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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예나 "발레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강예나 "발레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유니버설발레단 수석 무용수 강예나 씨

강예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함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쏟아낼 듯이 큰 눈, 살포시 미소 짓는 입술….

깡마른 몸과 유난히 긴 팔다리로 만들어내는 섬세한 춤 동작…. 발레리나 강예나의 무대는 언제나 감동으로 꽉~ 차곤 합니다.

그녀가 처음 토슈즈를 신은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남들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선화예술중학교에 수석입학 했습니다.

그 후 그녀의 발레인생은 장애물 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듯했습니다. 15살 때 영국 로열 발레학교 오디션에 당당히 합격해 유학길에 올랐고, 한국 최초로 아메리칸 발레시어터 단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에 입단해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연습 중 순간의 실수로 인해, 왼쪽 무릎의 근육이 찢어지고 십자인대가 파열되면서 그녀의 질주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하루 아침에 모든 걸 잃었던 그녀지만,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노력에 노력을 더한 결과,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습니다.

현재 무대 위에서 절정의 꽃을 피우고 있는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 발레리나 강예나 씨를 8월 3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발레리나에게도 건강한 근육은 필요해

▶ 너무 아름다우신데 예전에 비해 근육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BestNocut_R]

한국발레단은 클래식 작품을 많이 해서 비정상적으로 마른 요정 같은 몸을 선호해요. 저도 미국에 가기 전에는 근육질의 몸이 아니었는데, 뉴욕에서 현대작품을 많이 하고 부상으로 인한 재활훈련을 2년 정도 하면서 인위적으로 근육을 많이 단련했어요. 현대작품을 할 때는 근육, 파워로 주는 강인한 인상이 필요하기 때문에 꾸준히 헬스를 했죠.

▶ 우리나라는 요정 같은 몸을 원하고 미국 같은 곳은 좀 다른가요?

네, 미국과 유럽에서 선호하는 몸은 역삼각형에, 이미 남성적인 몸의 발레리나들도 많아요. 귀국한지 3년 반 정도 됐는데 지금은 많이 가늘어진 편이에요. 미국에서 만들어 온 몸으로 클래식 작품 ''''지젤''''이나 이런 걸 하기엔 몸이 무겁더라고요. 그래서 운동량을 줄이고 요가나 다른 식의 운동을 많이 했죠.

▶ 저도 발레를 좋아해서 공연에 많이 가는데 팔다리가 긴 발레리나를 보면 유난히 우아하게 보이더라고요. 팔다리가 어떻게 이렇게 길 수 있는지 사실 옆에서 보면서 놀랐어요. 유전인가요?

짧지는 않은 편인 것 같아요. (웃음)저희 친 할머님이 팔다리가 가늘고 긴 편이셨는데 닮은 것 같아요. 사실 제가 가족들 중에 키도 제일 크고 가족들과는 외형적으로 다른 모습이에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성장판을 자극하는 ''''쭉쭉''''이나 ''''잼잼'''' 같은 것을 많이 해주셨는데 그게 그렇게 아이들 성장에 좋다고 하더라고요.

▶ 제가 알기로는 발레리나가 되려면 평생 새 모이만큼의 식단과, 근육도 발레에 필요한 근육 이상의 것은 없어야 한다고 들었어요.

예전에 클래식 발레리나들은 클래식만 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그랬는데 요즘처럼 크로스오버가 많이 들어가고 현대작품을 많이 하려면 그런 몸으로는 관객들에게 파워풀한 감동을 줄 수가 없어요. 다른 운동을 잘하는 무용수들이 무용도 잘하는 것 같아요. 건강한 근육은 필요하죠.

저는 사춘기 때 몸이 변하지 않으려고 극심한 다이어트를 했었는데 그 부작용은 20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나타나요.대부분 10대 때 심한 다이어트를 한 무용수들이 20대에 골다공증이라든지 잘못된 밸런스로 우울증 같은 것도 걸리고 그래요.정말 잘 먹고 많이 움직이고, 잘 자고, 배변 잘하고, 그것이 정답인 것 같아요.

사실 저도 먹으면서 운동을 해야지 기초 대사량이 확보돼서 잘 먹어도 살이 찌지 않거든요. 안 먹는 사람은 조금만 먹어도 살이 불어요. 제가 20대 때 약간 그랬는데 미국에서 운동하고 그러면서 체질이 많이 바뀌었어요.

▶ 식단은 어떤가요?

요즘 같은 경우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점심 같은 경우는 잘 못 챙겨 먹어요. 그래서 무용하는 사람들이 위장병이 많아요. 굶었다가 갑자기 폭식하고... 그것이 반복되니까요. 저는 탄수화물보다는 단백질 위주로 먹고 무기질, 채소, 해산물 등을 주로 먹어요.

▶ 특별히 식단을 짜나요?

아니요. 저 정도의 몸이면 몸에서 필요한 음식을 먹고 싶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갑자기 채소가 먹고 싶다거나 장어구이, 삼겹살 등이 먹고 싶은 생각이 들면서 필요한 에너지에 대한 감이 오더라고요.

◇ 적성을 찾아 시작한 늦깎이 발레의 감동

▶ 술, 담배, 커피는 전혀 하면 안 되죠?

예전에 모 신문에 국립무용수가 발레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청교도 같은 삶만을 살 수는 없다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저희들도 무대에서 인생을 보여줘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술도 알아야 하고 고뇌도 알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이 수녀 같은 삶을 살지는 않아요. 저도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며 와인은 마십니다. 월드 프리미어(World Premiere) 같은 게 있으면 샴페인으로 자축도 해야 하고 서로 응원하며 가는 거죠.

▶ ''''예나''''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줬나요?

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 ''''예''''자 돌림이고 예술 ''''예(藝)''''에 집 ''''나(那)''''자를 써서 ''''예술의 집''''이라고 지어주셨죠.

▶ 처음부터 아버님이 예술적인 감이 오셨나 보네요.

어머님이 피아노 교수님이고 저는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어요. 그런데 너무 한자리에 오랫동안 앉아서 뭔가를 연습한다는 것이 적성에 안 맞았어요. 우연한 기회에 유니버설 발레단 문훈숙 단장님의 코펠리아(Coppelia)라는 발레 공연을 보게 됐는데 저거다 싶었어요. 엄마를 조르고 졸랐는데 치라는 피아노는 안치고 그림을 좋아해서 만화만 그리니까... 어떻게든 예술학교를 보내고는 싶은데 미술을 하면 만화를 하겠다고 하고, 피아노는 실력이 안 되고... 그러니까 무용하라고 하신 거예요.

▶ 발레리나로서는 늦은 시작이네요.

많이 늦었죠.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방학에 시작해서 5개월 정도 배우고 들어갔으니까요. 그때는 정말 미친 듯이 연습을 했어요.

▶ 적성에 맞았어요.

네, 처음에 배워야 하는 다섯 가지 포지션이 있는데 1번 포지션을 서자마자 전기가 딱 오는 느낌이었어요. 모든 면에서 다 좋았고 발레리나들이 겪는 고통들이 순정만화에서는 미화돼서 나오잖아요. 거기에 대한 환상이 있었어요. (웃음) 그래서 싫지가 않더라고요.

▶ 예나 씨 모습이 꼭 순정만화 주인공 같아요. (웃음)발레리나는 보통 어렸을 때부터 발레를 시작하는데 외국도 그런가요?

외국의 경우는 4살부터, 아이가 걷기 시작할 때부터 ''''핑크 쮸쮸'''' 같은 것 입혀놓고 걸음마를 시작하더라고요.

◇ 가능성을 향한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식 오디션

▶ 발레리나를 만들겠다기보다는 여성으로서의 태도, 자세 때문에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릴 때부터 발레 한 친구들도 많았을 텐데 6학년 때 시작해서 선화예중에 수석으로 입학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고등학교 입학은 다르지만 중학교 입학은 현재의 실력보다는 가능성을 보면서 점수를 많이 주기 때문에 제가 체격 조건적으로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보신 것 같아요.

▶ 키가 얼마였나요?

그때는 중간에서 조금 작은 정도였어요.영국유학을 가고 거기서 우유와 치즈를 많이 먹게 되니까 일 년에 11㎝가 크더라고요.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많이 크니까 무릎과 관절이 약해졌어요. 제가 영국에서 무용이 많이 늘지 못했던 것이 우울했던 것도 있었지만 그런 것도 영향이 컸어요. 서 있으면 몸이 휘청거리니까요.

▶ 선화예중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무용을 하다가 영국유학은 언제 간 건가요?

중학교 2학년이 시작됨과 동시에 갔어요.발레부 담임선생님이 영국분이셨는데 그분이 임신을 하셔서 영국에 있을 때 영국 로열발레단 교장선생님을 찾아가서 저를 소개하고 제가 발레 하는 사진을 보여주신 모양이에요. 동양인 치고는 조건이 좋아 보인다고, 사실 오디션 기간이라 1, 2차를 다 본 상태인데 3차 최종 오디션에 와서 보여 달라고 해서 엄마와 서둘러 갔죠.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것과 오디션 과정이 매우 흡사해요. 허벅지 길이와 종아리 길이 비율은 얼마나 좋은지 부터 시작해서 엑스레이로 다 찍어보고, 자로 다 재보고, 의사선생님이 나와서 성장판 같은 것을 재보고 어느 정도 자랄 것인지 예상을 하고, 며칠 동안 오디션을 하는 거죠.그리고 최종적으로 추려낸 다음에는 부모님과 오디션을 같이 봐야 해요. 엄마가 굉장히 살이 쪄있다면 안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만큼 철저하게 발레라는 것은 노력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고 타고난 것이 있어야 한다고 유전적인 것도 중요하게 봐요.다행히 어머님이 마르셨고 똑 부러진 성격이시라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죠.

▶ 15살에 로열발레단에 들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정말 대단하네요.

몇 천 명이 모여서 3명이 됐으니까요. 동양인으로는 저 말고 중국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애는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계 중국학생이었어요.

▶ 말도 안 통하고 외로웠을 텐데 어떻게 견디셨어요?

만날 울었어요. 나중에는 눈이 아파서 울지 못할 정도로 울었어요. 저는 영어를 빨리 배웠는데 싸워야 하니까 빨리 배웠어요. 애들이 나에 대해서 어떤 얘기를 하는지 너무 궁금한 거예요. (웃음)나중에는 아이들이 제가 영어실력이 그렇게 많이 는 줄도 모르고 제 앞에서 제 흉을 보기에 조목조목 따졌더니 그다음부터는 조심하더라고요.

▶ 공격적이 됐군요...

제 자신은 아무도 아닌 저 스스로 지켜야만 한다는 것을 그때 배웠어요.사실 그때가 아이들이 미운 짓을 가장 많이 할 때잖아요. 왕따도 그렇고.... 20명 정도로 학기를 시작해서 매년 추려내어 5학년이 되면 7명 정도 남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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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을 제대로 잘 출 수 있을 때 떠나고 싶은 것이 현재의 욕심

▶ 프리마 발레리나가 나온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군요. 그런데 그곳을 졸업한다고 해서 로열발레단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죠?

절대 아니죠. 그때 1등 했다 해도, 설령 로열발레단에 입단이 된다고 해도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는 것은 또 그만큼 희박해요. 요즘 서운한 것은 한국에서건 외국에서건 프리마 발레리나라는 자리는 굉장히 대단하고 어려운 자리인데 은퇴를 한 무용수들을 보면 너무나 평범하고 도대체 뭘 위해서 자기 한 몸 불살랐을까.... 그런 생각이 새록새록 들어요. 저도 은퇴할 시기가 2,3년 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35세가 넘어가면 체력적으로 힘들어져요.

▶ 마고 폰테인(Margot Fonteyn, 1919∼1991)이 60세에 춤추는 것을 봤는데요....

그분은 완전히 예술성과 연륜, 그간 쌓아온 명성으로 승부를 하신 거죠.그렇게 위대하게 춤을 추시는 분도 있는 반면 저는 과연 제가 오랫동안 춤을 추고 싶은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제가 발레계에 기부를 할 수 있는 것은 춤뿐 만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도 충분히 후원이나 지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말 춤을 제대로 잘 출 수 있을 때 떠나고 싶은 것이 현재의 욕심이에요. 사실 3년 반 전에 한국에 돌아올 때도 3년 정도 할 수 있는 작품들을 다하고 은퇴하겠다는 생각으로 왔었는데 아직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사람 일은 장담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웃음)

▶ 로열발레학교에서는 몇 년 있었나요?

중학교 과정이 5년인데 제가 편입을 했으니까 2년만 하고, 고등학교과정은 미국으로 가서 4년 했어요. 그리고 프로로 입문했죠.

▶ 장학금으로 다녔나요?

영국에서는 아니고, 미국에 가서 전액 장학금을 받았어요.

▶ 미국에서는 좀 편했겠어요. 영국보다는 자유롭고....

언어도 되고, 동양인들도 많고, 외국에서 온 학생들도 많아서 훨씬 좋았죠.제가 다니던 학교가 옛날에는 키로프 아카데미라고 불렀고, 지금은 유니버설 발레 아카데미라고 불리는 신생학교였어요. 선생님들이 다 키로프 발레단에 계셨던 주역 분들이데, 오셔서 아이들을 막 키워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저를 붙잡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 거죠. 제가 시기를 참 잘 탄 것 같아요.

▶ 수업방식은 어떤가요? 발레만 가르치지는 않죠?

제가 감동받았던 것은 특히 영국의 교육제도는 발레뿐만이 아니라 일단 모든 학생들이 악기 하나씩은 다 연주할 수 있어야 하고 1년에 한 번씩은 안무경연대회를 해요. 물론 어린 아이들의 애송이 안무지만 그 속에서 전혀 색다른 안무들이 나오고 계속 자극을 줘요. 물론 저는 피아노를 했고요. 연말이 되면 교회에서 성가 전곡을 부르는데, 베르디의 레퀴엠 전곡을 부르게 하고... 이런 부수적인 예술적 수준이 대단하더라고요.유럽피언들의 자부심이 어디서 오는지, 어린 나이지만 놀래면서 충격을 받았죠.

▶ 완전히 예술가로 키워주는군요.

단순히 무용수가 아닌 예술가로서 키우죠.미국에서는 고등학교를 발레학교 따로 다니고, 일반국립고등학교를 따로 다녔거든요.일반 고등학교 과정에 다니면서 저녁에 발레학교를 다녔는데 캐릭터 춤이나 다른 장르의 춤도 많이 배우게 하고 인센티브(Incentive)하게 발레를 많이 했었어요. 그 탄탄한 기본이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 몇 백 만 원짜리 옷도 몇 번 입다 보면 그냥 땀에 절은 한 벌의 옷일 뿐

▶ 교육을 정말 정석으로 받으신 것 같은데 졸업하고 아메리칸 발레시어터(American Ballet Theatre)에 들어간 거예요?

선생님 전부가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에 계셨던 분이고 제가 졸업학년 때 키로프 발레단이 미국에 ''''호두까기인형''''을 가지고 순회공연을 하는데 그때 학생대표로 주역을 한명 시켰었거든요. 그때 제가 키로프 발레단과 주역으로 공연을 한 거예요.그래서 그것을 계기로 졸업하면서 러시아로 건너갔죠.

▶ 키로프발레단에 먼저 가신 거네요.

일단 페테르부르크에 있다가 문훈숙 단장님의 권유로 유니버설발레단의 객원으로 처음 주역으로 뛰게 됐어요. 그래서 다시 유니버설발레단의 최연소 수석무용수로 2년 반 정도 활동하다가 유니버설발레단이 미국공연을 갔을 때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의 케빈 맥킨지 (Kevin Mckenzie) 예술 감독님이 저를 보고 스카우트 제의를 하신 거예요.

▶ 그래서 다시 미국으로 가셨는데 러시아 생활이 별로 즐겁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너무 우울했어요. 일단은 제가 영국에서 언어가 안 통해서 느꼈던 어려움을 다시 느껴야 했고, 사회적으로도 사회주의, 자본주의로 바뀌는 혼란기라서 마피아가 장악하고 있었고, 외국인들은 공격의 대상이었고.... 모든 일이 너무 힘들었었어요. 제가 생일이 가을이라 가을, 겨울을 너무 좋아했는데 러시아에서 겨울을 두 번 나고 보니까 완전히 질려서 이제는 겨울이 너무 싫어요.

러시아의 겨울은 해가 2, 3시간 뜨고 지는데 암흑 같아요. 그때는 가로등이 많지 않아서 겨울에 보드카 마시고 길거리로 나온 알코올중독자가 너무 많았어요. 도시적인 우울증이랄까요... 언니가 보내준 가요 테이프 들으면서 위안을 삼았어요. 그때 김건모 씨의 노래를 정말 많이 들었어요.

▶ 연애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멋진 남자를 사귀진 않았나요?

지금 후회하는 것이 왜 그렇게 꽃다운 나이에 연애를 마다했을까.... (웃음)무용하는데 지장 준다고 생각해서 다가오는 남자들이 전부 나쁜 사람으로 보였고, 무용을 위해 거부했어요.이제는 늦바람이 무섭다고 발레 이외의 것들이 너무 즐거워지고 발레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보석 달린 몇 백 만 원짜리 옷을 입고 춤추는 것을 보면 부럽다 생각되지만 그 이면에 힘든 점이 참 많다''''고 말했죠? 저도 배우로서 너무나 공감하는데 연습의 고된 점들을 이야기해주세요.

일단 저희들은 말 그대로 피땀 흘리며 연습을 해요. 예쁜 옷이 맵시가 잘 나기 위해서는 몸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몇 백 만 원짜리 옷도 몇 번 입다 보면 그냥 땀에 전 한 벌의 옷일 뿐이지 그 개념이 없어져요.

그리고 토슈즈(toeshoes)를 한번 신으면... 공연 때는 공연 하나당 하나씩 없어져요. 가격도 만만치 않고... 연습이 많을 때는 하루에 한 개씩 신을 때도 있고 길게 가는 것도 일주일을 못 넘겨요. 토슈즈 자체가 굉장히 정교해서 종이와 아교풀이 겹겹이 쌓여진 거라서 일단 땀이 배면 허물어지거든요. 그런데 쿠션 자체가 없어서 발이 들어가면 물집이 안 생길 수가 없어요. 저 같은 경우는 손가락도 길지만 발가락도 굉장히 길어요. 그래서 발가락끼리 문질러지게 되면 염증도 많이 생겨서 레이저로 티눈 다섯 개를 한꺼번에 빼낸 적도 있고, 발톱은 지금까지도 조금 쉬었다가 토슈즈를 신으면 바로 빠져요.

▶ 아프지 않으세요?

너무 아프죠. 너무 아프지만 단지, 이제 그것을 참아내는 인내력이 커지는 것뿐이죠. 아직도 당연히 아파요. 그래서 저는 무용하는 사람들, 아니면 스턴트맨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의 고통을 참아내는 데는 정말 선수들인 것 같아요.의사선생님들이 인대주사나 큰 주사 맞을 때 어떻게 그렇게 잘 참느냐고 그러세요. (웃음)제가 못 느껴서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큰 고통을 매일매일 당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그렇게 되기까지는 사실 얼마나 불쌍한 과정을 많이 겪어야 되겠어요....

◇ 극한 고통 속에서 커지는 것은 인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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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발레가 좋으세요? (웃음)

이 시점에서는 발레를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해서 한다기보다는 이제는 너무나 제 삶의 일부이고 그래서 밥 먹는 것처럼 하는 것 같아요. 아직도 발레가 너무너무 좋을 때는 한 3주 정도 쉬다가 돌아왔을 때에요. 몸이 하나도 안 잡혀 있고 남의 몸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들지만 음악이 흐르면서 처음 플레이 동작을 할 때 소름이 끼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나는 영락없는 발레리나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 무대 공포증도 있으세요?

저는 너무 심했어요. 제가 유니버설무용단의 최연소 수석무용수로 활동할 때 가장 심했는데 나이는 가장 어린데다가 가장 중책을 맡은 거잖아요. 게다가 유학파가 파격적으로 캐스팅된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제 위로 하늘같은 선배님들이 다였어요. 그때는 제가 발레를 즐기면서 무대에 선 게 아니고 정말 사명감, 책임감, 그리고 항상 뭔가를 증명해 내야만 한다는 부담감으로 무용을 했었기 때문에 무대가 즐겁지가 않았어요.정말 제 인생의 짐이었지요.

그러다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에 스카우트되어서 뉴욕에 가자마자 거의 초반에 부상을 당하고 제가 거의 1년 정도 무대를 떠나있을 때 내가 정말 무용을 사랑하는 구나.... 그걸 다시 찾은 거죠. 그리고 미국발레리나들의 분위기는 무용을 즐기면서 하고 자기 사생활과 프로페셔널라이프의 밸런스를 너무 잘 맞추더라고요. 그런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고 나도 무대로 돌아오면 무용만이 내 삶이 아닌 여자로서의 내 삶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그때 배웠어요.

어릴 때는 실수를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소위 명성이 나고 이름값을 하게 되면 무대에 서는 것이 점점 무서워지죠. 그런 것에서도 어느 정도 초월하려고 해요.예전에는 무대에 서면 ''''잘하게 해주세요. 사람들이 저를 보고 기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감동을 나타나게 해달라는, 저를 도구로 써달라는 기도가 나와서 공포증은 많이 줄어든 것 같아요.

▶ 무대에 서기 전에 징크스 같은 게 있으세요?

항상 일주일 전쯤에 악몽을 꾸는데 화장을 하면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벌써 오케스트라는 서곡을 연주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머리도 풀어헤친 상태로 나가면 사람들이 전혀 다른 작품을 하고 있다거나, 안무자가 내용을 다 바꿔서 저만 내용을 모른 다거나, 진땀나는 꿈을 꾸고 나면 공연을 잘하더라고요. (웃음)소극장 같은 경우는 사람들과 가까이서 호흡하면서 할 수 있어서 좀 자유로운데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 같은 대극장의 경우는 압박감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 힘든 것을 어떤 것으로 푸나요? 발레 외에 가장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영화를 보고,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서 와인 한두 잔 하면서 다른 분야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그게 많이 치료가 되더라고요.그리고 우리들은 발레슈즈를 늘 꿰매야 하는데 단순노동이잖아요. 발 모양이 다 다르기 때문에 망치로 자기 발에 맞춰 구부러트려야 하고 자기 발에 딱 맞게 바느질도 해야 하고 손들어가는 게 굉장히 많아요. 꿰매고 청소하는 것이 굉장히 마음을 안정시켜주고..... 그렇게 푸는 것 같아요. 저는 항상 토슈즈를 가지고 뚝딱뚝딱 제 발에 맞출 때마다 요리사가 된 기분이에요.

▶ 저는 다시 태어나면 꼭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토슈즈 한번 신어보고 싶은데...

토슈즈하면 재미있는 징크스가 있는데 외국 같은 경우는 블러디 토슈즈(bloody toeshoes)라고 해석하면 ''''피의 토슈즈''''라는 말인데, 바느질을 하다가 찔려서 피가 나면 토슈즈 밑바닥에 칠해놔요. 그러면 이것이 악운을 떼어준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신고 공연을 하면 공연이 잘된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고 그러죠.

◇ 내 의지로 그만두더라도 그만두지, 부상 때문에 그만두지는 않겠다

▶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에는 언제 입단한 건가요?

98년도였고, 입단하자마자 파격적인 조건으로 ''''돈키호테''''라는 작품을 했는데, 키트리라는 여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인 플라워 걸(flower girl)역을 맡아 연습을 하던 중에 십자인대파열의 사고를 당했어요.연습 중에 대부분의 무용수들의 십자인대파열을 공중에서 두 다리를 같이 벌린 다음에 한 다리로 착지를 하는 가브리엘이라는 동작을 하다가 당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가브리엘이라는 동작은 발레에서 추방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공중에서 다리를 일자로 벌리고 한번치고서 한 다리로 착지를 하는 건데, 한 다리로 착지를 할 때 그 각도가 앞으로 쏠리거나 뒤로 갈 때 그때 십자인대가 나가는 거죠. 너무나 훌륭한 남자무용수들도 그 동작을 하다가 부상을 당해서 그 커리어가 완전히 끝나는 경우도 너무나 많아요.

저도 솔직히 무용 못할 줄 알았어요. 전후방으로 똑 끊어졌기 때문에..그런데 다행히 뉴욕에서 무릎에 있어서는 가장 권위 있는 의사에게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뉴욕이라는 곳이 예술의 메카이다 보니까 재활훈련 시스템이 너무나 완벽하게 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재활훈련을 성공적으로 할 수가 있었죠.

▶ 치료기간이 얼마나 걸렸어요?

9개월을 목발을 짚고 다녔고, 목발을 짚고 다니면서도 부분적인 재활은 할 수 있었어요. 목발을 떼고 3개월 정도는 아쿠아 체조라든지 자전거타기, 요가, 필라테스 등을 하면서 오히려 무용할 때보다 더 바쁘게 지냈어요.

▶ 치료하는 동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해요. 수술이 성공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저한테 달렸다고 해서 ''''내 의지로 그만두더라도 그만두지 부상 때문에 그만두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 가녀린 몸에서 어떻게 그런 의지가 나올까요...

위기가 닥치면 그런 게 나오는 것 같아요.사실 저는 덤벙대고, 마음도 여리고, 상처도 많이 받고, 어떨 때는 정신 못 차릴 때가 있는데 중대한 위기 같은 때는 그런 게 나오더라고요.

▶ 치료하는 동안 뉴욕에 어머님이 와계셨어요?

어머니가 오시려고 해서 그럴 돈 있으면 차라리 치료비에 보태달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온다고 다리가 빨리 낳는 것도 아니니까 오시지 말라고 했죠. 5년 뒤에 제가 플라워 걸(flower girl)역을 다시 맡게 됐을 때 처음으로 와서 아메리칸 발레시어터를 보셨어요.

▶ 치료비는 개인이 부담하는 건가요?

아메리칸 발레시어터가 너무나도 훌륭한 것이 복지시설이나 보험이 완벽하게 되어 있었어요. 물론 그 외에 자기가 부수적으로 돈을 써가면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데, 보험을 비롯해 일을 못하게 되는 경우는 정부에서 지원을 해줘요.

◇ 크로스오버 속에 자리 잡는 창작발레의 밝은 미래

▶ 1년 동안 치료를 독하게 받고 다시 아메리칸 발레시어터로 돌아간 건가요?

제가 다 나아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줬어요. 그 부분에 있어서 케빈 맥킨지 예술 감독님께 감사한 것이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5년 뒤에 플라워 걸(flower girl)이라는 역할을 맡아 공연을 했을 때, 쉬고 있는 무용수들도 다 와서 제가 공연하는 것을 다 지켜봐 주었어요. 그때 제게 주었던 행운메시지나 카드가 제 분장실 거울을 다 채웠어요.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 시련이 지금의 강예나 씨를 더욱 빛나게 했는데, 좋은 조건을 두고 왜 한국으로 돌아오셨어요.

사람이 때라는 것이 있잖아요. 사실 한 곳에 들어가서 1, 2년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이 무용수가 어떤 무용수다, 저의 가능성을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솔로 배역을 주셨는데, 그 1, 2년을 제가 아픈 모습을 보여주고 그러다 보니까 기회라는 것이 쉽게 오지 않더라고요. 물론 그동안 솔로도 점점 많이 하고 그랬지만 주역을 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쳤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제가 한국에 돌아오기로 결심을 했던 것은 제가 이제까지의 발레인생을 마무리를 잘하고 정리를 잘 해보자 라는 뜻에서였어요.마침 유니버설발레단의 주역 한 사람이 다른 발레단으로 갔기 때문에 제가 들어올 자리가 있어서 문훈숙 단장님이 저를 다시 받아주신 것이죠.

▶ 많은 공연을 하셨는데 특히, 창작극도 많이 하셨잖아요.

춘향전에 춘향도 하고, 고전발레 심청전에 심청도 있고.... 이번에 8월 16일부터 26일까지 유니버설 아트센터에서 하는 발레뮤지컬 ''''심청''''이라는 공연도 합니다.

▶ 창작발레를 해보니까 어떠셨어요?

뉴욕에서도 컨템퍼리(contemporary)하고 크리에이티브(creative)한 작업은 했었으니까 한국에서 그런 작업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너무 아쉬웠는데 다행히 문훈숙 단장님이 그런 것에도 마음을 많이 여시고 후배들에게 창작의 기회를 자꾸 주시는 것이 너무 바람직한 일인 것 같아요. 이런 크로스오버 장르에 크로스오버 되는 이런 작업은 발레를 하는 사람들이 꼭 해야 하는 것 같고요.안 그러면 더 이상 발레가 설 곳이 없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발레라는 게 클래식 발레도 그렇고 로맨틱 발레도 그렇지만 그냥 굉장히 올드-스타일이에요. 그런데 요즘 같은 경우는 할리우드 액션 무비에다가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니 별의 별것이 다 있잖아요.그러니까 발레만 가지고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죠.

▶ 우리의 창작발레를 가지고 해외에 나가면 평이 어떤가요?

우리가 춘향, 발레뮤지컬 심청은 올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직 해외로 가져가지는 않았지만 기존에 있던 클래식 레퍼토리 ''''심청''''을 가져가면 오히려 저희가 ''''백조의 호수''''나 ''''지젤''''을 할 때보다 기립박수가 더 많이 나오고 다 눈물의 도가니로 만들어 주는 효자작품이 되었어요.

우리가 클래식 ''''심청''''을 22년간 했는데 항상 가면 사람들이 더 보고 싶어 하는 작품이고 또, 외국 같은 경우는 주 주제가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인데 이 효녀 심청은 아버지와 딸의 효성에 관한 이야기잖아요.분명히 외국에도 자식과 부모 간의 사랑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공감을 하고 감동을 받는 거죠.

▶ 15살에 영국에 가서 미국, 러시아를 왔다 갔다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을 잘하세요?

완벽하지는 않고 이번에 방송 일을 새로 시작하면서 발음이 이렇게 안 좋았구나 하고 느끼는데, 사실 어머님의 역할이 컸죠. 제가 외국에 나갔다가 방학 때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발음이 이상하다고 저희 엄마가 신문지 가지고 와서 읽어보라고 시키고 그러셨어요. 어머님이 교육자이시다 보니까 ''''너는 발레 하는 모든 사람을 대변한다, 무용하는 사람들이 무식해 보이면 좋겠냐? 책임감을 가져라''''... 그러셨어요.

◇ 대중과 문화계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역할을 하고 싶어

▶ 발레가 아닌 다른 일, 방송을 시작하셨는데 적성에 맞던가요?

의외로 적성이 잘 맞는 것 같아요. 발레 이외의 다른 분야에 대한 호기심도 많고, 인간적인 호기심도 많기 때문에 저는 어떤 분을 처음 소개를 받게 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인터뷰 수준으로 질문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그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서 너무 좋아요.

▶ 드라마 같은 것은 할 생각이 없나요?

예전에 시트콤 섭외를 한 번 받은 적이 있었어요. ''''안녕 프란체스카'''' 작가 팀들이 다음에 하는 시트콤 프로그램이 있는데 ''''강예나 씨 자체로 하는 카메오 출연을 해 달라''''고 했었어요. 그때 장광효 선생님이 카메오로 출연하면서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으셨잖아요. 그래서 심각하게 생각을 해보다가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아서 거절했어요.

▶ 시기상조라는 것은 앞으로 할 수도 있다는 거네요.

제가 발레단에 민폐가 안 되고, 많은 무용하는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면 발레를 대중화시키는데 일등공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결혼을 한다면 어떤 남자와 하고 싶으세요?

일단 자기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발레나 무용계는 아니었으면 좋겠고요. (웃음) 오히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가 무대 밖을 나왔을 때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아이를 낳으면 발레를 시킬 건가요?

절대 아니죠. (웃음) 그것은 발레를 직접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모든 짜증과 그런 것을 다 받아줘야 하고, 그러면서도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해요. 발레 맘은 아이가 스스로 클 수 있게 여백을 남겨줘야 하는데 엄마들이 하기에 그 부분이 가장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많이 다퉜고 충돌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어머님도 예술을 하시는 분이셔서 엄마가 아닌 스승으로 이야기를 하시기 때문에 집에 와도 쉰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반면, 아버님은 자유롭게 놔두셔서 어느 정도 밸런스가 맞았죠.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제가 무대를 떠나면 일단 고정적으로 방송매체나 이런 것을 통해서 대중과 문화계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역할을 하고 싶고, 그러면서 제 인지도가 쌓이면 그 인지도를 이용해서 어려운 발레나 예술계 사람들을 후원하는 그런 것도 좀 하고 싶어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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