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진
"''무사''라는 영화를 찍고 있을때 였어요.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누가 뒤따라 오는거에요. 돌아보니 날 선 커다란 정육점 식칼을 들고 달려오잖아요. 놀래서 어쩔줄 모르는데 글쎄 팬이라면서 그 칼 옆면에 싸인을 해달라는 거지 뭡니까? 처음엔 어찌나 당황했던지... 헤헤헤."
''왕의 남자''의 일등 공신중 한명인 육갑 유해진(37)의 팬과의 에피소드중 하나다. 충무로에서는 그를 일명 ''명품 조연''이라 부른다. 매년 영화에서 한 두명씩의 톡톡튀는 개성을 가진 조연들이 이름을 날리고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유해진은 영화팬과 제작진 모두에게 사랑받는 몇 안되는 스테디 셀러 배우다.
"제가 무슨 ''왕의 남자''라도 되나요. 새삼스럽게 인터뷰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의 유해진은 초장부터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든다.
양아치, 용가리, 넙치, 도충, 짭새, 용만, 용대, 거복, 육갑...유해진이 등장한 영화속에서 맡았던 캐릭터 이름들이다. 사람이름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우악(?)스럽다.
얼굴 갖고 얘기하기는 참 뭣하지만 시쳇말로 인상이 참 고약하다. 쟁쟁한 연기파 배우들의 사관학교인 연극 극단 ''목화''의 에이스중 한명이라는 배경지식이 없었다면 길에서라도 괜히 눈 마주치면 봉변당할 것 같은 ''조폭''수준의 인상이다. 유해진 스스로도 그리 얌전한 학창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 연극에 입문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영화속 양아치 건달처럼 행세하고 다녔을 거라고 한다.
영화속 유해진을 기억하는 것은 그의 강렬한 인상 만큼이나 쉽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용가리, ''공공의 적'' 칼잡이, ''광복절 특사''의 경찰, ''라이터를 켜라''의 소심남, TV 드라마 ''토지''의 친일파 김두수 그리고 ''왕의 남자''의 육갑 등.
하나같이 개성만점의 배역들이다. 때로는 전라도 광주 사투리를 또는 경상도 사투리를 그것도 아니면 충청도 사투리를 맛깔스럽게 쓰면서 영화속 긴장을 풀어주고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여성에게 보다 남자 관객들이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본인도 안다. 실제 생활속에서 자기 주변에 한 명쯤은 있을 것같은 살아있는 ''아저씨'' 캐릭터들이기 때문이다.
유해진
그에게 2천만 배우라는 무시못할 평가도 있다. ''공공의 적2''(전국 392만) ''마파도''(308만) ''혈의 누''(227만) ''주유소습격사건''(250만) ''공공의 적''(300만) ''신라의 달밤''(436만) ''광복절특사''(308만) ''라이터를 켜라''(132만) 등 기존 출연작을 감안한다면 이미 2,000만 관객들에게 자신의 연기력을 선보였다.
그의 코미디 연기는 관객들에게 늘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번에는 또 어떤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줄까 기대감을 갖게 하는 매력이 있다. 정작 유해진은 관객에게 코믹하게 비춰지는 모습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코미디 연기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내게 주어진 캐릭터에 충실하기 위해 분석하고 고민한 것이지 관객들을 웃기려고 의도적으로 애드리브 한적은 단 한번도 없다"는 설명이다.
''왕의 남자'' 관객 각자에게 울림이 있었을 것''왕의 남자''에서 연산 정진영, 장생 감우성, 공길 이준기가 비극의 인물이라면 육갑의 유해진은 희극의 인물이다. 주인공들의 비극은 육갑 칠득 팔복 남사당패의 웃음속에서 더욱 슬퍼진다. 특히 육갑의 코믹하고 현란한 애드리브는 영화속에서 시종일관 관객들의 배꼽을 잡게 만들고 긴장감을 이완시킨다. 다시 말해 관객의 마음을 쥐었다 폈다 했다.
주 배경이 되고 있는 남사당패의 마당놀이는 온전히 육갑 칠득 팔복이의 주무대. 이들의 걸판진 육담은 관객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제작진도 놀란 열광적인 관객반응은 육칠팔의 애드리브에서 비롯됐다.
"웃기자고 마음먹고 애드리브를 한게 아니에요. 어떤 상황에서 엉뚱한 애드리브가 터졌다면 오히려 극중 몰입이 반감만 돼요. 애드리브도 결국 극의 흐름을 잘 탈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지 결코 웃음이 애드리브는 아닙니다. 사실 ''이건 뭐 하기만 하면 사람이 죽어나가냐''하는 육갑의 대사에서는 박수까지치면서 웃으시던데 그런 애드리브는 결코 웃음을 위해 만든 대사가 아니죠. 왕의 측근들이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해 교묘히 마당놀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상황을 빗대서 한 대사인데 반응은 예상외로 웃음으로 터져나온 거죠."
유해진이 보는 ''왕의 남자''의 괴력의 흥행 비결은 뭘까? "장생의 외줄타기처럼 인생은 그렇게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 한것 같아요. ''어찌 됐건 흘러가는 한 세상 크게 한판 놀아보자''고 외치는 남사당패의 인생관이 어쩌면 바로 우리의 실제 모습아닐까요."
연산,녹수, 공길, 장생의 인생 모두가 다른 것 같지만 결국 허망한 인생살이를 보여주는 근원적인 울림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순리''가 있다
운동선수가 체력이 바닥이 나는 것처럼 연기자에게 종종 고갈된 연기력이 관객에게 비쳐질때가 있다. 패턴화되는 연기에 대해 눈치빠른 관객들은 금방 알아차린다. 유해진도 그걸 알고 있다. 그는 뭔가 허전해지는 내면을 채우는 재충전을 위해 여행을 훌쩍 떠난다.
유해진
때로는 배낭하나 매고 여수 앞바다에 내려가 동네 사람들하고 소주한잔 걸치기도 하고 유럽이나 미국 등 해외로 배낭하나 달랑매고 자신을 객관화 시켜 바라볼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그동안 몰랐던 자신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는 여행을 취미이자 연기 재충전의 카드로 활용한다.
''명품 조연''의 평가를 받는 유해진. 이문식 김수로 성지루 같은 선후배 동료배우들이 올해초에는 드디어 주연 영화를 찍고 있다. 그에게도 욕심이 나지 않을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모든 일에는 ''순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분들이 주연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결국 순리대로 이제 주연을 할 때가 온 것이라고 보고 내가 아직 주연이 아닌 것은 결국 그 순리에서 때가 아직 안 된 것이라고 보면 되죠. 헤헤헤"
단추구멍처럼 작고 날카로운 눈매, 돌출 치아, 강해보이는 윤곽이 그의 실체를 좀 많이(?) 가리고는 있지만 보면볼수록 얘기를 하면 할수록 그 얼굴에 정감이 가는 배우, 바로 유해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