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오니 한국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음식이 먹고 싶을 때가 많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시루떡인데 시루떡에 고명으로 올리는 팥은 영어로 적절한 말이 없는 것 같다.
억지로 번역한 것이 ''''red bean''''인데 이거 미국인들은 무슨 말인지 전혀 짐작도 못한다. 그런데, 어느날 시장에 가니 우리 팥과 똑 같은 것이 있다. 무엇인지 이름을 물어보니 ''''blacked eyed pea''''라고 말한다. 콩이라도 여기서는 곡물이 아닌 야채로 먹는 완두콩을 ''''green pea''''라고 하는데 아마 팥의 눈부분이 유난히 검다보니 붙은 말 같다.
동화 속 콩쥐와 팥쥐의 성격이 정 반대인 것처럼 우리 조상들은 콩과 팥을 아예 다른 단어로 분류해 지칭했다. 우리처럼 팥을 많이 먹는 문화인 일본에서 콩은 ''''大豆'''' 팥은 ''''小豆''''로만 분류한다.
다만, 이 팥이 식탁에 오를 음식재료가 되면 독특한 고유의 이름이 생긴다. 우리가 예전에 단팥빵의 안에 있던 달콤한 소를 ''''앙코''''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일본어다. 일본어의 ''''앙코''''는 단팥을 지칭하는 말로 우리말 달다와 팥이 결합하는 단순한 만남은 아니다.
고기요리가 발달한 서양에서는 소, 돼지, 양 외에 사슴고기도 자주 식탁에 오른다. 내가 사는 지역은 사슴이 너무 많아 고민인 지역인데 사슴고기는 deer meat이 아니라 venison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자연물 가운데 식탁에 오르는 음식재료도 각 문화권 별로 먹는 것 먹지 않는 것에 대한 명칭이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데 인간이 만든 법률이나 관행 같은 것은 더 많은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각 문화권별로 평소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투나 한 단어에 대한 정의도 사람의 성격이나 문화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이다.
필자를 비롯해 해외에 거주하는 재외국민 가운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어떤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을 뿐이다. 최근 밝혀진 중국대사관 여직원사건이나 국제마약조직원으로 몰려 프랑스령 대서양 외딴 섬에서 2년이나 감옥살이를 한 주부의 예처럼 우리 공관은 국민들 특히 외국에 나가 사는 국민들에게까지 권의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정작 도움이 필요한 국민에게는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대해 기분이 상할 때가 많다.
그럼 미국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나? 우리의 경우 이렇게 월급만 받아먹고 일하지 않는 대사관 영사관직원을 배임 내지 업무태만(negligence)파로 분류하는데 미국에서는 엄연히 부정부패(corruption)죄로 다스린다.
미국 테네시주에서 운전면허를 신청했는데 면허가 나오지 않아 해당부서에 가 보니 정작 내가 이미 제출했던 서류를 내지 않았다고 우긴다. 서류가 빠져서 업무처리가 늦었다는 변명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미국인 친구는 ''''외부에서 우리 테네시주를 아주 깡촌으로 보는데 그게 다 공무원이 부패해서 그래. 창피하다''''라고 말한다.
''''그건 부패가 아니라 게으른 것 아냐? 아니면 업무실수거나'''' 이런 말에 친구는 ''''우리는 모두 납세자(tax-payer)이고 그 사람들 월급은 모두 우리 주머니에서 나오는 세금''''이라며 ''''너도 테네시주에 거주하면 이런 게으른 공무원을 세금도둑놈으로 봐야 한다''''고 가르친다.
같은 현상을 보고도 업무태만과 부패로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법이나 정부, 국민의 권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 사건이다.
사실 ''''negligence''''라는 단어는 주로 교통사고현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운전부주의를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인데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국대사관을 한 10년 전에 찾아간 적이 있었다. 잘 아는 한국 학생이 그만 운전을 하다가 우리와는 운전대가 반대방향인 아일랜드에서 중앙선을 넘고 말았다.
당시 경찰이 어린 학생을 너무 몰아붙이는 것 같아 대사관을 찾아갔는데 경찰조서를 하나 하나 읽으며 서기관이라는 사람이 ''''여기 당신 태만이라고 써 있네. 당신이 잘못 한 것을 왜 우리에게 들고 와?''''라며 면박을 준 기억이 난다.
※ 이서규 통신원은 영어, 독일어, 에스파냐어, 이탈리아어, 일본어 등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한국 토박이로, <교과서를 덮으면 외국어가 춤춘다>의 저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