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지만, 어디에든 속할 수도 있는 존재.
자의든 타의든 고국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게 된 예술가의 작업에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상황 속에서 겪는 치열한 고민과 갈등의 흔적이 녹아 있을 수밖에 없다.
서울시립미술관은 50∼60대 중견작가를 집중 조명하는 격년제 기획전시 '세마(SeMA) 골드'전의 올해 참여 작가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여성 작가 민영순(61)·윤진미(54)·조숙진(54)을 불러 모았다. 전시 제목은 '노바디'(Nobody).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작가 민영순은 7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비록 모국어는 잊어버렸지만,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 왔고 매체를 넘나들면서 사회 문제에 대해 발언해 왔다.
1931년부터 현재까지의 연도를 하나씩 적은 옷을 입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퍼포먼스를 벌여 위안부 문제를 상기시키거나 자신이 바라본 한국 사회 내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을 영상에 담는 식이다.
8살 때 캐나다에 이민 간 윤진미는 "캐나다가 이민자의 나라임에도 이민 당시에는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 차별주의가 존재했다"고 회고한다.
작가는 에밀리 카 등 캐나다를 대표하는 화가가 그린 캐나다의 자연 풍경 앞에 한국인 이민자 67명을 앉혀 놓고 앞·뒷모습을 각각 촬영한 작품 '6-7 그룹'을 선보인다. 밴쿠버아트갤러리의 소장품으로, 전시장 양쪽 벽에 데칼코마니처럼 걸렸다. 1967년은 캐나다가 아시아계의 이민을 허용한 해이기도 하다.
민영순과 윤진미가 어린 시절 외국으로 건너간 반면 조숙진은 대학을 졸업한 뒤인 20대 후반에 미국행을 택해 현재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여경환 큐레이터는 "요즘 디아스포라는 예전 세대와 달리 경제적인 이유나 자아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노바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존재와 비존재의 접점'에 있는 조숙진의 작품은 "서양 조형의 어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양적"이다. 대표적인 서양 가구인 의자에서 다리 부분을 잘라 내 동양적인 오브제로 바꿔 놓는다.
버려진 나무를 모아 만든 작품 '비석 풍경'은 부제 '존재는 비존재로 태어난다'에서 알 수 있듯 버려지고 쓸모없는 것에서 누군가의 삶의 흔적을 보여준다.
작가가 서울 근교에서 모은 빈 액자 200여 개로 이뤄진 작품은 그 자체가 하나의 프레임이기도 하고 또 부재의 증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의 주제를 가장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작품 제목도 '노바디'다.
전시는 5월 18일까지. 문의 : 02-2124-88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