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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거지"꿈꾼 고(故) 이성규 감독은 어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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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낭만적 거지"꿈꾼 고(故) 이성규 감독은 어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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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규 감독이 직접 쓴 일대기

    13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고 이성규 감독(영화사 제공)
    지난 13일 간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이성규 감독의 유작 ‘시바, 세상을 떠나다’가 19일 개봉하는 가운데, 이 감독이 직접 쓴 일대기가 눈길을 모은다.

    15일 제작사 창작집단917과 하우즈크리에이티브가 공개한 일대기에 따르면 이 감독의 어릴 적 꿈은 낭만거지였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자신에게 낭만적 거지의 인상을 깊게 심어줬던 이로 이외수 작가를 꼽았다.

    그는 “그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 춘천의 모 골목에서다”고 회상했다.

    “당시 그는 내게 '낭만적 거지'였다. 그리고 다시 그를 만난 건 18살 소년 노동자로 공장에 다녔던 시절이었다. 그 이후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인연은 이어졌다. 춘천이란 공간은 생각보다 좁다. 그 인연의 이어짐이 영화 ‘오래된 인력거’까지 이어진 게다.”

    이 감독이 연출한 오래된 인력거는 2011년 개봉한 다큐멘터리로 인도의 캘커타에서 맨손과 맨발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인력거꾼 샬림의 이야기를 그렸다. 당시 이외수는 이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맡았다.

    다음은 이성규 감독이 이야기하는 자신의 일대기다.(전문)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린 시절은 영화 '시네마 천국'의 토토 같은 추억으로 넘쳐난다. 한 때 부모님은 춘천에서 극장의 매점을 운영하셨다. 소년 토토처럼 극장을 놀이터 삼아 숨바꼭질도 했고, 마술 같은 영사실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막연하게나마 영화에 대한 동경을 가졌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릴 적의 첫 꿈은 영화감독이 아니라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 같은 영사기사였다.

    누구나 그렇듯이 어릴 적 장래희망은 상황과 주변 환경에 따라 숱하게 바뀌기 마련이다. 꿈은 커가면서 여러 번 바뀌곤 했다. 지금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40대 후반의 제작자면서 연출자로 살고 있다.

    10살 때의 기억이다. "얘야. 너는 이 담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술 한 잔 드시던 아버지가 내게 불쑥 던진 질문이다.

    보따리 장사꾼이었던 아버지는 강원도 철원 지역을 둘러보고 한 달 만에 돌아오셨다. 방랑자였던 아버지는 참으로 다양한 일을 했다. 내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첫 직업은 군인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아버지는 오랫동안 주민등록이 없는 무적자였다. 결혼하면서 주민등록이란 것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큰아들인 나와 바로 밑 남동생을 낳고 나서 아버지는 군대에 가셨다. 그리곤 월남으로 가는 배에 오르셨다. 월남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전쟁터로 지원한 것이다.

    월남에서 돌아오신 뒤부터는 춘천의 극장에서 매점이란 것을 하셨다. 그리곤 작은 구멍가게를 했고 그 옆에 작은 식당 하나도 만드셨다. 돈이 조금씩 벌리면서 아버지는 집지을 생각을 하셨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앓아 온 큰아들의 기관지 천식과 간질 탓에, 아버지의 돈은 병원으로 고스란히 옮겨졌다. 내 기침 소리와 발작 한 번에 아버지가 꿈꿨던 집의 기둥이 하나씩 지워져 나가던 때였다.

    모든 기둥들이 아버지가 그렸던 설계도에서 지워졌을 즈음부터 아버지는 보따리 장사꾼으로 나섰다. 병아리를 비롯한 아버지의 짐 꾸러미엔 참으로 많은 것이 채워졌다. 그것을 돈이란 것으로 바꿔오셨다.

    내 병원비를 대기엔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심한 천식은 어린 아이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지만,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기만 했던 가족의 경제마저 뿌리째 흔들었던 우환이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정말로 대단했다. 늘 병치레를 했지만, 똑똑한 아들이라고 아버지는 믿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술 한 잔 하고 나면, 나를 앉혀놓고 장래 희망을 묻곤 하셨다. 그런데 그날 왜 그랬는지 기억은 없지만 나는 아주 엉뚱한 대답을 했다.

    "아버지, 저는 거지가 되고 싶어요." 보따리 장사에서 돌아온 일행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아버지는 아들을 동료에게 자랑하고픈 생각에 장래 희망을 물으셨던 것인데, 난 거지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전까지 내 꿈은 의사일 때도 있었고, 판∙검사일 때도 있었다. 제헌절에 태어난 아이니까 법조인이 되어야 한다고 아버지는 은연 중에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주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신세가 어린 나에게도 고통이었기에 의사가 되어서 세상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대답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거지가 되겠다고 대답했으니, 아버지의 술자리는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뭐라고? 거지? 거지가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알면서 하는 소리냐?" 아버지의 목소리엔 노기가 깔렸다. 무겁기까지 했다.

    "네 알아요. 거지는 참으로 낭만적인 직업 같아요." 순간 볼 짝이 뜨거웠다. 아버지의 오른 손바닥이 나의 왼쪽 뺨을 후려친 것이다. 나는 그날 밤 한 시간을 넘게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았다.

    이후 장래 희망을 말할 때마다 그것이 아버지의 의도와 맞지 않으면 두들겨 맞곤 했다. 무용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해서 연탄집게로 맞았고, 연극을 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을 땐 발가벗겨져서 우산대로 두들겨 맞다가 길거리로 내쳐지기도 했다.

    곡마단의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던 적도 있다. "그래 그렇게 되고 싶으면 몸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하니까 식초나 쳐 마셔라!"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아버지로부터 식초를 강제로 먹어야 하는 고문(?)을 당했어야 했다. 매맞지 않는 경우는 외교관 의사 과학자 판사 등을 이야기할 때였다.

    그러셨던 아버지는 내 나이 서른한 살 때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병석에 누워계셨던 동안 아버지는 너무도 행복해하셨다. 그렇게 기대를 걸었던 큰아들의 모습을 매일 아침 텔레비전에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 이성규 감독이 연출한 오래된 인력거와 시바, 인생을 던져 포스터
    나는 93년 가을부터 'KBS 전국은 지금'이란 프로그램에서 '이성규의 현장 25'란 꼭지의 리포터 겸 작가였다. 텔레비전에서 사회의 비리와 부조리를 고발하는 리포터로 활약하는 큰아들의 모습을 보며 자식농사에 성공했다고 믿으신 것이다.

    방송을 시작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나는 당시 춘천의 장애인 시설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했다.

    여가활동으로 서양의 클래식 음악 감상회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가끔 지역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음악을 소개하곤 했다. 이를 계기로 라디오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작가를 부업으로 하다가 일에 재미를 붙이고선 사회복지사 일을 그만두고 전업 방송작가로 나서게 됐다.

    그때가 89년 봄이다. 초보 방송작가의 월급은 20만 원이었다. 사회복지사로서 받았던 월급은 70만 원이었다.

    그냥 일이 재미있다고 그런대로 괜찮았던 직장을 그만두고 방송 제작을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는 또 한번 내게 매를 들려고 하셨다. 이미 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기엔 이미 성장해버린 스물여덟 살이었다.

    춘천의 지역방송국에서 무척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녹음기를 들고 혼자 라디오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고, 어떤 경우엔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되기도 했다.

    93년 가을엔 서울의 여의도로 올라와 TV 프로그램의 시사꼭지를 진행하는 리포터 겸 작가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있지 않아 TV 리포터라는 직업을 접었다. 매일 아침 TV에 얼굴을 들이미는 출연이 체질에 맞지 않았다.

    방송사 안에서 이른바 계약직 PD라는 것을 1년이 약간 넘게 했다. 이후 방송사를 나와 독립 프로덕션에서 온갖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방송에 대한 열정이나 사명감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발을 디딘 방송인으로서의 직업이었다.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지금,다큐멘터리 PD를 포함하여 갖가지 직업을 가지고 대구에서 살아가고 있다. 일 년에 두 개 정도의 작품을 만드는 PD로 혹은 시사주간지에 기사도 쓰고 대학에서 시간 강사로 다큐멘터리 제작론을 강의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인도 식당을 만들어 주방장을 하고 있다. 참으로 다양한 직업을 동시에 가진 셈이다. 빛 좋은 개살구라고 뚜껑을 열어보면 별 게 아닌데도 껍데기만으로 보면 대단한 것처럼 보인다.

    어릴 적 왜 거지가 되겠다고 대답을 해서 매를 벌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즈음에 당시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책 읽기에 빠졌었는데, 모르긴 해도 어떤 책에 나오는 거지 이야길 읽고선 그렇게 대답한 게 아니었나 싶다.

    몇 년 전 히말라야 촬영을 마치고 네팔의 카트만두에 있을 때, 숙소에서 허영만의 '고독한 기타 맨'이란 만화책을 읽었다. 주인공 강토가 어릴 때 자신의 꿈이 '거지'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지가 되고 싶은 이유도 '낭만적인 직업이어서'란다. 기억은 어린 시절의 영상으로 헤집고 들어갔다. 10살 때 '거지'라고 장래희망을 이야기했다가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새삼 다시 떠올려졌다.

    하지만 난 여전히 거지가 되는 꿈을 가슴 속 깊은 곳에 안고 산다.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인 그래서 다분히 몽환적인 발상인지도 모른다.

    나이 마흔이 넘고부터는 오랫동안 잠잠했던 지병이 다시 도지고 있다. 아버지의 꿈이었던 집의 기둥을 하나씩 빼먹었던 기관지천식, 거기에 당뇨병 간경화 허리디스크. 당뇨합병증으로 말미암은 치주염은 모든 치아가 빠져나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란 말을 들을 정도다.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세상의 험한 곳을 다니며 몸을 돌보지 못한 결과다.

    인도의 갠지스 강 혹은 어느 역 앞 거리에서 술 냄새 풍기며 어줍지 않은 인생철학을 늘어놓는, 그러다 길모퉁이에서 삶을 마감하는 부랑자로서의 거지. 은둔과 실종이다.

    ‘은둔’과 ‘실종’은 내게 묘한 편집증을 안겨주는 단어다. '낭만'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슬그머니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새겨 놓곤 하지만, 나는 안다. 결코 거지가 될 수 없음을. 아버지의 세찬 뺨 때리기의 얼얼함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낭만적인 거지'로서의 삶을 꿈꿔왔던 그 10살의 소년은 이제 다큐멘터리 연출자로서 배낭과 카메라를 동무 삼아 집시인양 인도를 중심으로 세계 곳곳을 일삼아 놀이 삼아 다닌다.

    소년의 바람은 소유에 연연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세상 모든 곳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순수한 희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그의 꿈은 이루어진 셈이라 할 수 있겠다.

    어느덧 중년의 나이. 아직도 낭만을 꿈꾸는 국제거지로서 보따리행상을 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방랑의 길을 걷는다.

    바라나시의 후미진 골목 어귀에서 소외되었으되 희망을 잃지 않는 따스한 눈빛들과 차 한 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한 소년. 그 길에서 자유롭게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나는 정말 행복하다.

    아버지의 영혼은 텔레비전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을까.

    "보이세요? 여러분들. 지금 나오고 있는 저 다큐멘터리는 말이죠. 우리 아들이 만든 거예요. 정말 멋지게 만들지 않았어요? 저 놈이 열 살 때 거지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에 무슨 소린가 했더니 정말 거지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 다녀요. 배낭에다 카메라만 들고 말이죠."

    간혹 이유 없이 어느 쪽 뺨인가 얼얼하게 느껴지곤 하는걸 보면 지금도 아버지는 내게 좋은 작품 만들라고 응원하고 계심이 틀림없다.

    무엇을 조금 알면 독단적이 되고/조금 더 알면 묻게 되고/또 조금 더 알면 기도하게 된다.-라다크리슈난(인도의 철학자)

    PS : 이제사 하는 이야기지만, 초등학교 3학년의 내게 낭만적 거지의 인상을 깊게 심어줬던 이는 이외수 샘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 춘천의 모 골목에서다.

    당시 그는 내게 '낭만적 거지'였다. 그리고 다시 그를 만난 건 18살 소년 노동자로 공장에 다녔던 시절이었다. 그 이후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인연은 이어졌다.

    춘천이란 공간은 생각보다 좁다. 그 인연의 이어짐이 영화 '오래된 인력거'까지 이어진 게다.

    외수샘은 "우리 두 사람은 예술적 코드가 같아요"라고 말씀하셨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낭만적 거지' 코드가 같다. 이외수 샘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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