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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 신기남 의원의 입지 때문에 아버지가 당한 것"



문화 일반

    "내 동생 신기남 의원의 입지 때문에 아버지가 당한 것"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국립극장장 신선희

    신선희

     

    1950년에 만들어진 국립극장. 수십 명의 사람이 들고 났던 극장장 자리에 드디어 여성 극장장이 탄생한 건 2006년 1월의 일이다. 80년대 무대미술가로 이름을 떨친 신선희.

    한국무대미술가협회 창설에 힘을 기울이고, 무대미술을 하나의 독립된 예술장르로 인정받게 만들었던 그녀가 60여년 국립극장 역사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서울예술단 이사장 재임시절에도 돋보였던 예술경영 능력과 창조적 아티스트로서의 기지를 십분 발휘해서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대한민국 대표 극장으로 만들 계획이다.

    그녀가 소개하는 가족사, 동생인 신기남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아버지의 친일 전력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 그리고 국립극장장으로서의 꿈과 목표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신선희 국립극장장


    - 어디서 태어나셨나요?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직업 때문에 초등학교 때만 10번 정도 이사를 다녔어요. 서울, 춘천, 제주도 등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유년시절을 보냈어요.

    - 6.25 때는 어디에 계셨나요?

    장성에 있다가 울산으로 피난을 갔어요. 초가집에 숨어 있었죠.

    - 어린 시절에 잊지 못할 가족의 풍경이 있다면?

    부모님이 예술과 여행을 좋아하셔서 가족끼리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바닷가에서 한 달 동안 집을 얻어서 살기도 했죠. 어머니는 오페라 가수를 하려고 하셨고, 아버지는 문학과 미술 쪽에 재능이 많으셨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호남 쪽이라 국악이나 미술 쪽 예술가들이 항상 집에 드나들었어요. 저희 집에서 살기도 했고요. 아버지가 화가인 허백련 선생과 잘 아셔서 그분 제자들이 우리 집에서 살았죠.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그분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어요. 부모님께서 여러분들을 후원하고 도와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명인들이 제 스승이 된 것 같아요.

    - 동생인 신기남 전 의원은 어땠나요?

    동생도 피아노를 쳤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직접 저희들에게 성악을 가르치셨어요. 피아노를 치면서 발성연습을 시키셨죠. 평양 출신인 어머니는 원래 가수를 하려다가 결혼을 하신 거거든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국악이 너무 좋아서 가야금을 배우셨어요. 그렇게 해서 당시 국악원과 전국순회를 다닐 정도였죠.

    어머니는 진주 기생에게 직접 살풀이를 배우기도 하셨고, 나중엔 그분이 저의 첫 번째 춤 선생이 되셨죠. 정재무 같은 걸 배웠죠. 그리고 이매방 선생님이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서 스튜디오를 냈고, 이매방 선생님의 친구였던 이상주 선생님이 저희 집에서 3년 동안 살았어요. 그러니까 저는 학교만 갔다 오면 늘 춤을 춰야 했고, 무대에 나갔어요. 그때 최승희 춤까지 배워서 췄죠. 벽장엔 무대 의상에 가득 있었어요.

    - 축복받은 어린 시절을 보내신 것 같아요.

    당시엔 다 가난했지만 우리 집은 괜찮게 산 편이었어요. 그리고 예술을 좋아했고요.

    - 집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어요?

    다 섞여있었죠. 근데 어머니는 전라도 음식을 더 좋아하셨어요. 겨울에는 평양식 만둣국만 먹어야 했지만.

    - 청소년기에 했던 가장 큰 반항은?

    어머니와 마음이 잘 안 맞았어요. 어머니는 강하고, 정렬이 많고, 개방적이고, 명랑한 분이지만 교육은 스파르타적이었어요. 저는 사대부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5학년 때 집을 떠나 서울에 혼자 있었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 가족들과 합치게 됐는데, 부모님하고 같이 못 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림 그린다, 사진 찍는다면서 많이 돌아다녔어요. 다시는 안 돌아올 것처럼 편지를 써놓고 가출도 했지만 결국 갈 데가 없어서 돌아오기도 했죠. (웃음) 당시엔 비원이나 창경궁이나 종묘 같은 데 가서 사진 찍고 그림 그리는 것뿐이었으니까요.

    - 청소년기에 롤모델이 있었다면?

    제가 어렸을 때 매료당한 사람은 ''라이프'' 잡지를 창설한 마가레트 버크 화이트라는 종군기자였어요. 이분은 다큐멘터리를 많이 썼고, 세계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간디 등 유명한 사람들과 대담도 했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지구 끝까지 가보리라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집에서는 서울법대를 가길 원했어요. 아버지는 저를 여성 지도자로 생각하셨나봐요. 하지만 사실 저는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극작가가 되려고 연극과를 갔죠.

    - 어린 시절부터 국립극장 공연의 열성관객이었다고요?

    어머니가 공연을 좋아하셔서 늘 저를 데리고 가서 보셨어요.

    - 당시엔 어떤 공연이 있었나요?

    다른 것보다 무용 공연이 많이 기억나요. 저는 미국에 가서도 모던댄스를 할 정도로 춤을 안 추면 못 사는 체질이었어요. 지금도 어떤 무용이든 보면 금방 흉내를 내요. 어머니나 저나 무용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 예술가로서의 본인의 끼를 깨닫게 된 때가 있었나요?

    깨닫기도 전에 서너 살부터 어머니와 노래 부르기 시작했으니까요.

    - 극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하셨는데요.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전 닥치는 대로 많이 읽어요. 극작가가 되려고 영문학과를 갔을 때는 제임스 조이스라든가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T.S 엘리엇을 특히 좋아했어요. 그런데 미국에 갔을 땐 오히려 한국소설에 탐닉했어요. 미국에서 이광수의 ''유정''이나 ''흙''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죠. 지난 휴가 때는 바슐라르의 ''대지와 휴식의 몽상''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그 분의 시리즈는 거의 다 읽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철학서를 읽었어요. 중학교 때 육조단경 같은 불교서적을 읽었고, 사서삼경도 아버지 서재에서 꺼내다가 읽었어요. 철학서적을 굉장히 일찍 읽기 시작해서 그런지 너무 조숙해서 성격은 개방적이었지만 친구가 없었어요.

    -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요?

    경찰직 공무원이셨어요. 예술적이고, 낭만적이고, 유머러스하고, 미남이었어요. 지금 신기남 의원하고 똑같이 생겼어요. 어렸을 때 어머니가 괜히 저에게 "넌 여성적이지 못하고 예쁘지 않다,"고 구박하시면 아버지가 "괜찮아. 너는 못 생겨도 공부를 잘 하잖니."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럼 더 울고 싶어졌죠.(웃음)

    그리고 아버지는 뜰에 포도나무를 심어놓고 "이 포도나무가 너다. 이게 자라서 휴식의 그늘과 열매를 주지 않냐. 네가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하게 된 건 네가 잘나서가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절대 보은해야 한다."고 하면서 인연에 대한 얘기를 하셨어요. "인은 씨앗이고, 연은 햇빛과 바람 같은 거다. 우리는 모든 인간에게 좋은 연이 되어야 한다. 보은이란 건 당연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씨앗으로서 자기의 소명을 하고 인생을 살 때 다른 사람들의 좋은 연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 아버지로 인해 신기남 의원이 안 좋은 일을 겪기도 했죠?

    아버지는 전쟁 말기에 학교 선생님을 하셨어요. 상록수적 가치라고 해서 시골에 가서 아이들 목욕시키면서. 별명이 페스탈로치였대요. 애국자로 국가를 위해 몸 바쳐서 일을 했어요. 근데 전쟁 나기 6개월 전에 청년들 6명이 끌려가서 배치 당하는 데로 갔대요. 그 후 해방이 되고 경찰학교에 시험을 봐서 들어가신 거죠.

    근데 조작 모함이 있었어요. 두 사람이 나와서 아버지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얘기를 했어요. 하지만 나중에 그중 한 사람이 찾아와서 양심고백을 했어요. 아버지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이 사람은 애국자다."라고 얘기했대요. 그리고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신문에 그렇게 났다."면서 양심고백을 하길 원하더라고요.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실종됐어요. 이런 조작에 대해서는 언제고 명예회복을 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요. 동생인 신기남 의원 입지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같아요.

    - 신문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사를 접했을 때 굉장히 충격적이었겠어요.

    그렇죠. 근데 저희 가족은 워낙 풍파를 많이 겼었기 때문에 단련된 편이었어요. 아버지는 두 번이나 그런 일을 당하셨고, 유신을 반대하다가 감옥살이도 했어요. 다른 이유를 뒤집어 씌워서 종신형까지 받기도 하셨죠. 아버지가 영장도 없이 끌려가신 바람에 저희는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집에서는 아무도 정치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랐어요. 근데 동생이 기어이 그 길을 간다기에 다들 반대했어요. 그리고 동생은 조용한 젠틀맨이고, 지성인이에요. 그래서 정치와는 안 맞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본인의 양심적 정열로 국가를 위해 일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정치란 게 다 그런 바람을 맞는 것 아니겠어요.

    -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나요?

    84년 겨울에요. 옥살이 하시면서 건강이 안 좋아지셨죠. 저는 임종도 못했어요. 제가 한국에 돌아오게 된 건 아버지 때문이었어요. 가장 정의로운 남자이자 존경하는 아버지를 사회가 매장했을 때 저는 한국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어요. 자유롭게 세상을 누비면서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쓰러지셨단 얘기를 듣고 다시 돌아왔죠.

    - 하와이로 유학을 간 이유는?

    당시 고민이 많았어요. 한국 정세가 그랬고, 제 몸도 안 좋았어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굉장히 안 좋았기 때문에 갑자기 뉴욕으로 가는 것보다는 환경이 좋은 하와이에서 회복하려고 했죠. 외삼촌이 거기 교수로 계시기도 했고, 또 그때 케네디 대통령이 동서문화센터를 지어서 동양문화를 발전시키려고 했어요. 그래서 그 학교에서 동양연극을 많이 배웠어요.

    - 가장 힘들 때 나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것이 있다면?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하와이로 갈 때도 몸이 회복되면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 평화 봉사단으로 가려고 했어요. 내가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그리고 한국에 대한 증오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매달릴 수 있는 건 그런 것뿐이었죠. 그리고 어렸을 때 전쟁으로 친구들이 폭격을 맞아서 많이 죽었거든요. 하지만 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늘 타인의 불행과 가난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평화 봉사단으로서 해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죠.

    - 무대미술에 관심이 생긴 건 언제였나요?

    중 3때 세종문화회관에서 호세리몽의 무용 공연을 봤어요. 빈 무대에서 바흐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공연이었는데, 그때 공간이라는 게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우주의 축소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너무 감동을 받아서 집에 와서 울기도 했죠. 그래서 무대예술 쪽으로 간다는 생각만 했어요.

    근데 저는 원래 극작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연극과에 들어갔어요. 근데 영어로 희곡을 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말로 하지 않는 디자인을 하게 됐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그리고 당시 저희 선생님께서 어떤 파티에 가서 "저 아이는 앞으로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디자이너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그 후에 그 선생님께서 추천서를 써주셔서 뉴욕의 극장에서 일하게 됐어요. 극장에서 하는 일이 거의 건축가들의 일이라 공부할 게 끝이 없었는데, 그게 또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히 거기서 먹고 살게 됐죠. 하지만 경쟁사회 속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큼 올라가는 데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했어요.

    - 체구가 작으신데, 체력적으로 한계는 안 느끼셨나요?

    전 고소공포증도 있고, 기절도 잘 해요. 건강에 대해 자신이 없는데, 신기가 오른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미국 여자들은 남의 도움을 받지 않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연구를 했죠. 생명을 걸고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갈 때마다 기도를 하고. 그러면서 극복이 됐어요.

    - 98년에 서울예술단 이사장으로 발탁되셨는데요. 그곳에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한국적 총체음악극을 하는 곳이에요. 한국의 신화와 전설을 바탕으로 한 바리라든가 셰익스피어 작품도 했고요. 노래와 음악과 춤이 삼위일체가 되는 청산별곡도 했는데요. 저는 그게 한국 공연예술의 전통적인 모태라고 봐요. 전통의 미학을 가지면서 어떻게 현대화하느냐는 거죠. 그리고 공적인 기금을 받는 단체는 외국에 가서 한국의 문화 이미지를 알려야 하기 때문에 전통미학을 버리면 안돼요. 하지만 극작가들은 너무 서양연극처럼 쓰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 제가 직접 작품을 썼어요. 그랬더니 위원회에서 제 작품이 제일 낫다고 하더라고요. 차범석 선생이나 이근삼 선생이 다 좋아하셨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을 만드는 게 굉장히 재밌었어요. 국악에 서양 악기도 넣으면서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과정이 좋아서 신들려서 한 거예요. 요즘은 그런 총체적인 장르를 여기저기서 많이 하는 것 같아요.

    - 최초의 여성 국립극장장으로 취임하셨는데요?

    공모제도라 제가 지원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만만치 않은 공모제도였더라고요. 근데 당시엔 제가 책을 쓸 때라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상당히 유력한 후보가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그냥 덤벼들었죠. 저는 공모전의 사업계획서를 상당히 성실히 썼어요. 오랫동안 국립극장을 바라봤고, 거기서 일도 했고, 서울예술단에서 몇 년 동안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경영적 측면도 검토하고, 우리나라 국공립 극장의 제도 개선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어요. 사실 그런 생각을 몇 년 동안 하면서 오래 준비한 거죠.

    - 국립극장장으로서 가장 큰 목표가 있다면?

    일단은 작품을 많이 해야 해요. 그리고 사람들은 국립극장이 어떤 곳이라는 걸 잘 몰라요. 국립극장은 다른 극장과는 달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장르 4개의 전속단체가 있는데요. 전속단체에서 20년 전 작품도 상설 레퍼토리로 항상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1회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공연을 길게 하는 거죠. 그동안 국립극장에서 좋았던 작품들이 전부 실에 꿰어서 역사를 형성하는 레퍼토리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국제예술제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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