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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고

    '한국판 드레퓌스' 강기훈의 삶과 간암은 누가 보상하나

    김기춘 실장은 당시 법무장관이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 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법원에서 재심 무죄판결을 받은 후 기자회견을 갖고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송은석 기자)

     

    1991년 5월 8일 오전 8시 7분쯤 서울 마포구 신수동 서강대학교 본관 5층 옥상에서 한 사람이 분신 후 16.5 미터 아래로 투신했다. 바로 숨졌다. 8시 25분쯤이었다.

    당시에 CBS는 이 투신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했다. 아마도 8시 35분쯤이었을 것이다.

    서강대를 담당하던 마포경찰서 출입기자들은 일제히 서강대로 향했고, 숨진 사람이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이었음을 알았다.

    옥상에서는 "단순하게 변혁 운동의 도화선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역사의 이정표가 되고자 함은 더욱이 아닙니다"로 시작되는 유서 2장이 발견됐다.

    같은해 4월 26일 경찰 집단 구타로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 씨 사태로 비롯된 재야 시민단체의 정권 퇴진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을 즈음 김기설 학생이 분신을 한 것이다.

    수서택지 특혜 분양 등 굵직굵직한 비리 사건 등으로 위기에 몰린 노태우 정권은 김기설 씨를 비롯한 연이은 분신자살 사건을 정권 안보 차원에서 다루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정권에 항의하는 분신이 연일 계속되자 일부 언론에서는 '운동권 사이에 죽음을 찬미하는 소영웅주의, 허무주의적 분위기가 집단 감염되듯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고, 시인 김지하 씨는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는 글을 발표했다.

    서강대학교 박홍 총장은 성경위에 손을 올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이 때부터 김기설 학생의 분신 자살에 배후가 있다는 보도가 언론에 도배질을 하기 시작했고, 강기훈 전민련 총무부장의 이름이 등장했다.

     

    바야흐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의 흑막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1890년대 프랑스에서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가 필적 때문에 석연찮게 반역죄로 몰려 종신형을 선고받자, 에밀 졸라 등 당대 지식인들이 옹호하고 나섰던 사건에 비유된 것이다.

    검찰과 경찰 합동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졌고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검찰은 "전민련 총무부장이던 강기훈 씨가 김 씨의 유서를 대신 썼다"며 강 씨를 구속기소했다.

    1991년 당시 고 김기설 씨가 남긴 유서와 강기훈 씨의 자술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유서의 필체와 강 씨의 필체가 일치한다"는 감정결과를 내놨다. 검찰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가 국과수 김모 실장의 필적 감정 결과였다.

    강 씨는 검찰 조사와 재판에서 일관되게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당시 문화방송은 '카메라 출동' 코너를 통해 국과수 필적 감정 책임자였던 김형영 실장이 뇌물을 받고 필적을 허위로 감정했다고 특종 보도를 했다.

    검찰은 그러나 김 실장의 허위 감정은 없었고 단지 뇌물은 받았다며 1992년 2월 11일 구속했다.

    검찰이 김 실장을 감싸며 봐주기를 했다고 당시 언론은 지적했으나 검찰은 귀를 막았다.

    또 재야단체를 중심으로 일본의 필적 감정 전문가까지 동원해 "김기설과 강기훈의 필적이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했으나 검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1, 2심 법원과 대법원까지 국과수의 필적 감정 결과만을 토대로 1992년 7월 강 씨에게 유서대필과 자살방조 혐의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했다.

    강 씨의 유죄를 위해 검찰과 안전기획부 등 권력기관이 총동원됐다는 설까지 있었으나 언론은 확인하지 못했다.

     

    강 씨는 1994년 8월 만기 출소했다. 강 씨는 그때도 "나는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강 씨는 교도소 면회를 간 지인들에게도 피눈물을 흘리며 "유서를 대신 쓰지 않았으며 검찰이 조작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강 씨는 그 이후 꾸준히 자신의 결백을 부르짖었고, 13년이 지나서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씨의 필적이 담긴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 등을 입수해 유서 필적과의 감정을 실시했다.

    진실화해위는 국과수 등의 감정결과를 바탕으로 2007년 11월 "강 씨가 김 씨의 유서를 대신 쓰지 않았다"며 재심 권고 결정을 내렸다.

    2009년 9월 서울고법은 재심청구를 받아들였고, 대법원은 2012년 10월 19일 재심을 결정했다.

    유서대필사건으로부터 23년이 흐른 2014년 2월 13일 오후 2시. 서울고등법원은 강 씨의 무죄를 판결했다.

    강 씨는 그동안 일자리를 찾아 헤매기도 했고 건강이 나빠 직장생활을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특히 그 얼마나 한(恨)이 자심했길래 간암까지 걸려, 다른 장기까지 전이된 말기로 투석까지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권의 안보를 위해 차원에서 저지른 조작사건이 한 인간의 생명과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삶은 과연 어디에 가서 보상받아야 할까.

    당시 강기훈을 내세워 유서 대필 사건 조작을 주도한 세력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사진=윤창원 기자)

     

    당시 법무부장관은 검사 출신 김기춘, 현재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다. 당시 수사검사는 강신욱, 신상규, 송명석, 안종택, 남기춘, 임철, 곽상도, 윤석만, 박경순 검사 등 9명이다.

    강신욱 당시 강력부장은 대법관을 지내고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역임했다.

    남기춘 검사 역시 박근혜 캠프에서 클린검증 소위원장을 맡았고, 곽상도 검사는 박근혜 후보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에 참여했다가 박근혜정부 청와대 첫 민정수석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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