨는 거예요. ''''영자야 다 보고 있다.'''' 그러면 고개를 내밀었다 숨고 하는.... 그런 모습들이죠.
▶ 사실 사람들은 선의로 했을 거예요. 그 선의가 어떻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을 거고...
사건이 있고 나서 사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방송을 했던 담당 PD의 말이었어요. ''''내가 어떻게 이 파장의 끝을 볼 수 있었겠느냐, 예견하고 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겠느냐''''는 발언을 했는데 참 심각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 사건 이후로 사람을 다룬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제가 진정으로 사람을 대한다고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이었나, 혹 내가 저 사람들을 소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어요. 저 사람을 소비해서 나의 무엇인가를 갖추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었죠.
그래서 그 이후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더 이상 다른 곳에 글을 쓰지 않았어요. 지금도 계속 만나고 다니지만 소개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와 내가 동등하다면 모르지만.... 그 사람은 단지 그곳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고 저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일뿐인 거죠. 그 생각이 들고나서부터는 친구처럼 지네요. 그 사람이 더 이상 나의 목적과 수단이 아닌 거죠.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를 사람에게서 치유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 두려워서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자연하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지요.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고 자연에게서 치유를 하고 있는 거예요. 물론 자연에게서 치유를 하고 또다시 사람에게로 가겠지요. 아직은 자연 속에 머물고 싶고 자연 속에 있는 사람들과 계속 만나지만 드러내지는 않고 싶어요.
◇ 인생은 양자택일! 돈을 벌든지 상을 받든지 ▶ 한국의 지오그래픽을 표방하던 계간잡지 ''''디새집''''... 너무 귀한 책을 내셨는데, 이런 책으로는 사실 돈 벌기가 어렵잖아요. 책을 내신 동기를 듣고 싶어요.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인데 두 가지인 것 같다고 해요. 돈을 벌든지 상을 받든지... (웃음)
▶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은 세계적인 잡지니까....
저는 그것을 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죠.''''책도 마찬가지고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내 인생을 살고 싶으면 잘하면 상은 받을 것이고, 돈은 못 벌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 다른 방법을 꾀하면 내 인생은 살지 못하지만 돈은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택일은 네가 알아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돈 버는 것은 포기를 했어요. 돈 버는 것은 제가 참 잘하지 못하는 것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쓰는 일은 너무나 잘하는데... (웃음)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데 누군가가 도와줄 거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제가 벌어서 제가 해야 되는 거예요. (웃음) 하지만 시작을 하면 제대로 하고 싶고 뭔가 강타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냥 있는 듯, 마는 듯 하는 것 보다는....
왜냐하면, 워낙 다른 미디어들이 성장을 하고 있으니까 한국적인 것을 가지고 허름하게 해서 내 놓으면 사람들에게 얕잡히니까 그거는 아닌 거죠. 한국이라는 것으로도 이만큼 훌륭한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충분한 깊이로 제대로 된, 정말 사람들이 놀랄 수 있을 만한 책을 만들어서 보여주고 싶었죠.
▶ 책을 만들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쏟으셨는데 휴간하셨잖아요. 다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계속 하고 싶죠. 열정은 있는데 결국에는 돈이에요. (웃음)지금은 하나로 통째로 묶어내지 못하니까 파편적으로 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하겠죠. 제 꿈이 있으니까 그 꿈을 향해서 뭔가를 축적하기 시작하면 또 좋은 소식들이 있겠죠. 관심을 가져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될 것 같습니다.
▶ 고향이 대구인데 언제까지 살았어요?
중학교 때까지 살았어요.
▶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일본에서 태어나셨고 한국에 오셔서 학교를 졸업하셨는데 제가 이렇게 된 데는 아버님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나중에 법조계 쪽에서 일을 하셨는데 책꽂이를 보면 릴케니 하이네니 시집들이 꽂혀있고, 문학청년이셨어요. 그런 책을 넘기다 보면 네잎클로버도 꽂혀있고, 그런 것을 제가 중학교 때 아버님 서재에서 보고 어머님에게 여쭤보면 그 네잎클로버가 당신에게로 온 거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웃음)굳이 말씀은 안 하시는데 아버님 앨범을 보면 군대 가시기 전에 대구 문학비 앞에서 찍은 그런 사진들이 있어요.
나중에 어머님 친구 분들이 저를 보고 ''''제는 공부하는 것은 아버지를 닮았고, 돌아다니는 것은 어머님을 닮았다''''고 하셨어요.어머니는 대구의 큰 과수원집 첫째 딸이었는데 아직까지도 열정이 넘치고 지금도 여행을 자주 다니세요. 아버님은 집에만 계시는데, 은퇴하시고 78세의 연세로 컴퓨터 강사자격증을 따서 구청 같은 데서 자원봉사를 하고 계세요.
◇ 문학소년 아버지와 여행 소녀 어머니의 유전적 결합▶ 아들이 문학청년이나 사진작가를 하는데 있어서 부모님이 반대하시거나 그러지는 않으셨어요?
제가 둘째인데 이쪽 일을 한다고 하고는 7년 동안 부모님을 못 뵈었어요. (웃음)저도 그때는 골기가 강하고 모난 부분이 많아서.... 부모님이 반대하시면 나도 보지 않겠다, 부모님도 제가 그거 하면 보지 않겠다고 하셨죠. 제가 개인전을 91년에 했는데 84년부터 서로 안본 거예요. 전시회를 열고 화랑 구석에서 선배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많이 본 분이 들어오시는 거예요. 아버님이 찾아오셨더라고요.
▶ 느낌이 어떠셨어요?
별 느낌이 없었어요. (웃음) 아버님이 죽 둘러보시더니 5만 원을 주시면서 밥이나 사먹으라고 하셨어요.
▶ 부모님은 법조인이 되기를 원하셨나요?
정치 쪽이나 외교 쪽으로 가시기를 바라셨겠죠.그때만 해도 정치외교학과가 인기였거든요.
▶ 그런데다가 민주화 투쟁까지 하셨잖아요.
확실하게 엇나간 거죠. (웃음) 아버님이 가장 큰 용서를 하시고 저를 자랑스럽게 인정을 해주신 것이 ''''디새집'''' 발표였어요. 자식과 남자로서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기까지 무려 40년이 걸렸던 거죠. 그때는 아버님이 그 책의 거의 영업사원이었어요. 스스로 즐거우셔서 전화를 하시고...그렇게 인정을 받았죠. 그때부터는 다른 얘기는 안 하시고 열심히 하라고 하세요. 저 또한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니까 목숨 걸고 하는 거죠.
▶ 우리 땅 밟기 답사단체는 언제부터 만드신 거예요?
94년에 제가 본격적인 계획을 세워서 만든 프로젝트가 대한민국을 샅샅이 보고 싶은데 그 시작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휴전선을 먼저 봐야 하겠다고 생각했죠. ''''왜 내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아주 묘한 상태의 사람들이 되어 있는가, 이것이 어디서부터 기인하는가''''를 따져보기 시작했어요. 철조망에 가로막인 삼면은 바다고... 결국 대한민국이 섬이라는 판단을 내렸죠. 대한민국은 섬 아닌 섬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북쪽지역부터 먼저 가보자고 해서 모 신문에 휴전선을 먼저 연재하기 시작했었어요. 그 방법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요. 1년 동안 하면서 헤매고 나니까 이 현실을 많은 사람들과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모임을 만든 거예요. 그 모임을 만들어서 사람들하고 ''''이랬기 때문에 우리의 정치상황이 이렇고, 이랬기 때문에 우리의 환경이 이렇고, 이랬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이렇게 더디다.''''는 것을 말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처음에는 휴전선 쪽을 많이 다니고 그다음에는 우리 민중문화라고 하는 소위 어떤 때는 제가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서 하루 종일 이야기할 때도 있고 문화유산 기행도 하고 그랬어요.
◇ 토속적인 삶을 벗어난 평면의 삶이 가장 두려워▶ 회원이 얼마나 되나요?
지금은 잠정적으로 쉬고 있는 상태입니다. 제가 워낙 일들이 많아져서 2년 전부터 쉬고 있습니다.
▶ 앞으로 계획이 있으시다 면요?
휴전선, 한강... 나머지 몇 군데 중요한 포인트들, 인문 지리학적으로 남한을 이해하기 위한 사람, 섬, 그렇게 정해놓은 것들이 있어요. 거의 끝나서 이제 책으로 쓰기만 하면 돼요. 사상사가 하나 남아있는데 신라 후기에 관한 사상부분이 정리되고 나면 동아시아 쪽으로 나가야죠. 동아시아 쪽으로 나가서 한반도뿐만이 아니고 중국과 일본과 그 사이에서의 우리의 위치나 우리의 문화형태나 그런 것들을 살펴봐야 하겠죠. 거기 가서도 또, 그쪽 노인들을 만나겠지요. (웃음) 언어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할 것은 2, 3년 정도면 끝 날 것 같아요.
▶ 사라져가는 많은 것들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 중에서도 정말 안타깝다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말''''입니다. 지금 지방에서 지방 나름대로의 사투리 경연대회도 하고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사투리를 희화하는데, 그것은 대중화시키는 게 아니거든요.정말 그 지역에 토박이로 살아온 사람들을 방송이나 이런데서 선택을 해서 말들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순간에 모든 것이 섞여버리면 대한민국은 평면이 되는 거예요.저는 평면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재미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산도 있고, 강도 있고, 계곡도 있고, 그래야 하는 건데 어느 순간에 우리는 어쩌면 평면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는 거죠.
한글이 중요한 만큼 우리의 말도 중요하고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까지 있을 때 토속적인 토박이말들을 빨리빨리 채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저 같은 개인이 할 문제는 아니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해야 하는 거죠. 한 나라에 문화제도가 있으면 한 나라에 언어제도가 있어야 되잖아요.국가적인 사업으로 해서 한 나라의 언어제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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