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리데이^ 지강헌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를 외치며 80년대 후반 우리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렸던 탈주범 지강헌 일당의 행각을 그린 영화 ''홀리데이''가 순탄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영화 흥행에 따라 실제 사건의 배경과 인물들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담한 처녀'' 고선숙이 남긴 마지막 수기 1988년 10월, 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행사를 성공리에 마친 후 아직 그 감흥에서 헤어나지 못한 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서울 영등포 교도소에서 충남 공주 교도소로 이감 중이던 죄수 12명이 호송 차량을 탈취해 도주한 것.
이들은 8박 9일 동안 서울 시내 가정집 5군데를 돌아다니며 당시 ''신문기사 1면''을 장식했다. 이 사건은 17년이나 지난 지금 ''홀리데이'' 영화를 통해 재구성됐다.
영화 ''홀리데이''에서 마지막까지 인질로 잡혀 있던 처녀역의 실제 주인공은 고선숙(당시 22세)씨다. 당시 탈주범 지강헌뿐만 아니라, ''대담한 처녀'' 고선숙씨에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22살 여성이 보여준 침착한 태도에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16시간 동안 인질로 잡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새벽에 탈출을 감행하였고 동생과 어머니도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고선숙씨는 끝까지 남아있어야 했다. 그는 1988년 10월 15일을 ''피의 휴일''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충격과 혼란의 16시간, 그들은 인간적이었다>라는 제목의 글은 그가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그 날의 기억''이다. 당시 여성지 <마드모아젤> 에 수록된 이 글은 총 5페이지에 걸쳐 수기 형식으로 쓰여 있다. 사건직후 병원치료 중이던 고씨를 기자가 만나서 인터뷰하고 수기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피로 범벅된 처절한 휴일''수기는 ''부탁''의 내용으로 시작된다.
"제발 나나 우리 가족이 말하는 대로만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당부다. 그는 "보도내용이 전체적으로 너무 과장돼 있고,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묘사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10월 16일 "낮 12시 20분경에 상황이 완전히 종료되고, 나는 경찰관들에게 업히다시피 이끌려서 집을 나왔다"고 한다. 안정을 되찾고 ''피로 뒤범벅된 처절한 휴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피의 휴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으며 끈질긴 취재진의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그는 ''정중한 4인의 탈주범''에 대해 담담하게 회상하고 있다. "남자들은 정중한 태도로 존대말을 쓰고 있었다"고 하면서 "협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칼과 권총도 어디로 감췄는지 보이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들을 안심시키려고 애쓰는 눈치였고 엄마의 이러한 태도는 그들을 자수시키려는 노력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 글을 썼던 당시에도 "엄마는 지금도 ''내가 젊은 아이들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수 시키지 못한 걸 후회하며 울먹이신다"고 쓰여 있다.
인질극 집
영화와 흡사한 부분 상당히 많아…일부 각색된 내용도 당시 고선숙씨가 쓴 글을 보면, 영화 ''홀리데이''가 묘사하는 장면 중 상당 부분이 실제 사건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처럼 실제로 탈주범들은 "자신들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 ''나쁜 돈이 아니니 너희들 필요한 것 사서 써라''고 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고씨는 탈주범들이 실제로도 매우 ''인간적''이었다고 술회했다. "오죽하면 내가 ''나를 인질로 삼아서 빠져나가''라고 요구했을까" 하면서, "내 동생들은 왜 그들을 ''영일이 오빠'', ''의철이 오빠'', ''광술이 오빠'' 혹은 ''강헌이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을까"라고 했다.
또 "경찰과 대치하는 가운데 나의 목에 칼을 들이대면서도 ''미안하다. 정말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절대 다치지 않게 할테니 조금만 참아라''는 이야기를 몇 번씩 되뇌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일부 각색된 부분이 보인다. 고선숙씨의 글에 따르면, 15일 밤 집안에는 아버지도 함께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다음 날 새벽에 몰래 집안을 빠져나가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 ''홀리데이''에서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수기에 의하면, "(지강헌은) 피 묻은 담배를 입에 문채 경찰로부터 카세트 테이프를 받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LP판을 통해 ''홀리데이'' 음악이 흘러나온다.
또 탈주범 중 한 사람인 강영일(당시 21세)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담을 넘어 들어온 동생에게 "나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지만 너는 부모님께 잘해 드려라. 형이 원망스럽지? 난 네가 무척 보고 싶었다"고 울먹였다고 한다.
한의철(당시 20세)은 그 날 찾아온 애인에게 "나는 자살할 것이니까 너는 다른 마음먹지 말고 잘 살아. 나를 빨리 잊어버려"라고 쫓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들이 생략되었다.
이 날 인질극의 마지막 장면을 고씨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지강헌)가 방에 떨어진 깨진 유리 조각을 집었다. 목에 대고 유리를 긋자 선혈이 솟았다. 이때 경찰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총을 발사했다. 고개를 숙이던 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 총알이 그의 복부에 가서 박혔다"고.
고씨는 이 글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현재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