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섬' 오명에 10년 간의 학살…그 날 '제주4·3'의 비극[타임라인]
1945-08-15 기다렸던 해방…좌우 대립 '극심'
우리나라는 이날 마침내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났다. 광복 직후 자주 독립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한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자, 제주에서도 대정면 건준을 시작으로 9월 10일 제주농업학교에서 제주도 건준이 결성됐다. 중앙의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재편됨에 따라 제주도 건준 또한 9월 22일 행정조직을 표방한 인민위원회로 개편됐다. 제주도에 들어선 미군정은 도청과 경찰의 요직에 일제 때의 관리를 그대로 앉혔고, 서서히 우익인사들을 조직화시켜 인민위원회에 대항할 세력으로 키워나갔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의 대립으로 치달았으며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도 좌우로 이념이 갈라졌다. 사진은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제주지구 총사령관으로 파견된 브라운 대령(오른쪽).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
1947-03-01 말밥굽의 다친 아이, 이어진 3·1절 총성
이날 오후 2시 45분쯤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주민 6명이 숨졌다. 당시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차였고, 경찰이 다친 아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졌다. 이에 무장경찰들은 총격을 가하며 대응했다. 희생자 가운데 15세 학생과 갓난아기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된 여성도 있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이 사건 이후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됐다.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
1947-03-19 '빨갱이 섬'으로 몰아간 경찰
조병옥 경무부장은 이날 담화문을 발표하며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라고 주장했다. 이어 해당 사건을 북조선과의 공모를 통해 발생했다는 내용을 공표해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몰아갔다. 미군정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적이거나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의 본거지"라고 기록됐다. 앞서 민·관 총파업이 지난 10일 시작됐다. 도청 등 관공서는 물론 은행·회사·학교·운수업체·통신기관 등 도내 166개 기관 단체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현직 경찰관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이후 파업 혐의로 간부들이 연행됐고 4월 10일까지 500명이 붙잡혔다. 이듬해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검거됐다. 사진은 산으로 피신한 주민과 아이들.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
1948-04-03 공격에 나선 남로당…인명피해 이어져
이날 새벽 2시쯤 좌익 진영의 남로당(남조선노동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350명의 무장대는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했다. 이 사건으로 경찰(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과 우익인사 등 민간인(사망 8명, 부상 19명) 그리고 무장대(사망 2명, 생포 1명) 등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앞서 이들은 남한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뜻을 모았고, 조직의 핵심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자 결국 결사 항쟁을 하자는 쪽으로 뜻을 모았다. 사진은 캘리버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경찰관.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
1948-04-29 극우 세력 횡포로 야기, 평화협상 맺었지만…
미군정으로부터 사태 진압을 명령받은 국방경비대 9연대는 해당 사건을 극우 세력의 횡포로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고 무장대와의 평화협상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다음날 '현재 병력으로 진압이 가능하다'는 슈 중령의 보고서로 인해 미군정 하지 사령관은 무력진압 방침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5월 1일 우익 청년들이 오라리 마을에 방화를 저질렀지만, 미군정과 경찰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조작했다. 사진은 불타는 오라리 마을.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
1948-05-10 5·10 단독 선거 거부한 무장대, 집중 공격
무장대는 이날 5·10 단독선거를 거부하고 지난 7일부터 10일까지 선거사무소를 집중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선거관계 공무원을 납치·살해하는 한편, 선거인명부를 탈취하기도 했다. 다수의 주민들은 무장대에 동조하여 입산, 선거를 거부했다. 이후 미군정과 조병옥 경무부장은 '강경 진압 방침'을 선포했고, 전국에서 차출한 응원경찰 450명을 추가로 파견하는 한편 서북청년단원을 연이어 증파했다. 5월 27일까지 붙잡힌 입산자는 3126명에 이르렀고, 6월 중순에는 6천여 명에 달했다. 무리한 토벌이 이루어지자, 일부 병사들도 5600발의 탄약 및 무기를 가지고 주둔지를 빠져나갔다.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
1948-08-15 이승만 대통령 선출…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가 이날 출범했다. 앞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지난 5월 실시됐으나,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 참가 세력과 많은 중도계 인사들이 참가를 거부함으로써,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그리고 일부 중도세력만 출마했다. 당시 이승만은 선거 결과 가장 많은 당선자를 낸 무소속 중 우익 성향의 의원들을 끌어들여 국회에서 다수의 세력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7월 중순경부터 남한 전역에서 '지하선거'가 열렸다. 이는 북한 정권 수립을 위한 것으로, 제주도에서도 백지에 이름을 쓰거나 손도장을 받아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하지만 무장대의 강요에 마지못해 가명으로 이름을 쓰고 손도장을 누르는 경우가 많았고, 이 사건이 훗날 수많은 인명 피해를 발생케 했다. 사진은 제주도를 시찰한 이승만.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
1948-10-11 초토화작전 실시
이승만 정부는 이날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하지만 19일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서 결국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보고, 이후 대대적인 강경 진압을 지시했다. 송요찬 제9연대장은 20일 무허가통행자는 총살에 처한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과 소련 냉전이 심화되면서 아시아에 공산주의로부터의 방벽을 구축하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반영됐다. 경향신문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캡처
1949-04-01 5개월 간 무차별 살상…희생자 3만여 명 추정
이날 미군 정보보고서에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천여 명의 주민이 희생됐다. 그 중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됐다. 앞서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단 살상이 행해졌다. 4·3사건 전 기간 동안 희생자 수는 2만 5천~3만여 명으로 추정됐다. 당시 가족 중 한 명만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며 총살해 오히려 주민들을 도피 입산하게 만들었다. "내려오면 살려 준다"는 선무작전에 따라 백기를 들고 하산한 주민들은 제주읍내 주정공장 등에 갇혀 있다가, 일부만 석방됐다. 상당수는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사형되거나 육지 형무소로 이송됐다.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
1950-06-25 행방불명된 사람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처형됐다.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됐다. 8월 17일 제주도내 4개 경찰서에 1120명이 예비검속됐고, 이들 대부분은 서귀포, 제주항 앞 바다, 제주읍 비행장,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암매장됐다. 사진은 당시 하산하는 주민들.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
1957-04-02 10년만에 종식
이날 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이 구좌면 송당지역에서 생포되면서 4·3 사건은 종식됐다. 1947년에 일어난지 10년 만이다. 앞서 일제강점기 당시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인들은 광복 이후 귀향했으나, 4·3사건으로 생활이 불안해지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이어진 '북송(北送)' 때 북한으로 가기도 했다. 이들은 고향 제주도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이념과 분단의 장벽 때문에 눈앞의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
2025.04.20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