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열제 하나 줘요." / "누가 드실 건데요?"
"달라면 빨리 주기나 할 것이지 왜 물어봐요?" / "해열제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까요. 누가 열이 있는데요?"
"열은 없고 애가 발진이 돋아서요." / "예? 발진에는 피부약을 써야지, 해열제는 왜…?"
"옆집 언니가 속열 때문에 피부 발진이 올라온 거라고 해열제 먹이래요." / "그러지 마시고 길 건너 피부과 데려가 보세요."
"별꼴이야! 그냥 주면 되지! 약국이 여기밖에 없나?" (꽝! 하고 문 닫히는 소리)
약사보다 옆집 언니 말이 먹히는 현실. 약사의 위치를 알려주는 일화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의약분업이 2000년부터 시행되면서 약국가 풍경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주민과 친하게 지내는 마음씨 좋은 약사 아저씨가 수십 년째 운영해 오던 동네약국도 근처에 처방전을 발행하는 병원이 없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약사'' 하면 경기나 시류를 타지 않고 안정적인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전문직이라는 인식도 이젠 옛날 말이다. 그동안 약대 졸업생들에게 약사 면허는 일종의 보험과도 같았지만 이제 약국은 열기만 하면 무조건 유지가 가능한 업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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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약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자판기로 전락한 현실이 아닐까.
약사가 의사의 처방전에 나와 있는 대로만 약을 조제하고 투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약사가 되려고 그렇게 공부하고 시험까지 치를 이유가 없다. 그냥 약 이름만 구분할 줄 알면 된다.
처방대로 조제했을 경우 약이 오·남용되거나 과잉 투약되는 것은 아닌지, 의약품의 부작용이 있는 것은 아닌지 철저히 검토하는 일이 먼저다. 의사는 약사보다 약물의 상호 작용이나 제형에 대한 지식이 약하므로 잘못된 처방을 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훼스탈이나 둘코락스 같은 장용정, 빈혈에 쓰는 훼로바유, 천식에 사용하는 아스콘틴 같은 서방정은 부수면 안 되는 정제다. 그런데 이를 반으로 나누거나 가루로 만들도록 처방하면 어떻게 될까? 약의 효과가 없어지는 것은 기본이고, 둘코락스 같은 변비약의 경우는 위에서 녹으니 장뿐 아니라 위도 흔들어 위경련과 함께 구토를 일으키게 된다. 서방정의 경우는 약이 일시에 녹아 혈중 농도가 일시에 높아지게 되고 짧은 시간에 배출돼 지속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 ― 김태욱, 인천 다사랑약국 약국장
"우려스러웠던 점은 병원에서 내려오는 처방전의 내용이었다. 바로 항생제 사용 빈도! 3차 항생제까지 상당히 높은 비율로 처방이 나왔다. ''''이래서 의약분업을 해야 하는 거였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동안 병원 내에서 계속 이렇게 사용해 왔을 텐데, 외부로 드러나지 않으니 얼마만큼 항생제를 남용해 왔는지 가늠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 최정림, 파주 정은약국 약국장처방전이 필요 없는 일반의약품을 팔 때도 약사의 전문성이 발휘돼야 한다. "차 빼야 하니 약 좀 빨리 달라"는 사람, 주의 사항을 설명하는 약사의 복약 지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휴대전화만 쳐다보는 사람 등등 약사를 환자가 달라는 대로 약을 주기만 하면 되는 사람으로 여기는 풍토에도 맞서야 한다.
그렇다고 약사가 환자를 상대로 날을 세울 수도 없다. 약사에게 환자는 "다툴 수도 없으며, 다투어도 이길 수 없는 상대"다. 약사의 복약 지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환자가 약을 제때 제대로 복용하지 못하면 환자의 병환은 차도가 없거나 심한 경우 더 악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약사, 내일 날씨는 흐림?이런 이야기만 보면 약사라는 직업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약사의 근무 환경만 보면 더더욱 그렇다. 약국 약사들은 한정된 공간에서 장시간 근무해야 한다. 주 5일, 하루 8시간 근무하는 일반적인 직장인들에 비해 업무 강도가 높다. 식사 시간을 따로 내기가 어려어, 점심시간에 약국을 방문한 환자에게 ''입에 음식이 든 채로'' 복약 상담에 나서야 하는 일도 수두룩하다.
또 수많은 환자를 상대하면서 겪는 스트레스도 상당한 편이다. 신약이나 새로운 건강 의학 정보에 민감해야 하고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일부 약사들은 종일 근무가 끝난 뒤에 스터디 모임을 하거나 강의를 들으러 가기도 한다.[BestNocut_R]
병원 약사의 경우, 주말과 평일을 가리지 않고 야간에도 병동에서, 응급실에서 끊임없이 날아오는 처방을 처리해야 한다. 토요일 격주 근무는 기본이고,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일요일 당직도 서며, 일부 병원에서는 주간 근무 약사가 야간 당직까지 서기도 한다.
대외적 환경 변화와 더불어 이러한 악조건들을 보건대 약사의 직업적 전망이 흐린 것일까? 오히려 그 반대다. 질병의 치료에 관심을 뒀던 과거와는 달리, 식생활 개선과 의약품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늘어 긴 노후를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은 질병의 예방에 적극 나서고 있다.
홍성광 약사는 "사회적인 관심의 변화가 ''케어(care)''에서 ''큐어(cure)''로 바뀌고 고령화 사회가 됨에 따라 건강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 발맞추어 약사의 직능이나 영역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보면 "건강 전문가로서 약사의 전망은 밝다"라고 말한다.
"미래의 약사를 무척 불투명하거나 불안정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약사들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이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노력하는 한 의약품 전문가가 아닌 국민 건강 도우미로서 거듭날 수 있기에 미래가 밝다고 단언할 수 있다." ― 홍성광, 서울 동오약국 약국장◇ "약사 하길 잘했다"고 느낄 때''약사 하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드는 건 역시 보건·의료인으로서 제 역할을 해내며 보람을 느낄 때다. 40년 가까이 개국약사 생활을 하고 있는 김태욱 약사는 "늦은 나이까지 지역 주민의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고 자력으로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은 개국약사에게만 주어진 축복"이라고 말한다.
서울시 약무직 공무원으로 보건소와 시립병원에서 장기간 근무해 온 강성심 약사는 "어려운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돕는 것도 좋을 텐데, 돕는 것 자체를 업무로 한다는 것"에서 오는 만족감이 크다고 말한다.
약사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이들도 많다. 늘픔약사회에서 활동하는 장보현 약사는 ''''현재는 약사가 자영업자이다 보니 매출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라고 지적하면서 ''''일하는 모두가 주인인 약국''''을 꿈꾸며 ''''공동체 약국'''' 늘픔약국을 열었다.
"늘픔약국 1호점은 그러한 우리의 지향을 담은 ''실험실''이었다. (...)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다른 ''구조''가 있다. 우선 약사들은 서로가 정한 월급을 받는다. 나머지 수익은 약국에 재투자하거나 지역 활동에 쓰고, 쪽방 봉사 활동의 의약품 공급에 쓰인다." ― 장보현, 늘픔약국 약사
많은 약사들이 복약 지도나 일반약 판매뿐 아니라 환자의 건강 상담, 나아가 인생 상담까지도 해 주는 ''동네 사랑방 같은 약국''을 자처하고 있다.
"따뜻한 마음으로 약국을 찾는 환자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약사가 참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약사로 살아간다는 것이 감사할 때가 많다.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소중한 가치인 건강에 대해 상담해 주고 그와 관련한 정보를 서로 나눈다는 것은 더없이 소중한 일이다. 그래서 언뜻 보면 좁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만이 존재할 것 같은 약국에서도 오늘은 무슨 일이 있을까 기대하는 것이다." ―이재관, 부천 자연약국 약국장급변하는 사회에서도 약사들이 약사로 계속 남아 있는 이유는 이처럼 약사 본연의 업무에서 오는 보람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는 약사로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이 있으며 그 경계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변화에 적응하면서도 약사로서 기본을 지키겠다고 다짐해 본다." ― 곽현설, 제주 한라약국 약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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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약사가 말하는 약사≫는 ''부키 전문직 리포트'' 시리즈의 18번째 책으로, 우리 사회 보건·의료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약사의 실상에 대해 26명의 약사들이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약국뿐 아니라 마트, 병원, 제약회사, 공공기관, 시민단체 등 다양한 장소에서 다채로운 역할을 해내는 약사의 세계를 조명하며, 메디컬 라이터, 약국 인테리어 디자인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도 다루고 있다.
의약분업이나 일반 약 슈퍼 판매, 약대 학제 개편 등 급격한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약업계의 풍경, 새로운 조제·판매 시스템 등을 도입하며 IT 사회에 부응하고자 하는 노력들, 보건 의료인으로서의 애환과 책임감 등을 엿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