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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동 철거민 현장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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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계동 철거민 현장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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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독립영화 김동원 감독

    김동원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김동원 감독은 지난 87년, 한국에서는 최초로 비제도권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독립영화인으로 현재 푸른 영상의 대표이며 한국독립영화협회의 대표를 지냈습니다.

    그가 세상에 처음 내놓은 작품인 <상계동 올림픽>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둔 도시 재개발 사업으로 대책 없이 쫓겨난 상계동 주민들의 기나긴 3년간의 싸움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물이었습니다.

    그의 작품 중에 6.10 항쟁의 치열했던 명동 성당 농성을 다룬 <명성, 그 6일의 기록> 과 <상계동 올림픽>은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됐고 <명성, 그 6일의 기록>으로는 지난 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운파상을 수상했습니다.

    또, 10여 년 동안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가까운 거리에서 포착한 작품 <송환>은 독립 다큐멘터리로서는 드물게 극장에서 상영됐고 6만 명이라는 관객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선댄스영화제에서 2004년에 표현의 자유상을 받았습니다.

    별 고민 없이 영화감독의 부푼 꿈을 키우던 한 청년이 우연히 상계동 철거현장에 들어가 운동권이 되고 ''다큐''라는 걸 찍기 시작하고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무기임을 믿기 시작하면서 뜨거운 가슴으로 차가운 카메라로 세상과 사람을 기록하고 있는 독립영화 김동원 감독을 7월 3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끝나지 않은 상계동 올림픽 20년사

    ▶ 독립영화와 일반영화는 어떻게 다른가요?

    얘기가 좀 복잡한데 80년대에는 검열제도가 있었잖아요. 검열을 받지 않은 영화는 무조건 불법영화이고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당하는 그런 시절이었죠. 그때 검열을 받지 않은 영화를 독립영화라고 불렀어요.

    ▶ 검열을 받지 못하면 상영을 못 할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래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대학 내라든지 교회라든지...

    ▶ ''''금서''''를 보는 것처럼... (웃음) 한 시절, 금서라고 하면 괜히 흥분돼서 봤던 기억이 있는데 만들지 말라는 영화를 만들었으니 운동권이 맞으시네요. (웃음)

    사실 만들지 말아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웃음)독립영화를 했다더라, 비전향 장기수 영화를 찍었다더라... 하는 것들이 사람들에게 제가 용감한 운동권이라는 선입견을 주나 봐요. 하지만 저는 그냥 이웃집 아저씨처럼 평범한 사람입니다.

    ▶ 최근에 ''''상계동 올림픽 20년 후''''를 찍기 시작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동안 꾸준히 상계동 주민들을 틈틈이 만나면서 그분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때 기억을 어떻게 간직하고 있는지... 또, 저 스스로도 그때 상계동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정리를 해야겠다 하는 생각에 몇 년 전부터 하려고 하다가 계속 못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약간의 제작지원을 받게 되어서 착수를 했습니다.

    ▶ 지금도 계속 연락하세요?

    그럼요. 그분들이 나이가 다 드셨고 그 당시 학생이던 어린 꼬마들은 벌써 시집, 장가를 가고, 사회에도 진출했는데 결혼식, 장례식에도 가고 1년에 한 번씩 송년회 비슷하게 모이기도 합니다.오늘도 여름이라 돼지 한 마리 잡았다고 오라는 연락이 왔어요. (웃음)

    ▶ 영화가 나오면 궁금함이 풀리겠지만 20년 전의 상계동 철거민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여쭤보고 싶었어요.

    상계동에서 쫓겨나 완전히 철거당한 후에 명동성당에 텐트를 치고 한 80여 세대가 살았었죠. 그중에 절반은 남양주로 집단이주를 했고, 나머지 40세대가 부천으로 가서 좀 나뉘어 졌어요. 저는 부천에 계시는 분들과 같이 행동했는데 좀 안 좋은 얘기지만 나중에 내부분열이 생겼어요.서울시와 건설회사와 천주교 쪽에서 돈을 보태고, 시민들의 성금으로 땅을 샀는데 그 땅이 살 때는 평당 30만 원이었는데 1년 후에 2백만 원 이상으로 올랐어요. 그러다 보니 욕심이 좀 생기고 또, 그 땅을 공동명의로 관리를 했어야 하는데 개인 명의로 쪼개는 바람에 자기 지분을 팔고 떠나시는 분들이 많아지고 그랬죠. 그래도 사실은 그 주변에 다 계세요. 땅을 판 돈으로 연립이나 빌라를 하나 얻어서 그 근방에 모여계시죠.

    ◇ 하루 사이에 맞본 천당과 지옥의 도시

    ▶ 30만 원짜리 땅이 240, 250만 원으로 오르면 사람이 30만 원짜리 땅을 샀던 그 마음 그대로 있기는 아무래도 어렵겠죠.혹시, 그중에는 부자가 되신 분들도 있겠네요?

    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리를 잡으신 분들이 꽤 많아요. 그러나 반대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신 분들도 있죠.

    ▶ 굉장히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그 영화는 언제쯤 완성이 되나요?

    특별한 사건이나 제작기간이 없기 때문에 저하기 나름인데 한 1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그런데 하다 보면 또, 다른 작품도 하게 되고... 그래서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쑥스럽네요. (웃음)

    ▶ 지금 학교에 출강하시죠?

    이번 학기부터 한국 예술종합학교에 전임으로 출강하고 있는데 제작이나 이론, 역사, 미디어 교육에 관련된 과목 등 다큐멘터리와 관련된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보니까 어떠세요? 현장에 있을 때와는 다른 어떤 게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아무래도 현장체질인 것 같아요. (웃음)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자체는 사실 다큐멘터리가 현장과 관계가 있으니까 재미있는데 그 외에 행정 일도 봐야 하고 새로 공부해야 하는 것이 많아서 힘들기도 합니다.

    ▶ 처음 상계동에 들어가신 배경이 궁금합니다.

    1986년에 처음 들어갔어요. 제가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커뮤니케이션센터에서 제작을 돕고 있었는데 신부님이 하루만 가서 촬영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셨어요. 강제철거가 심해서 가재도구가 파손된 것도 많고 해서 나중에 법정 증거자료로 쓸 수도 있다고 촬영을 의뢰해서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철거를 목격하게 됐어요.

    무엇보다도 포클레인의 굉음이 한 대도 아니고 열대가 와서 그러면 정신이 하나도 없거든요. 대낮이라 아저씨들은 대게들 일을 나가고 아기를 업은 아주머니들과 할머님들이 용역회사직원들과 싸우는데 싸움이 안 되죠. 주민들은 포클레인을 멈추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아주머니들이 포클레인 밑에 눕기도 하고 그래요. 그러면 용역회사 직원들이 사지를 들고 전경들의 닭장차에 실어 나르고 전경들은 2,3㎞ 떨어진 아무 곳에나 버려두고 오죠. 그러면 아주머니들이 또, 막 달려오는 거예요.

    그런 고함소리, 욕지거리, 포클레인 소리를 들으면서 그런 일이 대낮에 서울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정말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어요. 제가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구조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이 되더라고요.철거현장의 폭력성이라는 것이 저를 무섭게도 하고 화나게도 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 저녁에 철거단들이 떠나고 나면 주민들이 남아서 매일 기도회를 했어요. 정일우 신부님이 같이 사셨는데 기도회를 하면 속에 있는 이야기들이 다 쏟아져 나오죠. 어떤 아저씨는 눈물, 콧물을 다 쏟아내면서 분함을 호소하더라고요.

    제가 기도를 열심히 해보지는 않았지만 저런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떤 기도를 듣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기도회가 끝나면 라면을 한 솥 끓여서 나눠 먹고 소주잔도 기울이면서 노래도 하고... 그런 것들이 마치 천당과 지옥이 공존하는 것 같았어요. 하루 사이에요.그런데 신부님이 며칠 머물지 않겠느냐는 부탁도 하셨고 저도 밤에 나오는 것이 빠져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하루 이틀만 더 머물자 했던 것이 3년이 되고, 5년이 되고 그랬습니다. 나중에는 거의 식구처럼 됐죠.

    ◇ 세상과 사람을 다시 보게 만든 상계동의 일상

    ▶ 철거할 때까지 얼마나 걸린 건가요?

    86년 초에 시작한 철거가 완전히 끝난 것은 87년 4월이에요. 그리고는 명동성당에서 천막치고 1년을 살고 88년에 부천으로 갔죠. 가서도 성화 봉송로라고 해서 집을 못 짓고 3년 동안 있었어요. 몇 세대 안 남았지만 올림픽 끝난 다음에 착수를 해서 91년이 되어서야 집을 지을 수가 있었죠.

    ▶ 명동성당에서도 같이 생활을 하시면서 철거하는 모습들을 사진에 담으셨는데 철거반원들이 못 찍게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나요?

    당연히 못 찍게 하죠.그런데 제가 원래는 소심한 편인데 이상하게 철거현장에서 촬영할 때는 겁이 없어져요. (웃음) 신이 나더라고요.철거용역들이 카메라를 향해서 돌을 던지기도 하고 와서 뺏기도 하는데 그러면 저도 맞서고, 또 한편으로는 주민들이 저를 보호해주시기도 했고요.

    ▶ 나중에 철거민들이 영화도 보셨을 텐데 반응이 어떠셨나요?

    싱겁다고 하시더군요. (웃음)제가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일부고 다큐멘터리를 찍다 보면 당사자들에게 그것밖에 못 하냐는 얘기를 많이 들어요.

    ▶ 보시고 같이 우셨을 줄 알았더니 의외네요.

    물론 그런 분도 계시지만 주민들마다 반응들은 다 다르세요. 제일 기억나는 반응들은 ''''그거 왜 안 찍었어?''''하는 건데 아쉬움은 언제나 있죠.

    ▶ 그런 작업들을 하면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많이 보셨을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상계동에서 세상을 다시 배웠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세상뿐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되는 시간들이었고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과 저도 몰랐던 제 안의 잠재력과 힘이 분출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은 닥치면 뭔가를 반응할 수 있구나 하고 알게 되었죠. 또, 하루하루를 긴장상태에서 살았으니까 잘된 일이라고 안심을 할 때 뭔가 꼭 좋지 않은 일도 생긴다는 그런 것들에 민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상계동 생활이 김동원 감독님의 생각과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 건가요?

    사실은 완전히 바꿨다고 봐야죠.그전에는 저도 상업영화의 조감독 생활을 했었거든요. 첫 번째로 이장호 감독님, 그리고 정지영 감독님, 하명중 감독님, 장선우 감독님... 그러고 보니 많이 거쳤네요. (웃음)

    장선우의 감독님의 ''''서울 예수''''라는 작품이 끝나고 나서 아르바이트 식으로 서강대에서 일하고 있을 무렵인데 저는 스필버그가 최고인 줄 알았기 때문에 한국의 스필버그가 꿈이었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지, 공부를 더 해야 하지 않나, 여러 가지 생각과 고민들이 있었는데 상계동에 들어가면서 그런 것들이 배부른 생각들이었는지... 저에게는 꽤 심각한 고민이었지만 어떻게 해소됐는지 모를 정도로 편안해 졌어요.

    그 당시 제가 홈비디오로 웨딩촬영을 하면서 용돈을 벌고 있었는데 그걸로 ''''상계동 올림픽''''을 찍은 거죠.저는 상업영화를 한다고 생각해서 카메라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고, 다큐멘터리도, 독립영화도 몰랐어요.

    그런데 사람들에게 촬영한 것을 보여주니까 주변에서 ''''그것이, 네가 하는 것이 독립영화고 다큐멘터리다. 그런데 상업영화는 많이들 하니까 한번 해봐라.'''' 권유를 했어요.그때는 그냥 그랬는데 나중에 생각해보고 다큐멘터리 공부를 해 보니까 이것이 할 만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우리나라는 다큐멘터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리한 조건들이 많아요.

    ◇ 나는 내 양심으로 만든 작품의 검열을 거부한다

    ▶ 소재가 많아서 그런가요?

    지금도 여러 가지 모순들이 응집되어있는 분단의 문제, 첨예한 이념 대립, 빈부격차... 이런 것들이 소재가 많다기보다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하죠. 그러다 보니까 다른 생각을 못하고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지요.

    ▶ 여러 가지 다큐멘터리를 하셨는데 그다음 작품이 ''''송환''''인가요?

    내세울 만한 작품은 없지만 이것저것 많이 했어요. ''''명성, 그 6일의 기록''''이라고 87년 6월 항쟁에 관해서 10년 후에 돌이켜보는 그런 작품을 하나 했었고, 저는 주로 제작비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의뢰를 받아서 약간의 교육적인 목적이 가미된 그런 작품을 많이 하게 됐는데 제가 의뢰받지 않고 순전히 제 생각으로 진행한 것은 처음에 ''''상계동 올림픽''''하고 ''''명성, 그 6일의 기록''''과 ''''송환'''', 이 세 작품밖에 없습니다.나머지는 수익사업이었어요. 그 수익사업으로 돈을 벌어서 하고 싶은 작품을 해야만 하는 거죠. 2000년 초부터는 제작 지원제도라는 것이 생겼지만 그전에는 오히려 하면 잡아가던 시절이니까요. (웃음)

    ▶ 잡혀가기도 하셨어요?

    한 세 번쯤 잡혀갔었어요. 98년에 영화법 위헌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그 법에 의하면 모든 카메라를 만지는 사람들은 업자이고 등록을 해야만 했는데 카메라가 몇 대 이상, 스튜디오가 몇 평 이상... 그런 시설을 갖추어야만 등록을 할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등록이 아니라 허가제였죠.

    법에 의하면 등록을 하지 않으면 개인이 한 것은 결혼식 비디오도 잡혀갈 수 있는 소지가 있었어요. 대중 앞에서 상영을 하면 안 된다는 거죠. 저는 검열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입장이었어요. 제 양심으로 만든 작품을 검열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고 사실, 검열이라는 것이 음란물을 단속한다는 취지였지만 실제로는 약간 반정부적인 영화를 만든 감독을 통제하기 위해서 기능을 했거든요.

    ''''송환''''을 제작하는 그 시절에 세 번쯤, 제가 비전향장기수를 촬영한다는 정보들이 새서 93년에 남영동에 끌려간 적이 있었고, 96년에도 압수수색을 당한 적이 있고, 그 후로 98년 초 정권이 바뀌기 전에 잡혀갔었어요.

    ▶ 어머님이 의사셨고 굉장히 유복하게 자라셨는데 ''''원 없이 나는 놀아봤다.''''는 이야기도 하셨어요. 그 놀아 봤다는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요? (웃음)

    (웃음) 놀았다는 의미는 마침 제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시험이 없어졌어요. 그때부터 기타를 만지기 시작하고 음악에 빠져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밴드, 보컬도 만들었어요. 그것도 불법이었는데 걸려서 많이 혼나고 그랬죠. 그것뿐만이 아니라 그때나 지금이나 약간 불량 끼 있는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습니다. (웃음)

    ▶ 그래도 공부 잘하고 음악도 잘하던 그런 아들이 갑자기 상계동에 들어가겠다고 하고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 걱정이 많았겠어요.

    그때가 좀 무서운 시대라 어머님이 상계동까지 오셔서 울면서 저를 데려가려고도 하셨는데 서른이 넘은 나이라 이미 안 갈 것이라는 것은 알고 오셨죠. 그런데 나중에 ''''네가 하는 일이 좋은 거라는 것은 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내 아들이냐...''''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 형제의 맏이로, 장남으로, 부모님 기대가 얼마나 컸겠어요.

    그런데 제가 기대를 번번이 어그러트렸기 때문에... (웃음) 영화를 한다는 것 자체도 그렇고요. 어떻게 보면 상업영화를 하는 것보다 독립영화를 한 것이 차라리 더 효도를 한 것이 아닌가도 싶어요. 왜냐하면 상업영화는 잘못하면 큰돈을 쓸 수도 있고, 어머님이 영화를 하는데 조건을 붙이신 것 중에 하나가 ''''여배우와 결혼하지 않는다.''''였거든요. (웃음) 그때만 해도 영화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안 좋아서요.허락을 받는데 상당히 힘들었어요. 허락을 받지 않아도 했겠지만 집의 돈으로 영화 하지 않는다는 몇 가지 조건에 저는 얼씨구나 하면서 각서까지도 썼어요. (웃음)

    김동원

     


    ◇ 원 없이 놀아봤으니 원 없이 담고 싶은 세상

    ▶ 아내는 어떤 분이세요?

    상계동에서 만난 운동권 주변에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어요.

    ▶ 집에서 영화배우 만나지 말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웬 빈민운동 하는 아가씨냐면서 혹시 반대하지는 않으셨나요? (웃음)

    그런 것은 없었어요. 제가 워낙 결혼을 늦게 해서 무조건 찬성하셨어요.

    ▶ 결혼하시고는 아내와 늘 뜻이 맞았겠어요.

    기본적인 가치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일치를 했지만 아이들을 낳고 키우다 보면 조그만 것, 예를 들어 아이 신발은 어떤 것을 신길 것인지, 외식을 할 것 인지 말 것인지... 이런 것들에서 많이 부딪치죠. (웃음)

    ▶ 고(故) 제정구 의원도 빈민운동을 하시는 굉장히 훌륭한 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분은 부인에게 빈민운동을 하는 사람이 갖춰놓고 살면 안 된다고 물컵도 세트로 사지 말라고 하신다는 말을 들었어요. 두 분의 삶도 혹시 그러신가요?

    제정구 선생님은 굉장히 그런 것에 원칙적이셨고 그것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도 들었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원칙적이지 못했어요.원칙이라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다는 생각도 많이 하는데 요즘에는 제가 오히려 집사람에게 입 조심을 하고 있습니다. (웃음)

    ▶ 어떤 분들은 김동원 감독님이 다큐멘터리감독이냐, 빈민운동가냐... 하는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실은 저도 헷갈린 적이 많았어요. 특히, 제가 봉천동에 살면서 철거문제에 직접개입하고 그럴 때는 촬영을 해야 하는 건지, 철거운동을 열심히 해야 하는 건지... 그러다가 그때는 카메라를 들지 않고 세입자대책위원회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저 자신에게 빈민운동가라는 것을 확인시켰죠.

    그런데 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저는 다시 ''''푸른 영상''''의 일원으로서 활동을 하죠. 두 가지가 어떨 때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 같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올해는 이 일을 하고 내년에는 다른 일을 하고... 그런 식으로 두 가지를 해왔던 것 같아요. 지금은 빈민운동하고는 거리가 멀어진 것 같아요. 서울시내에는 더 이상 산동네가 없잖아요.

    ▶ ''''송환''''을 10년 동안 찍으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계기로 찍게 되셨나요?우선 내용소개를 간단히 해주시겠어요.

    92년 초에 제가 봉천동에 신혼살림을 차렸을 때 저희 동네로 비전향 장기수 두 분이 이사를 오셨어요. 그때 70세 이상 된 장기수들을 출소를 시켰는데 이분들이 갈 곳이 없으니까 동네에 사시던 성공회 신부님이 보증을 서서 데려오셨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고 틈틈이 촬영을 해두게 되었는데 그때는 송환이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전혀 상상을 못 할 때였죠. 그러다 2000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하면서 김정일 위원장이 아마 송환을 조건으로 걸었나 봐요. 그러면서 갑작스럽게 물꼬가 트여서 2000년 9월 2일에 63분이 북송되셨죠.

    그 과정을 촬영한 것인데 본격적으로 촬영을 한 것은 2000년 초부터 9월 2일 갈 때까지의 과정이고 그전에는 제가 틈틈이 찍어놨던 거예요. 영화사에서는 뭔가 홍보를 하려다 보니 ''''10년 동안의 기록''''이라는 말을 만들었지만 집중해서 찍은 것은 1년 정도고 그분들을 만난 것은 십 년이 된 거죠.

    ◇ 고통과 고문을 통에 생긴 마음의 굳은살

    ▶ 가까이서 보시니까 비전향 장기수 분들은 어떤 분들이셨어요? 그중에 한 분은 아주 아버님처럼 모셨다고 들었어요.

    저희 집에 자주 놀러 오시고 저희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셨어요.저는 2001년에 평양을 못 갔지만 나중에 취재하러 다녀온 분의 이야기가 그분이 저를 아들처럼 생각했었다고 말씀을 하세요. 어떻게 보면 그 말씀이 이 영화를 완성하게 해 주었어요.그때는 영화를 끝내지 못할 것 같다는 절망감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끝낼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비전향 장기수에 대해 완고하다거나 무섭다거나 하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데 간첩들도 여러 가지 갈래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정치공작을 하러 내려오신 분은 언변이 좋고 신념이 투철한 인텔리전트한 분들이 많고, 연락선 선원들의 경우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으시고 무지랭이 같은 분들도 많아요.

    그 외에도 조작 간첩사건에 연루된 사람들도 있고 많은데 너무 많은 상이 있어서 간단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결론적으로 드는 생각은 그 사람들이나 저나 똑같다는 겁니다. ''''내가 만약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굴욕을 겪고 해방의 환희를 맛볼 찰나에 다시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군의 지배를 받아야 됐을 때 나도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그분들이 몇 십 년 동안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전향을 하지 않고 버텨준 그 힘이 뭘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고 저에게는 그것이 영화 속에서도 일종의 주제였어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빨갱이들은 그렇게 다 지독하다는 사람도 있고, 북에 남겨둔 가족 때문에 못했을 거라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로 남쪽에 가족을 둔 사람들도 있거든요. 논리대로라면 그분들도 전향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죠.

    여러 가지 이유가 혼재되어 있을 거라고 보는데 저는 오히려 고문이 이분들을 전향하지 못하게 했다고 생각해요. 그분들이 ''''나보다 못한 사람이 나를 고문하는데 내가 어떻게 꿇을 수가 있느냐...''''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 자존심... 오기였나 봐요. 차라리 인간적으로 회유를 했더라면...

    오히려 논리적으로 설득을 했더라면 전향을 더 많이 했을 거라는 생각도 해보는데 71년에 유학생 간첩단으로 체포되었다가 전향을 거부해서 17년간을 복역하고 비전향 장기수 석방 1호로 나와 지금은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서준식 씨는 어떤 고비가 있는데 그 고비를 넘기면 고통을 잘 못 느낀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어디가 많이 아팠는데 더 아픈 데가 생기면 그전의 아픔은 잘 못 느끼잖아요.

    전향공작이라는 것이 70년대 이후부터 굉장히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었고 사실, 70% 이상이 전향을 했다고 그래요. 전향했거나 전향공작 도중에 병사하거나 하면서요.제가 내린 결론이 꼭 맞는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6월 항쟁 때 닭장차를 타게 되면서 느낀 것이 처음에 닭장차에 끌려가기 전까지는 굉장히 겁이나요. 그런데 끌려가서 백골단들이 막 때리면 그다음부터는 오히려 시원해지고 닭장차에서 풀려나서 내려오면 다시는 저기 가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적개심, 증오심 같은 것이 생겨요.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장기수들의 고문과 비유하기가 어렵겠지만 오히려 고문을 통해서 단련되고 옆의 동료가 고문당해서 들어오면 공포가 생기기보다는 분노가 생기고... 그런 세월이 하루하루 지나서 30년도 되고, 40년도 되고... ▶ 송환 후에는 잘살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저도 직접 뵙지는 못하고 얘기만 들었는데 아주 잘 사신다고 해요. 어떻게 보면 너무 잘사셔서 심심하시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웃음)

    ▶ 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가서 그 후의 삶을 찍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몇 년 전부터 시도를 하고 있는데 북에서 허가를 받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서 3년 전부터 계속 부탁하고 알아보고 있는데 쉽지 않습니다.

    ▶ 자녀가 몇이세요?

    큰애가 아들인데 고등학교 2학년이고 밑으로 딸 둘이 있습니다.

    ◇ 블랙 코미디 같은 다큐멘터리 만들기

    ▶ ''''민기 아버지''''라 불렸다고 들었는데 지금 민기가 몇 살이에요?

    상계동에서 얻은 별명인데 사실 제 자식 중에 민기라는 아이는 없어요. 그때는 좀 가명을 많이 썼고 사실, 제가 지은 것이 아니라 정일우 신부님이 주민들과 친해지라고 민중의 기둥이라는 좋은 뜻으로 지어주셨어요.

    ▶ 그때는 결혼도 안 했을 때라 총각인데도 그렇게 불리셨네요. (웃음) 그렇게 좋은 이름을 아들 이름으로 짓지 그러셨어요?

    저는 그러고 싶었는데 돌림자가 달라서... (웃음)

    ▶ 아들이 아빠처럼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다큐멘터리는 돈이 안 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웃음) 그런데 이상하게 방송이나 영화 쪽에 관심이 많아요.

    ▶ 만약에 영화를 찍는다면 코미디 영화를 찍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대학교 때는 거의 연극반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때 주로 하던 것이 코미디였어요. 사실 제가 배우의 꿈도 꿨었는데 성량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배우로서는 부적격 판단을 받았고 그다음부터는 연출을 했는데 주로 코미디를 많이 했어요.저는 코미디가 좋아요. 보통은 안 어울린다고 생각을 하는데 다큐멘터리도 사실은 유머감각이 좀 있어야 해요. 이 시대의 관객들한테 어필하기 위해서는 소극(笑劇 : Farce, 익살광대극, 희극)같은 큰 웃음은 아니겠지만 오히려 블랙코미디(black comedy) 같은 그런 감각들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요구되는 것 같아요.

    ▶ 지금 계획하시는 작품이나 일이 있으신가요?

    일본군 강제위안부 할머니들에 관한 작품을 시급히 해야 하는 실정인데 이것은 우리나라 문제만이 아니잖아요. 저도 이번에 조사과정에서 알았지만 12개국에 걸쳐서 20여만 명의 피해자가 있는데도 국제사회에서는 일본의 논리가 폭넓게 수용되고 있고 또, 일본이 로비를 많이 하고 있어요. 국가의 사죄와 보상을 바라는 것인데 민간기금으로 조성된 것을 할머니들이 받을 수는 없잖아요.

    이 문제를 우리나라 문제로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 시청자들을 위한, 국제적인 문제로써 일본군 강제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어야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지난 6월 28일 미국 하원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되면서 20년 가까이 일본군 강제위안부 운동을 해 오신 분들보다 더 큰 이슈를 만들었는데 이 운동을 하시는 분들도 그렇고 지금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는 말씀을 하셔서 마음이 조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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