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병호
단병호는 포항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다. 하지만 곧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어머니 혼자 그를 기른다. 그의 학업을 위해 두 살 터울의 누나는 초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모든 걸 희생한다. 하지만 그의 학교생활은 방황의 연속이었고, 결국 고등학교마저 중퇴한다.
이후 토끼 사육을 하지만 그것마저 실패하고, 서울 아가씨와 중매로 어렵사리 결혼하지만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들다. 39살 되던 해에 서울에 올라와 취업하지만 근로 조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취직 후 3년 뒤 드디어 노동조합을 만들어 노조위원장이 되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해고와 수배, 구속으로 이어진다.
6번 구속, 5년 2개월의 옥살이, 3년 3개월의 수배. - 이것이 17년간 노동 현장에 있었던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의 의원직 이전의 이력이다. 하지만 정작 그는 스스로를 그저 자식의 대학 등록금을 걱정하는 평범한 아버지였으며, 자기 삶의 원칙에 충실하게 살고픈 노동자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의 집에 최근 경사가 있었다. 독학으로 공부하다시피 한 딸이 사법시험 2차에 합격했고, 앞으로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단병호 의원의 삶과 가족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 이번에 따님이 사법고시 2차에 합격하셨죠?네. 12월에 3차 면접이 남았습니다.
- 따님을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먼저 떠오르시나요?아빠로서는 도리를 못 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애들을 생각하면 안쓰럽습니다. 애들이 어릴 때부터 저는 밖으로 일하러 다녔기 때문에 애들 입학이나 졸업을 제대로 챙겨준 적이 없고. 가족 여행이나 나들이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애들이 어렸을 땐 이런 얘기도 했어요. 방학이 끝나면 학교 가기 싫다고요. 왜냐면 다른 애들은 방학 동안 가족들과 여행 갔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자기들은 학교에 가면 할 얘기가 없다고요.
- 첫째 딸이 태어나던 날엔 어디 계셨나요?병원에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함께 기뻐해준 게 딸에게 해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 고향이 포항이신데요. 포항제철이 세워지기 전의 포항은 어떤 곳이었나요?5만 정도 인구의 작은 항구 도시였죠.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부터 급속도로 확장됐습니다.
- 포항에서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원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에서 계시다가 결혼하셨고, 해방된 후 돌아오셨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포항 수협에서 근무하셨어요.
-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다고요?네. 제가 태어난 6개월 후에 폐결핵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때 아버지 나이가 22세였습니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지금까지 혼자 계시죠.
- 어머님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겠어요?말로 다 표현을 못 하죠. 제 위로 두 살 터울의 누님이 한 분 계시는데요. 저희가 어릴 때는 외가댁에서 살았어요. 어머니는 저희를 외가에 맡겨놓고 부산에 가서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오셨죠. 그러다가 제가 8살 때부터 같이 살았어요.
- 동지 상업고등학교를 중퇴하셨는데요?동지 상고는 보통의 실업계 고등학교인데요. 농촌에서는 대학 진학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상고를 졸업해서 은행에 취직하는 걸 최고로 쳤어요. 그래서 저도 상고에 들어갔지만 적성에 안 맞더라고요.
- 고등학교를 중퇴한 일 때문에 누님에게 특히 미안하셨다고요?어머니에게 저는 절대적인 존재였어요. 가부장적 의식도 강했던 시절이었고, 또 어머니가 일찍 혼자가 되시면서 아들 하나에 거는 기대가 보통 부모님들보다 컸어요. 누님과 저를 다 공부시킬 처지는 못 됐기 때문에 누님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는 가사 노동에 농사 날품팔이까지 하면서 거의 저를 위해 모든 걸 희생시켰죠.
사실 어머니가 좀 심한 편이었어요. 시골에서 자라다보면 여름에 친구들과 밖에서 놀다가 부엌에 뛰어 들어가서 바가지로 물을 떠 마시곤 하잖아요. 근데 어머니는 그런 모습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사내자식은 부엌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목이 말라도 다른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해서 먹으라고 하셨어요. 그 정도로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죠. 누님은 저 때문에 모든 걸 희생당하셨어요. 지금도 누님을 보면 항상 미안하고 죄스럽습니다. 게다가 제가 그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지 못했잖아요. 계속 구속되고, 수배되는 삶을 살아왔으니까.
- 포항에서 농사도 지으셨다고요?네. 근데 큰 농사는 아니었고 겨우 우리 양식 될 정도였습니다. 그 외에는 시골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생활했죠.
- 사모님과는 어떻게 결혼하셨어요?당시 집사람은 종로구청에서 근무했는데요. 친척 소개로 알게 돼서 사귀었습니다. 요즘도 집사람은 가끔 그런 얘길 해요. 자기가 눈이 삐었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잘못 선택한 게 나를 만난 거다, 완전 꽝을 뽑았다고요.(웃음)
- 결혼한 뒤에는 어떻게 생활하셨나요?제가 참 힘들 무렵에 결혼을 했어요. 70년대에 한창 건강식품으로 토끼 고기가 좋다고 하면서 토끼 사육 붐이 일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시골에서 토끼를 길러봤는데, 토끼는 그 판로가 만만치 않아요. 판로가 잘 안되면서 토끼 축산 하던 사람들이 다 망했죠. 그 일을 하면서 조금 있던 농토마저 다 팔았고. 이후에 과일 장사도 했지만 잘 안 됐어요. 사실 결혼할 무렵엔 하는 일 없이 놀고 있었죠.
- 사모님이 정말 첫눈에 반하셨나봐요?(웃음)농촌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컸다고 하더라고요. 농촌 생활이라면 다 전원일기에 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대요. 그리고 처갓집도 장모님 혼자 딸만 둘을 키우셨는데요. 저를 만나면서 남자에 대한 막연한 의지와 기대가 컸던 것 같아요. 결혼을 하면 뭔가 많이 달라지고 좋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 80년대 초반에 10만원을 들고 서울로 올라오셨다고요?80년에 결혼하고, 딸이 82년에 태어났는데요. 아이의 100일 직후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돈 10만원에 가방 하나 들고 사실상 무작정 상경한 거죠. 친구들과 사촌들의 도움을 받아 방을 하나 얻어서 이런저런 장사를 했어요. 리어카 행상도 해보고, 택시 운전을 하려고 맘먹기도 하고.
- 그러다가 첫 직장으로 동아건설 현장에서 일하게 되셨죠?동아그룹 내에 있는 동아 콘크리트 공업 주식회사였는데요. 주로 시멘트를 가지고 2차제품을 만들었습니다. 시멘트 전주대나 하수도 등을 생산하는 곳이었죠.
- 듣기만 해도 힘든 일일 것 같은데요. 게다가 12시간 맞교대를 하셨다고요?정말 이렇게 힘든 노동도 있는지 처음 느꼈습니다. 1주일은 주간, 1주일은 야간으로 12시간 맞교대를 하는데요. 쉬는 날 없이 한 달에 360시간 노동을 했어요. 게다가 작업장엔 시멘트 분진이 엄청나게 많이 날립니다. 제가 머리도 많이 빠지고,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이유도 알칼리성 시멘트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멘트 제품 속에 들어가는 철 구조물 용접을 해야 하는데요. 용접에서 나오는 가스도 무척 안 좋죠. 아무튼 작업 조건은 상당히 열악했는데, 임금은 엄청나게 낮았어요. 정말 일하는 게 힘들구나, 이런 노동도 있구나, 라고 처음 느껴봤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노동 현장이 꽤 많습니다. 국내 노동자들이 잘 안 가는 3D업종에는 아직도 그와 유사한 작업환경도 꽤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3년 만에 노조위원장이 되셨는데요.제가 나름대로 성실하게 일했나봐요. 그래서 예외적으로 혜택을 받았습니다. 83년에 일을 시작해서 85년에 현장 주임이 됐거든요. 현장 주임이라면 반장 3~4명을 거느리고 50~60명의 직원들을 지휘하는 지위입니다.
제가 노동조합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노동현장에서 노동을 경험하면서 이건 정말 불합리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예를 들어 하루에도 전주대를 수십 개 만드는데, 당시 전주 한 개의 가격이 17만원이었습니다. 근데 노동자들은 한 달에 360시간을 일해도 한 달 임금이 12~13만원이었어요. 전주 한 개만도 못한 처우를 받은 거죠. 그리고 노무 관리라는 건 군대 수준입니다. 불합리함이 있더라도 자기 불만을 회사에 표출하지 못하고, 일방적 지시에 따라야 하죠. 노동자들도 하나의 인간인데 어떻게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살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자기 삶에 대한 미래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그리고 85년 무렵에 구로동맹 파업이나 대우자동차 파업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된 시기이다보니 저도 자연스럽게 그런 걸 접하게 됐어요. 노동조합이 있으면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심리 때문에 노동조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저는 현장 관리자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들의 지지와 호응이 상당히 좋았어요. 그래서 87년에 노동조합을 만들게 됐습니다.
- "대학생 출신 노동자가 아니고 평범한 노동자 출신이어서 노조 일을 하는 게 더 힘들다"고 말씀하셨는데요?노동조합을 만들어 놓으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어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회사에서 교섭하지 않으려고 해서 우리도 파업에 들어갔죠. 근데 하루 이틀은 노동자들도 신나서 파업을 했는데, 그 다음부터 밑천이 떨어지더라고요. 파업 대형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프로그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노동조합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고, 또 파업은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 거의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파업을 거치면서 좀 쉬워졌습니다. 대충 감이 잡히기도 했고요. 우리 사업장에 학생 출신 노동자가 두 명 있었는데, 그 두 친구들이 전에 다른 노동조합에서 일정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많은 도움이 됐죠.
-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경위는?제가 89년 4월에 구속이 됐는데요. 구속된 상태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 이후 사모님께서 생계를 책임지셨다고요? 해고된 이후 저는 집안 살림에 대해서는 어떤 재정적 기여도 못 했어요. 그 이후로 생계는 제 처가 꾸려오다시피 했습니다. 지금은 동네 슈퍼에서 작은 코너를 얻어 야채 장사를 하고 있는데요. 전에는 그것도 아니었어요. 액세서리 구슬 꿰는 일을 오래 했고, 슈퍼의 파트타임으로 들어가서 시간 노동을 5~6년 동안 했어요. 그 다음에 장사를 하게 됐죠.
- 가족들이 면회 왔을 때의 느낌은?얼굴을 못 들죠. 너무 미안하고. 결혼한 이후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하게 해주지 못 했는데, 이젠 구속까지 된 상태에서 철창 안에서 가족들을 만난다는 게 정말 미안하죠. 게다가 당시만 해도 징역을 살면 호적에 붉은 줄이 올라가서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어요. 그래서 집사람은 제가 풀려나와도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컸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괴롭기도 하고, 정말 미안했죠.
- 사모님은 아직도 일을 하시나요?네. 아직도 장사를 합니다. 일을 안 하면 저희 생계에 심각한 타격을 받습니다.
- 다른 민주노동당 의원들의 사모님들도 비슷한 상황인가요?
생계에 종사하는 분도 있고, 같이 사회운동을 하는 분도 있고. 하지만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똑같은 것 같습니다.
- 단병호 의원님이 처음 노조위원장이 됐을 때와 지금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변했습니다. 노동자들을 위한 세력이 대안을 내세우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는데요?많이 변했죠. 87년 노동자 대투쟁, 그리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시작되던 시기와 지금 상황이 많이 변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외형적으로는 많이 변한 것 같은데 노동자, 농민, 서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본질에 있어서는 별로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노동자, 농민, 서민들에게 희생이 요구됐고, 그 고통이 아직도 너무나 무겁게 누르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민주화 등의 부분은 많이 변했지만 삶의 본질은 많이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노동당이나 민주노총은 이렇게 바뀌지 않는 본질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핵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이 사회를 보다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사회로 만들자고 하는 만큼 거기에 걸맞은 비전을 가지고 국민적 동의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아직은 좀 약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