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트래블포커스)
벨기에 하면 흔히 떠오르는 도시는 브뤼셀.
일국의 수도답게 정치.행정.문화의 중심 노릇을 단단히 하고 있는데, 사실 벨기에를 제대로 여행하려면, 그리고 낭만적인 목적지를 찾는다면 의당 앤트워프로 발길을 옮길 일이다.
스헬데 강을 끼고 있는 작고 아름다운 이 항구 도시에 중세와 현대가 천연덕스럽게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혼재'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마구잡이로 섞여 있다는 것은 아니고 마치 암수 한 몸처럼 흠결 없이 제대로 어우러져 있다는 뜻이다.
앤트워프 역시 유럽의 여느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크게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다른 도시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16세기 무렵 조성된, 요새에 둘러싸인 구시가지 외곽에 19세기 시가지가 따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센트럴 앤트워프에서 차를 타고 수십 분만 달리면 중세에서 현대로 간단한 시간 여행이 가능한 셈이다. 하지만 앤트워프를 대표하는 주요 명소들은 대부분 도시의 북쪽 지역에 위치한 구시가지 주변에 밀집되어 있다.
◈ 마르크트 광장에서 출발하다 = 앤트워프 여행의 중심에 마르크트 광장이 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그 유명한 노트르담 대성당을 비롯해 시청사, 길드 하우스 등 15세기 이후의 건물들이 연잇는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앤트워프 시민들이 즐겨 찾는 근사한 분수대가 세워져 있는데, 분수대 꼭대기에 한쪽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동상의 이름은 브라보다.
폭정을 일삼던 앙티곤의 팔을 잘라 스헬데 강에 던져버렸다는 용감한 로마 병사다. 앤트워프의 지명도 'handwerpen(손을 던지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브라보에게 갈채를'이다.
눈길은 대성당에서 가장 오래 머문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위용과 레이스 세공 같은 첨탑의 섬세한 구조에 감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1352년에 착공, 169년에 걸쳐 높이 123m에 이르는 네덜란드 최대의 고딕 건축물이 완성된 것이다.
1차 완공 후 부를 자랑하는 시민들이 확장을 바랄 때마다 계속 증축을 시도했는데, 수차례 화마를 입은 데다 자금난까지 겹쳐 1535년에 대역사의 종지부를 찍었다. 성당 내부에는 벨기에 대표 화가 루벤스의 그림 5점이 전시돼 있다.
그중 벨기에의 보물이라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중앙 돔 천장에 그려져 있는 '성모승천' 등은 루벤스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대성당만큼은 아니어도 시청사 역시 찬연한 외양을 지녔다. 1564년에 세워진 벨기에 최대의 네덜란드풍 르네상스 건물로 평가받는데, 처음에는 다른 도시와 같은 고딕 양식으로 건설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전쟁으로 건축 자재가 달리자 그만 단념했던 것. 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던지 20년 후 다시 경제력을 회복하고 전혀 새로운 건축 스타일을 도입, 지금의 시청사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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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과 시청사 주변에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이 섞여 음료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노천 카페의 풍경이야말로 유럽을 특징짓는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은 역시 벨기에 맥주다.
벨기에 전역에서 판매되는 맥주의 종류만 해도 무려 350종 이상이며, 각 브랜드마다 컵이 따로 마련돼 있을 정도로 맥주와 맥주 문화가 풍성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실제 판매량은 신통치 않다는 점. 음주 문화에 있어 벨기에 사람들이 지독한 구두쇠인 까닭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달랑 맥주 한잔 시켜놓고 두세 시간을 보낸다. 술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담소를 즐기기 위해 카페나 바를 찾기 때문이다.
딱 한 잔의 맥주를 마시고 아무런 부담 없이 각자 술값을 내고 자리를 뜨는 사람들. 그래서 밤 10시가 지나도 벨기에 거리에서 술에 취한 사람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 중세의 한복판을 걷다 = 대성당과 시청사 이외에 '앤트워프의 중세'를 맛보고 싶다면 고성이었던 스텐 성의 일부를 개조한 해양박물관과 100살을 훌쩍 넘긴 아르누보 건물들이 즐비한 유대인 거리 부근을 찾으면 된다.
아르누보 양식의 특징은 사치스런 재료의 사용과 섬세한 디테일, 치열한 장인 정신, 그리고 아름다운 물결 모양의 곡선 무늬에 있다.
식물과 같은 유기적 형태에서 영감을 얻어내는 아르누보는 황폐한 도시적 분위기가 제거된 머나먼 환상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유동적인 형식을 선호해 이전까지 애용되지 않았던 담쟁이덩굴을 감아 붙인 모습과 수선화, 단풍나무, 백조, 학, 뱀 등의 장식 문양을 즐겨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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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대상에 들이미는 잣대가 그렇듯이 아르누보에 대한 평가 역시 엇갈린다.
자연물의 유기적인 형태로부터 모티브를 찾은 까닭에 비대칭적이고 생동적이어서 과거의 장식미술에 비해 혁신적이라는 점은 긍정의 평가.
그러나 작가의 개성과 장식 자체에 지나치게 함몰돼 너무 사치스러우며 결과적으로 과잉 장식의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었다는 점은 부정의 평가다.
새로운 시대의 일시적인 취미에 불과했으며, 기계 시대에 기능주의 전통이 정착하는 과도기적 현상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점 또한 인색한 품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