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낭만적이고 학구적이었던 여행가 유홍준은 어느 날 문화재청장이 되고, 이후 문화재청의 이런저런 일들은 그의 글만큼이나 번쩍번쩍 빛났다.
''문화유산답사기''로 전 국민의 여행습관을 바꿔버린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유홍준 문화재청장- 서울 토박이시죠?네. 할아버지 때부터 서울에서 살았어요. 청운 초등학교를 나왔고요. 효자동 쪽이 제 영역이었어요. 천연기념물이었던 백석나무가 있던 곳에서 술래잡기를 했어요.
-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요?아버지는 관광공사 전신인 국제관광공사 직원이었고, 나중엔 반도호텔, 조선호텔, 워커힐 영사과장 하셨어요. 어머니는 경기도 포천의 시골 처녀였는데, 당시 정신대 차출이 있어서 서울에 있는 아버지한테 얼른 시집오셨대요.
- 어릴 때부터 여행과 인연이 있었나요?제가 기계유씨인데요. 우리집안에서 유길준 선생이 서유견문록이라는 유명한 기행문 쓰셨어요. 그분은 서양 걸 썼고, 100년 뒤에 저는 한국 걸 쓴 셈이죠.
- 어렸을 땐 어떤 아이였나요?특별히 뛰어난 건 없었고, 개구쟁이였어요. 다만 그때도 사람들이 모이면 얘기는 무척 잘했대요.
- 서울대 미학과 3학년 때 3선개헌 반대에 참여했다가 무기정학을 당하셨죠? 7월에 데모를 한 번 했어요. 그때 예비단속에 걸려서 무기정학을 받았어요. 본격적으로 데모가 이뤄지기 전에 5명을 처벌하는데 끼어들어서 처벌된 거예요.
- 이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7년형을 받으셨는데요?74년 1월에 군대에서 제대하고, 한 학기가 남아서 한 달 뒤에 복학했어요. 근데 3월 15일에 붙잡혀갔어요. 제대하고 두 달 만에 감옥에 간 거죠.
- 왜 연루되셨나요?유인태, 이철, 서경석 등 3선개헌을 반대한 사람들이 복학하면서 전국민주청년총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유신헌법 반대 성명서를 내자고 했던 게 민청학련 사건이 됐어요. 그러니까 본질도 없어요. 민청학련은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성명서에 이름을 같이 한 거예요. 그들이 다 주모자가 됐고, 저는 그들과 친구라는 게 죄목이었어요. 제 조서 중엔 ''유홍준 제대 축하 기념을 빙자하여 30여명이 모여서 이렇게 됐다''는 게 주된 요지였어요.
- 언제부터 미술사에 빠지셨나요?69년 4월 18일에 풍자극을 하고서 수배 비슷하게 돼버렸는데요. 당시엔 36계가 대통령 백보다 낫다고 했어요. 그래서 현재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인 최재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인 서중석과 함께 단양 문경새재 쪽으로 기차를 타고 도망갔어요. 그때 아세아 잡지라는 진보성향의 잡지를 들고 갔는데요. 그 잡지에서 이동주 선생이 연재하던 우리나라의 옛그림을 보게 됐어요. 저는 그동안 미술사라고 하면 서양미술사만 생각했는데, 그 잡지를 읽고 한국미술사도 서양미술사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음먹고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려는데, 무기정학을 받았고 감옥에 가게 됐어요. 하지만 감옥 안에서도 미술사 공부를 했어요. 제가 감옥에서 미술사 책을 읽으니까 같이 있던 절도범이 "출소하면 나랑 동업하자. 내가 가는 집마다 그림이 걸려있는데, 나는 뭐가 비싼 건지 몰라서 못 갖고 온다"고 하더라고요.(웃음)
- 군대에서 휴가 나올 때마다 박물관을 찾아다니셨다고요? 책에 나온 유물들을 확인하려고 갔죠. 미술의 감동은 작품에서 나오지, 책에서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도판을 보고 얘기하는 건 다이제스트라든가 인터넷에 요약된 내용을 읽고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박물관이 좋은 게 돈이 안 들거든요. 한 번 들어가면 하루 종일 죽치고 있어도 되죠.
- 사모님도 박물관에서 만나셨다고요?괜찮은 여자가 지나가기에 말을 건넸다가 함께 살게 됐어요.
- 사모님이 결혼 전에 옥바라지부터 하셨죠?연애하다가 제대하고 2개월 만에 감옥에 들어갔으니까요. 근데 그 당시엔 면회도 안됐어요. 한 달에 한 번 면회가 가능한데, 그때는 어머니가 오셨으니까요.
- 출소 후엔 어떤 일을 하셨나요?출소한 뒤에도 정치나 사회운동보다는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었어요. 근데 학교에서 졸업을 안 시켜주더라고요. 그래서 75년부터 81년까지는 고졸 학력으로 직장을 다녔어요. 처음엔 금성출판사에 다니다가 김수근 선생이 계시던 공간사에 들어가게 됐어요. 김수근 선생이 절 귀여워해주셨죠. 그때 같은 건물 3층 설계사무소에서 승효상, 민현식, 유춘수 등이 일했어요. 저는 잡지사에서 일했지만 설계사무실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건축에 관심을 갖고, 재밌게 지냈어요. 이후 중앙일보사에서 ''계간미술''을 창간하면서 거기서 일하게 됐어요.
근데 잡지 일만 하다 보니 더욱 미술사 공부가 하고 싶더라고요요. 그래서 차라리 미술평론을 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미술평론 준비를 했어요. 81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졸업하자마자 홍익대 대학원에 입학해서 2년 만에 졸업했어요. 근데 마침 단국대에서 석사 이상 교수 채용 공고가 났기에 지원해서 전임강사 자격을 얻었어요. 그래서 서점에 가서 수업에 쓸 책도 사고, 강의 준비를 다 했죠. 근데 바로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사면은 됐지만 복권이 안 돼서 사립대학 교수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중앙일보에서는 퇴직하지 말고 계속 있으라고 했지만, 저는 이번 기회에 프리 선언을 해보자 싶어서 7년 동안 일한 계간미술을 그만두고 평론을 했어요. 그때 막 민중미술운동이 일어났는데, 거기에 인생을 걸어보려고 했어요. 프리랜서라는 게 한국사회에서는 힘들지만 그래도 즐겁게 살았어요. 그리고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신촌 누리마당에서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공개강좌를 시작했고요.
- 이후 문화유산답사회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며 버스 안에서 유적을 설명하기 시작하셨죠?답사회 뿐 아니라 학생들 강연회라든가, 여기저기서 여행 간다고 하면 자원해서 버스 안에서 마이크 들고 유적을 설명했어요. 그걸 가톨릭대 안병욱 교수가 듣고는 ''사회평론'' 창간하면서 저한테 그 내용을 써보라고 했어요. 제가 글 쓰는 재주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원고료 없이 재미있는 글을 받기 위해서 그랬던 거죠.(웃음)
- 원고료를 안 받고 쓰셨어요?그동안 제가 쓴 글 중에서 원고료를 받은 건 중앙일보의 북한문화유사답사기밖에 없어요. 대신 저는 조건이 있어요. 분량은 내 맘대로 쓴다. 그래서 잡지사에선 보통 30매 내외인데, 저는 제 맘대로 80매~100매를 썼죠.
-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가 큰 인기를 얻었는데요. 지금도 새로운 것들이 보이나요?답사기를 남쪽 3권, 북쪽 2권 썼는데요. 그래도 충청북도, 제주도, 경기도는 한군데도 못 썼어요. 그래서 최소한 한두 권은 더 써야 할 것 같아요. 하지만 경륜의 시각이 들어가서 다른 시각으로 쓸 자신이 있으면 쓰고, 아니면 그만둘래요. 옛날만큼 같은 식으로 쓴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 문화유산답사기 중 봉은사의 김정희 서판전현판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요.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걸 쓰고 3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그건 군인이 전사한 것과 같아요. 당시 추사 김정희 선생이 굉장히 아팠거든요. 그리고 그 글씨체가 7살 때 자기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글씨체와 똑같아요.
-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는 걸 체감한 때는?강연 주문이 어마어마하게 몰려서 이틀에 한번은 강연을 했어요. 영남대 교수로 있으면서 전국의 군 단위는 다 갔을 거예요. 명예 군민증만 몇 개인지 몰라요.(웃음)
- 책에 나온 식당 주인들의 운명도 많이 바뀌었죠?그 식당들 중에서 지금까지 저에게 추석 선물을 보내는 분은 부석사 평화식당 아줌마에요. 추석 때마다 꿀샘이 살아있는 사과를 계속 보내고 계세요. 추어탕집 할머니는 "언제라도 들러서 유홍준이라는 얘기 한 마디만 해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작년에 갔을 때 얘기 안 했어요.(웃음) 그리고 서울 영희네집이 저 때문에 문 닫았어요. ㄷ자 한옥에서 4테이블 이상은 운영을 안 하는 집이었는데, 하루에 10배가 넘는 전화가 오다보니 주인이 다른 사람한테 넘겨줘버렸대요.
- 이번에 <완당평전>을 내셨는데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워낙 특출하시다보니 젊었을 땐 남의 비판을 많이 받고, 그분도 남을 잘 비판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제주도에서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인생을 많이 깨닫고, 남을 포용하고, 고전 글씨를 많이 연구하고 연습했대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7살 때 글씨와 71살 때 글씨가 똑같은데요. 어릴 때 글씨는 정말 천진해서 천진한 글씨고, 71살 때 글씨는 어린 시절의 천진성을 추구한 단련된 천진이죠. 그 천진성으로 가기 위한 단련은 세련되고 멋있기 위한 단련보다 더 높은 데 있는 경지죠. 경제 정선의 경우도 말년으로 가면 군더더기가 없어요. 말년으로 갈수록 채색도 잘 안 쓰고, 아주 간결하면서 그 안에 엑기스가 농축되어 있죠. 실제로 대학에서 개론을 가르치는 선생도 가장 실력 있는 선생이잖아요.
- 자택 이름이 왜 ''수졸당''인가요?장일순 선생께서 저더러 "재주가 많이 튀어나면 세상의 공격을 받을 테니 재주를 감추는 게 좋겠다"고 하시면서 노자에 나오는 ''대교약졸(아주 교묘한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 재주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서툰 것처럼 보임)의 의미로 졸을 지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수졸당이 됐어요.
어느 날 장일순 선생이 저에게 편지와 글씨를 써서 보내주셨는데요. "자네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일가친척을 만들어놓고 돌아다니며 사는 것 같다"면서 <도처일가>라는 글을 써주셨어요. 제가 나중에 청도 운문사 앞에서 여관이나 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잖아요. 그 여관집 카운터에 이 글을 걸면 딱 맞을 것 같아요.(웃음)
- 문화재청은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문화재청이라고 하면 오래된 문화재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곳으로 생각하시는데요. 행정부 단위에서 청이라는 건 다 현업부서예요.
- 문화재청장이 된 이후 가장 속상했던 일은?언론 때문에 속상한 일이 많은데요. 얼마 전 낙산사 동종에 제 이름이 들어갔다는 보도가 있었잖아요. 저도 신문에서 보고 분개했어요. 어느 놈이 저기에 내 이름을 넣었나 싶었죠. 근데 알고 보니 종 속에다가 "이 종은 세종 때 만들었다가 불에 타서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이 인간문화재 누구로 만들었다"라는 내용으로 넣은 거예요. 그걸 마치 매명하기 위해 쓴 것처럼 보도한 걸 보고 서운한 걸 넘어서 청장을 그만둔 다음에 공무원답사기를 써서라도 규명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웃음)
- 요즘 같은 땐 어딜 가면 좋나요?우리나라 사찰들은 산사잖아요. 우리나라 사찰은 중국이나 일본, 싱가포르와 달리 진입통로가 좋아요. 해인사, 송광사, 내소사 들어가는 길을 걷는 것부터 벌써 세속과 성욕의 물리적, 시간적 분리예요. 인간적 체취와 역사적 향취를 느끼면서 걸을 수 있죠. 서울에 계신 분이라면 낙엽 쌓인 고궁에 가시면 좋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