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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의 ''영원한 대부'' 말론 브란도 사망

    • 2004-07-0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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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년 80세, 캘리포니아주 UCLA 의료센터서 폐질환 앓다

     


    영화 ''대부''와 ''워터프론트''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이 시대의 터프가이 영화배우 말론 브란도가 향년 80세로 숨졌다.


    3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브란도가 입원해 있던 캘리포니아주 UCLA 의료센터측 대변인은 ''''브란도가 지난 1일 오전 6시 30분(현지시간) 폐질환으로 사망했다''''며 ''''고인이 더 이상의 사실은 알리기를 원치 않아 상세한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1979년 ''''지옥의 묵시록''''에서 브란도와 호흡을 맞춘 영화감독 프랜시스 코폴라는 ''''이 시대 최고의 배우를 잃은 것''''이라며 ''''아마 브란도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더 이상 알리려하지 않는 것은 지옥의 묵시록에 등장한 미친 해병대 대령처럼 남들이 자신을 두고 말을 퍼뜨리는 것 자체가 싫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금세기 최고 영화배우 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할리우드 스타 말론 브란도가 지난 1일 캘리포니아주 UCLA 의료센터에서 향년 8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진은 드라마 스쿨을 다닐 당시의 브란도/(AP=연합)
    젊은 시절 진정한 터프가이, 중년 이후 조용한 카리스마

    브란도는 할리우드역사상 영화속의 남자주인공의 이미지를 바꾼 인물이다. 말끔한 꽃미남이 아닌 약간 구부러져 흡사 권투선수같은 인상을 주는 매부리코에 성난 눈빛은 한 마디로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를 재패한 미국을 상징하는 어메리칸 마초의 대명사였다.

    브란도의 이런 이미지는 거친 스탠리 코왈스키역을 소화해낸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1951)'''', ''''와일드 원(1953)'''', 그리고 오스카상을 안겨준 ''''워터프론트(1954)''''에서 잘 나타난다.

    브란도는 동시대를 풍미한 제임스 딘과 마찬가지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고국에 돌아와서도 방황을 하는 젊은이들을 묘사하며 오토바이와 청바지, T 셔츠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 브란도는 또 다른 연기변신을 해 영화계를 놀라게 했다.

    브란도의 중년 이후의 연기생활은 바로 운둔자 그 자체였다. 1970년대 이후 영화출연이 줄어든 브란도이지만 젊은 시절 넘치는 에너지를 오토바이, 술, 여자로 푸는 모습이 아닌 조용하면서 카리스마넘치는 연기를 보여 완전한 연기변신을 했다.

    젊은 시절과 같은 점이라면 남의 간섭을 싫어하는 독립적인 모습을 보인 것 뿐이다.

    브란도가 또 다른 오스카상을 타게 한 영화 ''''대부(1972)''''에서는 다소 우물거리며 어눌한 말투의 뉴욕 마피아대부 돈 콜레오네가 조용히 다른 사람을 압도하는 매력을 발산한다.

    복잡한 가정사와 재정문제는 대 배우를 은둔자로 만들어

    그러나, 배우로서 성공한 브란도이지만 최근에는 가족문제와 재산문제가 브란도를 괴롭혔고 더욱 남과 만나지 않는 은둔생활을 강요했다.

    첫 부인인 웨일즈출신 여배우 앤나 캐쉬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크리스천은 지난 1990년 배다른 여동생 치옌의 남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치옌은 1995년 25살의 나이로 자살해 생을 마감했다.

    브란도 자신은 지난 1978년 제작된 ''''슈퍼맨''''의 출연료 1400만 달러(약 161억원)를 받지 못해 숨지기 1주일 전까지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다.

    브란도는 절은 시절 제작한 영화에서처럼 자유로움을 지나쳐 방종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1966년 매입한 테티오로라섬에 거액을 투자해 섬 전체를 개인별장으로 삼기도 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대부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말론 브란도.
    길거리 로데오로 부러진 코가 성공의 열쇄 돼

    브란도의 이와 같은 괴벽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1924년 4월 3일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세일즈맨 아버지와 여배우였던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난 브란도는 항상 옮겨다니는 아버지의 직업 탓에 이사를 자주하며 어머니로부터 배우로서의 끼를 배웠다.

    미네소타에 있는 연극학교에 입학했지만 곧 퇴학을 당한 뒤 누이 2명이 연극과 예술을 공부하던 뉴욕으로 가 당시 배우양성가로 유명한 스텔라 애들러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브란도의 재능을 알아본 애들러는 ''''브란도는 사실 배울 필요도 없는 천부적인 배우''''라며 ''''브란도가 연기하지 못할 인간은 없다''''고 덧붙였다.

    브란도에게는 무명생활이란 너무 짧은 것이었다. 이미 1946년 비평가들은 브란도를 전쟁이 끝난 뒤 집에 돌아와 방황하는 제대군인으로 가장 적합한 배우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시기 브란도는 돈을 벌기 위해 뒷골목에서 벌이는 로데오경기에 참가했다 코가 부러져 특유의 매부리코를 얻었다.

    이런 브란도를 지켜본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는 영화감독 엘리아 카잔에게 브란도를 추천했고 이것이 브란도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출연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출연한 말론 브란도의 청년시절 모습
    폭식, 섹스에 탐닉하면서 인디언인권운동 참가

    중년이 접어들어 여러 번의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 브란도는 갑자기 뚱뚱해진 자신에 대해 ''''내가 집착하는 것은 여자와 음식 뿐''''이라며 ''''하루에 먹는 아이스크림만도 엄청나다''''고 고백했다.

    브란도의 여성편력 역시 다양하다. 첫 부인 캐쉬피를 비롯 3번을 결혼한 브란도는 두 번째 부인으로 멕시코출신 여배우 모비타 카스테나다, 세 번째 부인으로는 타히티출신 타리타 테리피아를 둬 살아생전 ''''백인, 혼혈인, 태평양출신 폴리네시아인 등 여러 인종의 여성을 모두 경험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브란도의 삶을 폭식과 섹스로 점철됐다고 매도하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 1960년대 이후 브란도는 북미 인디언들의 권익을 위한 시민운동에 매진했고 1973년 아카데미 수상식에는 자신 대신 인디언출신 여배우 새친 리틀페더를 보내 인디언권익에 대한 연설을 하게 해 수상식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브란도의 배우로서의 위대함은 바로 지난달까지 죽음을 앞두고도 영화제작에 매달린 점이다. 브란도는 지난달 만화영화 ''''빅 벅 맨''''에서 늙은 노파역의 목소리연기를 해 극찬을 받았다.

    노컷뉴스 이서규기자 wangsobang@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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