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마을이 아이를 키운다' 할배샘의 옛 이야기 한 자락 ▶ 글 싣는 순서 ①[르포]'마을이 아이를 키운다' 폐교로 학생이 돌아오다 ②[르포]'마을이 아이를 키운다' 숲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0000이다 ③[르포]'마을이 아이를 키운다' 할배샘의 옛 이야기 한 자락 (계속) 울산교육공동체거점센터. 입에 잘 붙지 않는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다들 땡땡마을이라고 부른다. 훨씬 쉽다. 땡땡마을이라는 뜻이 갖는 의미는 둘째치고. 여기에 처음 온 사람들이 금세 땡땡마을이라고 부르고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땡땡마을이 입에 붙을때쯤. 다음 현장체험학습을 생각한다. '세번째 체험학습은 어디……'   땡땡마을 1층 입구 옆 호호커뮤니티홀에 앉아 취재수첩을 만지작거린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지. 호호커뮤니티홀 정면 노란 벽에 흰 천이 걸려 있다. 천 위에는 각양각색 헝겊이 덧대어 있다. 그림이며, 글자며, 단색으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별, 달, 나무. 자음과 모음인 ㅁㅇㄱㅇㄱㄷㅊ 그리고 땡땡마을. 정면 벽 왼쪽으로는 여느 카페나 식당에서 볼 수 있는 통창으로 된 폴딩도어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로 초겨울 햇볕이 깊게 들어온다. 곧 크리스마스다. 더 추워지면 바깥 활동이 쉽지 않다. 겨울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학교들이 하나 둘 방학에 들어가면, 땡땡마을도 휴식기에 들어간다. 평일 오전 체험교실이나 오후 프로젝트교실에 하나라도 더 참여하기 위해선 서둘러야 한다. 조급해진다. 때를 놓지면 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동력이 떨어질 게 분명하다. 일이든, 배움이든. 초조한 마음으로 세번째 체험학습을 기다린다. 온양초등학교에서 출발한 관광버스 하나가 땡땡마을에 도착했다. 헛기침을 하듯 시동이 꺼지자 초등학생들이 내린다. 오리엔테이션 시작을 알리는 건 천상중학교에서 파견된 주광표 교사의 몫이다. 주 교사가 학생들에게 땡땡마을 주의사항에 대해 전달한다. 대부분 안전사고와 관련된 것. 주 교사는 경어체로 설명한다. 마치 초등학교 저학년을 맡은 담임 같다. 마을교사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한다. 교사들 중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다.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그 한 사람. 할아버지 선생님으로 불리는 이종욱씨. 마치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 홀로 서 있는 사람 같다. 낯설다. 심지어 거리감 마저 든다. 복장 때문에 나이가 더 많아 보인다. 누가 보면 선비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할로윈데이로 착각할지도. 조선시대 유생들이 썼다는 검은색 유건(儒巾)을 머리에, 비취색 두루마기를 몸에 걸쳤다. 오른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다. 부채에는 기와집들이 촘촘히 붙어 있는 마을이 그려져 있다. 화가가 마을을 조망하며 그린 그림인 듯 하다. 이종욱 할아버지가 부채를 흔들며 아이들을 지그시 바라 본다.   마을교사들 소개가 끝나자, 학생들은 담당 교사를 따라 체험교실로 흩어졌다. 할아버지의 교실은 2층 소리놀이터에 위치해 있다. 할아버지가 앞장 선다. 그 뒤를 온양초 2·4학년 학생 2명이 따라 간다. 그 뒤를 학생들을 보조하는 특수교사가 따라 간다. 다른 시간대에 사는 사람들이 기차놀이를 하는 것 처럼 줄지어 간다. 소리놀이터에 도착하자마자 이종욱 할아버지는 '할배'로 불리길 원했다.   아이들은 체험교실 문을 열자마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할아버지 선생님도 어색한데, 일반 교실과 다른 풍경이다. 가정집 거실 같은 마룻바닥이 깔려 있다. 중앙에는 통나무를 그대로 깎은 듯, 옹이 모양이 들어 있는 탁자들이 여러개 놓여 있다. 가장자리에는 천으로 싸인 1인용 쿠션들이 흩어져 있다. 두 아이의 발걸음이 쿠션쪽으로 빨라진다.   할배는 서당의 훈장과 닮았다. 그렇게 보이는 건 복장 때문이 8할이다. 김홍도의 <서당도>에 나오는 훈장의 모습과 흡사하다. 할배의 눈썹은 <서당도>에 나오는 훈장의 것과 비슷하게 생겼다. 숱이 많은 눈썹은 묵처럼 진하다. 할배가 입술을 꾹 다물 때는 내가 수학여행때 본 사찰 사천왕문에 서 있는 증장천왕의 표정과 닮았다. 하지만 수업이 시작되자 할배의 표정은 다문천왕 쪽에 더 가까웠다.   "얘들아, 여기 쿠션에 앉아도 되고 기대도 된다. 물론 누워도 된다. 가장 편한 자세로 있으면 돼. 눈을 감아도 상관 없어. 잠을 자도 된다. 귀만 열고 있으면 되는거야. 이 할배가 옛날 이야기를 한 자락 할려고 하는데…… 지운아, 민성아, 한 번 들어볼래?" 반전이다. 할배의 목소리와 몸짓은 겉모습과 달랐다. 엄숙과는 거리가 멀다. 아이들에게 부탁하거나 양해를 구하는 듯 하다. 심지어 달래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는지. 저 어른이 아이들을 다독거린다는 생각마저드니 애틋했다. 간식거리며, 옷매무새며, 손주들을 살뜰하게 챙기는 영락없는 시골 할아버지·할머니. 손주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할배 ·할매의 그 무엇이다. 할배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가져온 책 제목은 <태화강 일백리, 그 신비스런 길을 걷다>. 할배가 직접 지은 책이란다. 정확히 말하면 할배가 사화며 전설이며 옛 이야기가 있는 곳을 직접 찾아가 소리와 글을 모아 재구성했다. 하지만 책은 참고용일 뿐, 할배는 책을 읽어주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집중했다. 첫 이야기는 '잉어가 된 암행어사.' 줄거리는 이랬다. '쇠동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효성이 지극한 '김솔이'라는 여자아이가 살았다. 서울에서 내려온 '손바람'이라는 남자아이는 쇠동골에 잠시 살게 되었다. 서울 관직 생활을 하다가 건강이 나빠진 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가 쇠동골에 내려온 것. 솔이와 바람이는 소꿉동무이자 단짝이 되었고 장래까지 약속하게 된다. 그사이 바람이 아버지의 건강이 회복되면서 가족은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솔이는 매일 바람이를 그리워하며 기다린다. 솔이네 가족도 쇠동골을 떠나 외가가 있는 대리마을로 이사한다. 어느날 아버지가 몸져눕게 되자, 솔이는 아버지 건강에 잉어탕이 좋다는 얘기를 듣고 길을 나선다. 솔이는 연못 속 잉어를 잡으려다가 발을 헛디뎌 깊은 연못 속에 빠진다. 부모님이 연못가를 뒤졌지만 솔이를 찾지 못한 채, 슬퍼하며 돌아갔다. 이후 솔이는 연못가에 소나무가 되어 바람이를 기다린다. 서울에서 건장한 청년이 된 바람이는 과거시험에 합격해 암행어사가 된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백상들을 보살피는 임무가 주어진다. 바람이는 마음 한 켠에 어릴 적 헤어졌던 솔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 본다. 울산 울주군에 도착한 바람이는 솔이 얘기를 듣게 된다. 곧바로 솔이가 빠졌다는 연못을 찾는다. 그는 급한 마음에 연못으로 뛰어든다. 이미 죽어서 소나무가 된 솔이를 찾을 수 없었다. 바람이는 하늘에 소원을 말한다. "내가 죽거든 연못 속을 뒤져 솔이를 찾을 수 있도록 눈이 왕사발만한 잉어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세요." 소원대로 잉어가 된 바람이는 어제도 오늘도 솔이를 찾는다. 소나무가 된 솔이는 연꽃이 피고 지는 연못가에서 바람이를 계속 기다린다. 이 이야기는 울산 울주군 상북면 못안마을 연못가에서 전해진다. 실제 그런 연못이 있고 거기에 키 큰 소나무가 자라고 있단다. 여러 소나무들 중에 솔이 소나무가 있을까? 혹시 연못에서 잉어가 된 바람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할배는 옛 이야기에 흐르는 시간과 공간을 현재와 잇는다. 이야기가 전해지는 울산 울주군에 대한 소개도 잊지 않는다.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게 아니다. 질문이 중심이 된 대화에 가깝다. 중간중간 아이들이 얼마큼 알고 있는 지 확인하고 다음 줄거리를 이어가는 식이다.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의 징검다리를 하나 하나씩 넘어간다.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게, 마치 '스무고개' 놀이를 하는 것 같다. 이런 식이다.     "할배가 오늘 들려줄 옛날 이야기는 '잉어가 된 암행어사'야. 사람이 잉어가 되는 이야기인데. 신기하지? 너 잉어 알어? 그래, 호수나 물에 사는 물고기지. 맞어. 암행어사는 알아? 잘 모르겠지. 암행어사는 나쁜 관리를 혼내주는 좋은 일 하는 사람이야. 이 할배가 태어나기 전에 전해오는 이야기야." 옛 이야기를 끝까지 잘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기우였다. 아이들이 발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곳 울산이라는 지역성을 담는다. 모든 이야기는 교훈을 남기고 끝났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 자식된 도리인 효, 친구들 간의 우정과 의리도 빠지지 않는다. "지운아~ 아빠 엄마가 우리 지운이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알지? 그런 아빠, 엄마에게 뭘 해드리면 좋을까?  그럼 오늘 집에 돌아가면 사랑한다고 말씀드리고 꼭 안아드리는 건 어떨까?" "할배~ 사랑해요. 저도 안아주세요." 옛날 이야기가 끝나자 아이들은 할배와 같이 전통놀이를 한다. 오늘은 딱지치기다. 딱지를 만는다. 각자가 좋아하는 색깔의 색종이를 고른다. 그림이나 글도 넣어 나만의 딱지를 만든다. 아이들은 딱지를 만들면서 다시 할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할배가 어릴 때는 종이가 귀했어. 문이나 벽에 종이를 발랐지. 지금은 다 유리로 되어 있지? 그만큼 종이가 귀한 시절이 있었어. 종이에 글을 쓴다는 건 부잣집에서 가능했거든. 선비들이, 형아들이, 쓰고 남은 자투리 종이가 있거든. 이것을 받은 아이들이 접어서 딱지치기를 했어. 딱지치기로 딴 딱지를 집에 가져가는 거지. 그걸 풀어서 공부를 했어. 그런데 왜 딱지냐? 예전에 종이 재료가 닥나무였어. 작은 크기의 종이를 딱지라고 불렀거든." 딱지치기가 끝나자 전통복 체험이 이어진다. 할배와 똑같이 입어 본다. 두루마기를 입고, 유관을 갖춘다. 한 손에 부채까지 쥐어본다. 민성이의 후드티에 달린 회색 모자가 두루마기 위에 비쭉 나온다. 그리고 할배를 따라 교실을 나선다. 다시 할배가 앞장 선다. 그 뒤를 아이들이 따라 간다.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기차놀이를 하는 것 처럼 줄지어 간다. 땡땡마을 주변을 거닌다. 인증샷도 찍는다. 할배는 아무나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라고 여러번 강조한다. 의관을 갖췄으니 선비처럼 행동해야 한다. 선비는 대인배,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주변 아이들과 교사의 시선이 의관을 갖춘 지운이와 민성이에게 향한다. 엄지를 치켜세우며 환호한다. "우와~ 정말, 멋있다~" 할배 샘이 웃으며 전통복에 대해 설명한다. "옛 선비들이 입은 두루마기가 참 크지? 몸을 다 감쌀 정도로 통이 크잖아. 소매도 그렇고. 옷이 큰 만큼, 내 마음도 남의 마음도 다 담는거야. 이 옷을 입은 사람은 그렇게 해야 돼. 마음이 큰 사람이 되는 거지. 주변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해. 혹시 친구가 불편하게 한다고 화내지 말고, 큰 마음으로 미소를 지을 수 있겠어? 넌 선비 옷을 입었으니깐 이제 큰 마음을 가졌으니깐, 할 수 있을거야."     할배는 땡땡마을 마을교사 3년차다. 옛 유생들이 입던 유복(儒服)으로, 의관정제(衣冠整齊)하는 것은 순수 그의 아이디어다. 땡땡마을에 온 모든 학생들에게 친할아버지 같은 마을교사가 되고 싶었다. 한 번의 만남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낯설지만 인상에 남을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이 필요했다. 그래서 의복을 준비했다. 할배는 울산 울주군 상북면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8남매 중 7번째. 월사금을 내던 시절, 초중고를 다녔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영어교사가 되고 싶었다. 교사가 꿈이었지만, 이루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동차부품회사를 다녔다. 회사를 나와서 인쇄업을 했다. 인쇄업은 순전히 글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사화며, 전설이며 옛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만든 것도 그런 이유다. 올해 65세. 줄곧 고향 울산을 지켰다. 이종욱 할배는 1927년 개교한 울주군 상북면 소재 길천초 44회 졸업생이다. 길천초에서 궁근정초와 향산초가 분리됐다. 이렇게 상북면에는 3개 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농촌학교에 학생 수가 줄었다. 3개 학교는 결국, 상북초로 통폐합 됐다. 폐교된 궁근정초는 현재 땡땡마을이 됐다. 그는 3개 학교를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길천초가 100년 이상으로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으니 길천초로 교명을 통일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나머지 두 개 학교가 반대했다. 그래서 3개 학교를 아우르는 새 교명인 상북초로 결정됐다. 할배샘은 옛 이야기를 전하면서 시간을 강조한다. 과거라는 시간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다. 부모님을 통해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듯이. 혼자서 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거다. 할배의 체험학습은 과거(옛 이야기를)와 현재(아이들에게 전달)를 잇는다. 또 옛 것이지만 전혀 새로운 것을 전한다.  옛 이야기를 접하지 못한 아이에게 할배의 이야기는 새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땡땡마을에 오는 학생들에게 그렇게 얘기해요. '너희들, 여기 공부하러 오는 게 아니다. 놀러온 거다. 할배 이야기가 지루하면 자도 된다.' 아이들이 옛 이야기를 듣고 잊어버려도 괜찮아요. 울산에서 가장 높은 산이 가지산이구나, 쌀바위이라는 게 있고, 못안마을에 전설이 있구나. 이것 하나만 알아도 됩니다.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잘 전달하는 역할을 할려고요. 아이들에게 착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싶어요." 할배샘은 건강이 허락하는한 손자, 손녀 같은 학생들에게 계속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단다. 그가 전해 준 또 다른 옛 이야기가 있다. 바로, '가지산 쌀바위 이야기'. 가지산 정상 부근에 큰 바위가 있는데, 거기서 쌀이 나온다는 전설. 태화라는 법명의 스님은 그 쌀을 먹고 수련한다. 매일 쌀이 나오지만 딱 하루치 양이다. 가지산 아래 덕현리 마을에 흉년이 들었을 때, 주민들은 스님을 통해 그 큰 바위를 알게 된다. 그런데 마을 청년들이 욕심을 낸다. 단번에 많은 쌀을 얻기 위해 나무 꼬챙이로 큰 바위 아래를 쑤신 것. 갑자기 천둥 번개가 내리치고 세상이 캄캄해지며 비바람이 쏟아졌다. 청년들은 마을로 도망친다. 부처님께서 노하신 것. 태화스님은 욕심을 낸 청년들을 대신해 용서를 구한다. 이후 큰 바위에는 쌀이 아닌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스님은 한 달 동안 물만 마시며 수도 정진을 이어간다. 깨달음을 얻고 가지산 바로 아래에 석남사란 절을 짓는다. 석남사는 지금까지 그 자리에 위치해 있다. 쌀바위에서 시작된 물은 가지산, 고헌산,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 골짝을 흘러간다. 이어 언양읍 남천을 지나 범서 구영 · 천상리 들판을 휘감고 울산의 태화강이 된다. 할배샘은 가끔식 생각해본다고 했다. 옛 사람들이 얼마나 배가 고프고 먹을 게 없었던지 쌀이 나오는 바위를 동경했을까. 그러면서 물은 사람의 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 울산의 젖줄인 태화강의 근원을 추적해보면, 가지산 정상 쌀바위까지 올라간다고 했다. 그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부모에서 자녀로 이어지는 생명도 그와 같다는 것이다. 이종욱 할배샘의 마음과 가르침도 아이들에게 잘 전해지기를. 그 내리사랑이 흘러가기를. 나는 세번째 제목을 고민한다. 옛날옛적애가 좋겠다. 옛날옛적'에'가 아니라 '애'. 제3화 이번 시작은 옛날옛적애(愛)가 좋겠다. 2025.04.27 09:05

[르포]'마을이 아이를 키운다' 숲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0000이다 ▶ 글 싣는 순서 ① [르포]'마을이 아이를 키운다' 폐교로 학생이 돌아오다 ②[르포]'마을이 아이를 키운다' 숲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0000이다 (계속) 울산교육공동체거점센터 이른 바, 땡땡마을은 울산 울주군 상북면에 속해 있지만 경남 밀양시, 경북 청도군과도 맞닿아 있다. 땡땡마을 뒷편으로는 영남알프스 산들 가운데 가장 높다는 가지산(1240m)이 우뚝 서 있다. 가지산을 중심으로 이어진 8개 산을 영남알프스라고 지칭한다. 유럽의 거대한 산맥, 알프스에서 따온 지명이다. 그녀와 첫 대면은 11월초, 땡땡마을 호호커뮤니티홀 옆 똑똑공유오피스에서였다. 초등학생 숲체험교실을 마치고 막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녀의 목에는 이상필이라고 적힌 이름표가 걸려 있었다. 궁서체다. 어느 동양화에서 본 아낙처럼 단정하게 빗은 머리다. 그 머리는 궁서체와 잘 어울렸다. 그녀는 울주군 대곡마을에 전원주택을 두고, 도시와 시골을 오간다. 일주일로 나누면 4도(都), 3촌(村)이다. 학교방과후수업에서 서예를 오래 가르쳤다. 15년 넘게 붓을 들었고, 국전 작가이면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제 서예는 취미가 됐다. 가끔 문화센터에서 주부들을 위해 서예 봉사를 한다. 내 눈이 다시 궁서체로 된 이름표로 향한다. 그녀는 숲이 너무 재미있어서 숲해설가가 됐다. 어릴 적 시골에서 놀았던 곳이 숲이다. 숲이 마냥 좋았다. 더 관심을 갖다보니, 유아숲지도사 자격증까지 땄다. 정말 우연한 기회에 숲 봉사활동을 했다. 숲에 들어가는 순간, 어릴 때 추억이 새록새록했다. 중학교 때까지 시골에서 자란 그녀에게 숲은 놀이터이자 교과서 내용을 실제로 확인하는 장소였다. "숲을 공부하면서 보니깐 제가 어릴 때 놀았던 게 교과서에 다 실려 있는 거예요. 즐겁고 행복했던 경험을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죠."     그녀와 얘길 나눌수록 TV만화영화 주인공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주제가가 먼저 떠올랐다. 1980년대 인기를 끌었던 KBS TV만화영화 '호호아줌마'. 기억이 무서운 게 주제곡 후렴구를 흥얼거리다니. 후렴구만 생각났다. 오늘은 오늘은 어떤일이 벌어질까 / 하하호호 아줌마 우리 호호아줌마 / 꼬마친구 숲속친구 모두 모두 즐거워 / 꼬마친구 숲속친구 모두 모두 즐거워 // 그녀는 호호아줌마를 닮았다. 호기심 가득한 표정까지. 그렇다고 호호아줌마처럼 펑퍼짐한 치마를 입고 그 위에 흰 앞치마를 두르지 않았다. 호호아줌마의 '잇템(it item)'인 찻숟가락도 갖고 있지 않다. 일본에서 방영된 TV만화영화의 원제는 <스푼 아줌마>, 노르웨이 동화를 원작으로 했다. 노르웨이에도 알프스가 있다. 린겐알프스(Lyngen Alps). 우리나라는 영남알프스. 알프스 산맥의 그녀들이다. 호호아줌마의 능력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몸이 작아진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숲 속 친구들이 도움을 줘, 하루하루 일상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상필 교사는 금방 등산을 다녀온 듯 아웃도어 복장에 트레킹화를 신었다. 양 손에는 자연에서 구한 교구가 들려 있다. 그녀의 경차 트렁크에 한 가득인데, 집에는 더 많은 교구가 넘친단다. 그녀는 교구를 숲놀이 준비물이라고 했다. 집 베란다에 4~5단 서랍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단다. 전부 숲체험교실에서 활용하는 것들이다. 수업에 한 번 참여하고 싶다고 하자, 그녀는 언제든 오라고 했다. 수업이 일주일에 두 번 있다고 했다. 날짜를 정하지 않고 헤어졌다. 다시 만난 건 한 달 뒤인 12월 11일 오전 수업이었다. 오늘은, 오늘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호호아줌마처럼 숲 속 친구들이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모두 모두 즐거워질 수 있을까. 수업이라는 게 과연 즐거울 수 있을까. 이 교사가 앞장 섰다. 천상중학교 1학년 여학생 8명과 남학생 2명이 뒤따랐다. 나는 그들 뒤에서 거리가 멀어지지 않도록 신경쓰면서 걸었다. 땡땡마을 후문을 나서기 전, 준비물은 창이 넓은 모자와 확대경인 휴대용 루페. 야외활동에 필요한 것들인데 모두 땡땡마을에서 제공된다. 비가 오면 우의를 착용하고 나간다. 한 여학생이 아침에 만진 머리가 신경쓰이는지 모자를 쓰지 않겠다고 했다. 강제할 수 없다. 몇 번 권하고 학생이 싫다면 자율에 맡긴다. 하지만 이름표는 붙여야 한다.   우리는 땡땡마을 후문을 나와 궁근교를 건너, 카페와 식당을 지나 뒷동산으로 향했다. 본격적으로 뒷동산에 오르기 시작하자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수업이 시작되자, 100m 이상 걷는 게 어려웠다. 주변에 늘려있는 모든 것이 놀잇감이자 수업자료였다. 그렇게 수업은 시작됐다. 스며들듯이 이어졌다. "선생님, 바지에 도깨비풀이 많이 붙었어요. 잘 안 떨어져요." 한 남학생이 입을 비쭉내밀며 튀어 들어왔다. 땡땡마을에서 나올 때부터 수업에 잘 집중하지 못한 학생이었다. 다른 남학생과 장난을 치며 이래저래 뛰어다니다가 체육복 바지 왼편에 도깨비풀이 붙었다. 그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식물의 씨앗을 소개했다. "여러분, 씨앗은 크기도 작고, 스스로 이동할 수 없죠? 바람에 날려, 아니면 물을 타고, 동물이 열매를 먹은 뒤 배설물로 그리고 동물이나 사람 몸에 붙어서……"   국화과 식물인 도깨비바늘이라고 불리는 도깨비풀은 이처럼 붙어서 이동한다고 했다. 그녀는 어깨에 맨 에코백에 손을 넣는다. 검은색 바탕의 천으로 된 에코백에는 담쟁이덩굴이 그려져 있다. 담쟁이덩굴은 벽돌로 쌓아 올려진 담장을 넘고 있다. 그녀가 꺼낸 것은 박주가리 씨앗. 하나하나 아이들에게 나눠준다. "바람에 쉽게 날려가니깐 주의하세요. 씨를 잡지 말고, 날개를 잡으세요." 솜털날개가 한 올, 한 올, 영롱하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갸날프다. 그녀가 퀴즈를 낸다. "땡땡마을에서 챙겨 온 루페 있죠. 그걸로 씨앗을 관찰해 보세요. 특별한 거 발견한 친구?" "뾰족뾰족하게 생겼어요." 한 여학생이 빠르게 답했다. 이 교사는 그 여학생과 손바닥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리고 설명을 이어갔다. 박주가리 씨앗은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서 착지를 한다. 흙에 잘 떨어져 자리를 잡아야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땅 속에 잘 박혀야 한다. 그래서 씨앗 끝이 톱니바퀴처럼 뾰족하게 생겼다. 난생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누구나 숲에 갈 수 있고 볼 수도 있지만 이처럼 자세히 봐야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이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박주가리 씨앗은 금새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다. 마치 시동을 거는 듯.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씨앗을 놓쳤다며 안타까워한다. 바람을 탄 씨앗을 다시 잡으려는 학생들, 그 사이로 까르르 웃음 소리가 들린다. 손에 있던 씨앗이 갑자기 떠나서 그런건 지, 씨앗을 제대로 날려보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 지. 둘 다 인지. 이 교사는 마술사의 주머니 같은 에코백에서 또 씨앗을 꺼낸다.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는 박주가리 씨앗에 각자 꿈과 미래를 실어서 날려볼까요." "돈 많은 백수." 한 학생이 뛰어들듯이 말한다.   "돈 많은 백수?" 이 교사가 되묻는다. 그러면서 넉넉한 미소를 짓는다. 아이들이 입으로 불어 씨앗을 날린다. 하나, 둘, 바람을 타고 나른다. 멀리멀리. 언제가 흙에 닿고 싹이 나겠지.   막 언덕을 오르기 전, 이 교사는 길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도깨비바늘과 도꼬마리에 대해 설명했다. "다시 루페를 꺼내서 도깨비바늘을 볼까요? 삼지창이 보이나요?" "두 개…… 아니다. 세 개요." 도깨비바늘은 삼지창 같이 생긴 갈고리 부분을 이용해 사람의 옷에 붙는다. 도깨비바늘과 비슷한 과인 도꼬마리도 있다. 도꼬마리는 옷이나 동물의 털에 '찍'하고 달라 붙는다. 이 교사는 자연에 있는 것들을 대충 볼 게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은 도꼬마리를 보고, 찍찍이를 고안해냈죠. 유명 디자인의 문양은 자연에서 가져온 것이 많아요. 얼마나 관심을 갖느냐에 따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을거예요. 여러분들 중에 디자이너나 곤충학자, 식물학자가 나올 수도 있잖아요."     씨앗은 간식거리도 된다. 이 교사가 어릴 적 많이 먹었던 먹을거리 중 하나가 이 박주가리라고 했다. 조금 전에 본 씨앗이 간식거리가 되는 장면이 쉽게 떠올리지 않는다. 그 씨앗이 자라 초록색 열매를 맺는다. 열매 껍질을 까면, 흰 속살이 보이는데 옥수수 씨앗처럼 생겼단다. 씹으면 하얀 물이 나오고, 그 맛은 고소하면서도 달짝지근하다는데. 이 교사를 제외하고 모두에게는 상상의 맛. 그녀는 길 가장자리에 심겨진 나무들 앞으로 안내했다. 누군가 심은 것으로 보이는 나무는 아이들의 키와 비슷했다. 작은 가지들이 가늘고 길게 뻗어 있다. 노란 꽃에 가시가 있다. 아카시아와 비슷한 시기에 꽃을 피운다는 골담초다. 원래 그 뿌리를 약용으로 사용하는데 꽃도 먹을 수 있단다. 이 교사도 최근까지 몰랐던 간식이라고 했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과 숲체험교실을 진행하고 있는데 옆에서 유심히 지켜 보고 있던 동네 할아버지께서 권한 것이 골담초라는 것. 그 때 처음 먹어본 맛이라고 했다. 노란 꽃에서 단맛이 난단다. 숲에는 먹을 게 '천지삐까리'다.       숲에 있는 모든 것이 수업 교재였다. 마치 식물과 곤충이 앞다퉈 사람에게 소개되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서 이 교사가 가교 역할을 했기 때문인지도. 사람에게는 식량이 될 수 없어 선택을 받지 못한 빨간 열매들. 그 열매는 새의 눈에 띄어, 선택을 받기 위해, 화려한 색깔을 자랑한다. 그것도 생명이 있고, 번식을 해야 한다. 아주까리. 잎은 나물로, 열매는 기름을 얻을 수 있다. 영글어 있는 아주까리 열매를 까보면 '공룡 알'이 나온다. 이 열매를 처음 본 아이들의 한결 같은 대답이다. 목련은 1년 중 봄 꽃을 피우기 전까지 겨울눈 옷을 3번 갈아입는다. 목련꽃봉오리의 겉껍질이 딱딱해지면, 호랑이발톱 놀이를 할 수 있다. 도토리나무에 도토리는 스스로 떨어질까? 강한 바람에 흔들려서? 상당수는 도토리거위벌레가 범인이다. 도토리거위벌레 입은 톱과 같다. 바람이 불면, 그 톱으로 부지런히 가지를 자른다. 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그러면 도토리에 구멍을 뚫고 알을 놓는다. 알에서 깬 성충은 도토리를 먹고 땅으로 들어간다.       겨울에도 곤충은 있다. 산바퀴. 사람이 사는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숲의 바닥이나 낙엽층에 서식한다. 숲속 청소부라고 불린다. 팥중이와 각시메뚜기가 부지런히 뛰어다닌다. 머리, 가슴, 등쪽에 X(엑스)자 문양이 있는 것이 팥중이. 다리에 까슬까슬한 가시 모양이 붙어 있는 게 각시메뚜기다. 성충으로 겨울을 난다. 알을 낳고도 3~4년을 산단다. 각시메뚜기가 힘껏 뛰어오르자 여자아이들이 "꺄악" 소리를 지르고 달아난다. 아랑곳하지 않고 한 남학생이 각시메뚜기에 손을 뻗는다. 여기저기서 아이들 소리가 울릴 때쯤, 동산을 내려가야 할 시간이 됐다. 이 교사는 칡 덩굴을 꺾어 왔다. 덩굴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줄넘기를 한다. 혼자서도 가능하고, 셋이면 더 좋다. 함께 노래 부르며 뛰놀 수 있으니깐. 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 / 꼬마야~ 꼬마야~ 만세를 불러라 /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 꼬마야~ 꼬마야~ 나가 놀아라 // 노래가 끝날 때까지 단체줄넘기를 쉽게 해낸 천상중학교 1학년 김윤서 학생은 "학교가 아닌 자연에서 직접 체험을 하니깐 흥미와 재미가 생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빠가 어릴 적에 칡 덩굴을 잘라 놀고 숲에서 간식거리를 찾았다고 하는데, 다음에는 아빠와 함께 숲에서 놀고 싶다"고 했다. 이 교사는 숲체험교실을 시작하기 전, 항상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을 칠판에 적는다. 숲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0000'이다. 빈 네칸을 채워보라는 것.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각자가 생각하는 숲으로 답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그럼 이 교사가 생각하는 숲은 무엇일까. 그녀는 지체없이 숲은 '보물창고'라고 답한다. 오늘 숲체험교실을 한 학생들은 보물을 찾았을까? 하나라도 꼭 갖고 집에 돌아가길. 그런 나는 숲에서 보물을 찾을 수 있을까? 나태주 시인은 시 '풀꽃'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고 읊었다. 시인처럼, 이상필 교사처럼, 나도 자세히 볼 수 있을까? 숲도, 사람도. 제2화 끝. 2025.04.06 06:00

[르포]'마을이 아이를 키운다' 폐교로 학생이 돌아오다 ▶ 글 싣는 순서 ①[르포]'마을이 아이를 키운다' 폐교로 학생이 돌아오다 (계속) '아~ 땡땡이 치고 싶다.' 일하기 싫은 게 아니다. 땡땡이 치고 싶은 그런 날씨라는……거다. 늦가을에 잔뜩 흐린, 금방이라고 하늘이 토해낼듯 비가 막 쏟아질 것 같은 날씨. 내리는 게 아니라 머리를 막 때릴 것 같은 그런 비. 그런데 언제 쏟아질 지 전혀 가늠이 안된다. 비가 올 지, 안 올 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날씨다.     그런 날, 울산마을교육공동체거점센터를 찾아간다. 취재차, 일로. 땡땡이 치고 싶……일하기 싫은 게 아니라 날씨 때문이다. 울산광역시교육청에서 28km 떨어진 곳. 스마트폰에는 차로 28분 거리라고 나온다. 28. 딱 떨어진다. 마치 학창시절 내내 풀었던 오지선다 정답처럼. 안정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이제 길을 고민해야 한다. 울산고속도로를 탈 지, 국도 울밀로를 탈 지. 잠깐 생각하다, 국도를 선택했다. 어차피 둘 다 편도 2차선. 차도 막히지 않을 평일 점심시간을 막 지난 시간이다. 울산고속도로에 '고속' 만 떼어내면 울산도로가 된다. 도로 형태만 따지면 어느 게 고속도로고, 국도인 지 구분이 어려운 길. 애매모호한 길. 내비게이션에 '울주군 상북면 석남로 832'를 찍는다. 마을교육공동체거점센터로 가는 길 주변으로 두 개의 풍경이 펼쳐진다. 도시 아니면 시골. 아마도 둘 다 일지도. KTX울산역 주변으로 높이 들어선 아파트 단지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 몇 분만 지나면 논밭이 펼쳐진다. 다시 아파트가 눈에 들어온다. 도시와 시골 풍경이 겹친다. 그러길 반복.   가솔린 엔진과 고용량 배터리, 두 개의 심장을 가졌다는 내 하이브리드차가 울산축협가축시장을 지나친다. 가축시장을 지나면 도시 끝, 이제부터 시골이 시작될까? 가솔린차 엔진과 전기차 배터리의 경계 그리고 도시와 시골의 경계를 생각하던 중, 하이브리드차가 울밀로를 벗어나 작은 마을로 들어선다. 농촌에 조성된 공업단지, 농공단지. 농촌과 공업이 합쳐진 곳 아니면 그 중간쯤이라서 그렇게 부르는 걸까. 상북농공단지 입구를 통과한다. 띄엄띄엄 떨어진 식당, 마트, 카페들. 키가 낮은 건물을 지나치자 마을교육공동체거점센터가 보인다. 영락없는 시골 분교다. 폐교는 리모델링을 거쳤다. 센터 정문에 들어서자, 학교 운동장이 펼쳐진다. 예전엔 아이들이 이곳저곳 구석구석에서 뛰어 놀았겠지. 운동장 일부는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폐교에서 지금은 센터가 됐다. 운동장에는 마사토 흙이 깔려져 있다. 흙을 딛고 활엽수들이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 마사토 흙이 아닌 시멘트와 벽돌로 포장된 주차장쪽으로 이동한다. 주의해서 차를 댄다. 차 매연에 꽃들이 다치지 않도록. 센터 건물 출입구 가까이에 주차할 수도 있다. 그러면 몇 걸음 걷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출입구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시멘트로 포장된 주차장에 차를 댄다. 흙을 밟기 싫어서다. 혹시 나중에 비가 내리면 흙탕물이 될 지도. 흙을 밟는 건 싫지만, 흰운동화에 흙탕물이 튀는 건 더 싫어서. 차 실내가 더러워질 수도 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시골은 불편하고 신경써야 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최대한 흙을 밟지 않고 센터 출입문으로 발 길을 재촉한다. 40대 중반인 나 보다 한 참 나이가 많아 보이는 활엽수들을 올려다 본다. 제각각 활엽수들이 삼삼오오 서 있다. 같은 이름과 종류끼리 자리를 잡은 듯. 이 곳 터줏대감인냥 나를 내려다 본다. 불현듯 그들의 이름을 기억해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잘 떠오르지 않는다. 운동장 곳곳에서 익숙한 얼굴이 반긴다. 모두 훌륭하신 분들. 타의 모범이 되는 친구들도 있다. 옛 학교에서는 이 분들의 삶을 소개하고 가르쳤겠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세종대왕상, 신사임당상, 유관순상, 이순신 장군상. 국민학교때 봤던 이승복 어린이상은 없다.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공부하는 어린이상 그리고 '나라에 충성, 부모께 효도'라고 적힌 충효상까지 있다. 어깨동무를 한 어린이상처럼 이토록 가까이서 살뜰히 공부하는 게 가능할까. 같은 반 친구들과 수우미양가, 점수와 등수를 두고 경쟁한 나에게 공부는 책걸상에 진득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혼자서 하는 건데. 수업시간, 이름 보다는 '26번' 번호로 불리는 게 익숙한 나인데. 그대로 비바람 세월을 맞아 칠이 벗겨진 훌륭한(?) 동상들. 이들을 받치고 있는 하단부, 콘크리트 기단에는 동상을 기증한 동창회장·동창부회장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다. 후배들이 동상을 보고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가득 담았겠지. 그리고 오랜시간 빌었겠지. 취재차 일 때문에 이 곳을 찾은 나 자신이 초라해진다. 날씨 핑계로 투덜거렸던 모습이 부끄럽다. 유관순상 뒤에 설치된 교적비를 보는 순간 더 위축된다. 읊조린다. '1939년 6월 1일. 3259명.' ▶ 교적비 궁근정초등학교 터 1939년 6월 1일 개교하여 졸업생 3,259명을 배출하고 2016년 3월 1일 상북초등학교로 통합되어 폐교됨 2016년 3월 1일 울산광역시교육감 센터 입구에 한글 자음과 모음으로 만든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ㅁㅇㄱㅇㄱㄷㅊ. 여기서부터 센터가 시작되는 경계점일까. 조형물 옆에 버티고 있는 해치를 닮은 동물상이 그렇다고 알려주는 듯 하다. 옛 학교와 현 센터의 경계. 어릴적 옆에 앉은 반 친구가 넘어오지 말라며 책상 위에 그어 놓은 선 같은 것. 센터 입구로 들어서는 낯선 이방인 기자가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그 무엇.  초중고 시절 체험학습이라곤 소풍과 수학여행이 전부인 나에게 말이다.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른 무언가가 있을까. 이 곳 센터에서는.   센터사무실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와 처음 만난 건 6주 전이다. 당시 전화 통화를 하면서 그는 출근하는 길에 울산시교육청을 잠시 들리겠다고 했다. 약속시간을 잡고, 교육청 카페에서 만났다. 운영실장이라고 해서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줄 알았다. 막 세탁한 흰색 반발티셔츠가 잘 어울리는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2024년 3월에 운영실장으로 부임했고, 그의 아내는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서로 명함을 주고 받았다. 울산광역시교육청 교육협력담당관실 울산마을교육공동체거점센터 송영진 운영실장 송인지, 손인지 실수하지 않으려, 명함에 적힌 이름을 재차 확인했다.   "송 실장님, 조만간 센터를 찾아 갈게요. 취재라기 보다는… 아무튼 부담갖지 마세요." 센터에 대한 정보가, 그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던 나는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10월 중순쯤 그를 다시 만났다. 그 사이 송 실장의 아내는 둘째를 출산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가 웃을 때 고양이상이 된다는 것을. 이 곳에서 일하면 그렇게 얼굴이 바뀌는 걸까? 복도 곳곳에서 쿠키냄새가 진동했다. 그 냄새가 센터사무실 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사무실 바로 옆에 요리조리놀이터가 있다. 요리조리. 말이나 행동을 뚜렷하게 정함이 없는. 아니면 요리하고 조리하는 곳. 이 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장소란다. "아이들은 집에 돌아갈 때 작은 무엇이라도 갖고 가는 걸 좋아해요. 쿠키, 빵, 떡, 김치, 깍두기. 그게 먹는 거면 더 좋죠." 말이 끝나자마자 송 실장은 사무실 미닫이 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돌아온 건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요리조리 놀이터에서 만든 쿠키라며 나에게 건넸다. 모양이 해태 버터링쿠키를 닮았다. 딱딱하지도 그렇다고 무르지도 않은 적당한 경도의 쿠키를 입에 넣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녹이자, 긴장이 풀린다. 송 실장이 센터 곳곳을 소개시켜주겠다며 앞장섰다. 센터 사무실을 나와 요리조리놀이터 반대쪽으로 향했다. 평소엔 카페였다가 학생들이 방문하면 오리엔테이션 장소로 활용하는 호호커뮤니티홀을 지나쳤다. 라디오 볼륨을 갑자기 줄인 것 마냥 쿠키냄새가 희미해진다. 그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 나온다. 아니 웃음소리가 먼저 뚫고 나온다. 아이들 모두 이름표를 붙였다. 가슴에 비뚤비뚤. 각자 편한대로 붙인 이름표들. 센터 체험실은 대부분 '놀이터'라는 이름이 뒤에 붙어 있었다. 요리조리놀이터처럼. 나무놀이터, 밴드놀이터, 몸놀이터, 그림놀이터 손놀이터.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일과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는 중 이었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가는 아이들이 눈에 띈다. 마을교사들은 이름표를 목에 걸고 있다. 청년부터 노인까지 센터 주변 마을주민들로 구성된 교사들이다. 울산 전 초·중학교와 연계된 평일 오전 체험교실과 오후 프로젝트교실을 담당한다. 모두 초등 창의체험 프로그램, 중등 자유학기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저녁에는 마을 청소년과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민배움터가 열린다. 이곳 하루 일과는 밤 9시에 끝난다. 견학차 방문객까지 합치면 매년 4만1천여 명이 센터를 다녀 간단다. 체험교실과 프로젝트교실에서는 교사와 학생이 얼굴을 마주하듯, 이름도 마주한다. 체험·프로젝트교실은 2~3시간 정도이다. 짧다면 짧은 시간. 마을교사들은 꼭 아이들 이름을 부른단다. 센터 2층 건물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는 놀이터들을 보고 나오자 운동장이다. 입구 주차장에서 보는 것과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송 실장님, 운동장에 있는 나무들은 폐교 전부터 있던 것들이죠?" "그런 걸로 알고 있어요." "죄송한데. 나무들 이름을 모르겠어요. 벚나무, 은행, 잣나무 정도는 알까. 학교에서 다 배운 것 같은데, 딱히 관심이 없으니……" 송 실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몰라도, 괜찮아요. 각 나무들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어요. 마을교사 분들께서 미리 작업을 해 놓으셨거든요." 가까이, 가, 보니. 그랬다. 왕버들, 백합나무, 회양목, 전나무, 잣나무, 이팝나무. 키가 크든 작든, 이름표가 다 있었다. 기억해내지 못 해도, 몰라도 여기에선 부를 수 있다. 모든 이름을. 운동장 한 모퉁이에는 익숙한 배추, 쑥갓, 상추, 봄동, 쪽파부터. 생소한 이름의 갯기름나물, 당귀, 근대, 아욱이 심겨져 있었다. 생소해도 괜찮다. 이름을 부를 수 있으니깐. "반기자님 여길 한 번 보세요." 송 실장이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들어 한 쪽을 가리킨다. 2m 높이의 물탱크. 빗물저금통이라고 커다랗게 쓰여져 있다. 인근 농가에서 사용하지 않은 물탱크를 가져와서 설치했다. 농가에서 버리려다가 혹시 이 곳 센터에서 필요할 지 몰라서 문의가 들어왔단다. 그걸 기증받아서 마을교사들이 함께 만들고 꾸몄다. 평소 빗물을 받아 탱크에 저장해두었다가 텃밭에 물을 주는 빗물저금통으로 재탄생했다.       송 실장은 버려질 운명이었던 물탱크가 빗물저금통으로 변신한 것을 자랑스레 소개했다. "이 곳이 단순히 교육만 받는 곳이라면 학교랑 다를 게 없죠. 누구나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곳, 함께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곳, 하루만이라도 머리를 비우고 쉴 수 있는 곳, 재밌게 놀고 가도 괜찮은 그런 곳이요." 송 실장은 울산마을교육공동체거점센터라는 풀 네임(Full Name) 말고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고 쉽게 부르는 이름이 있다고 했다. 애칭이란다. "여기는요. 그러니깐 이름이…" 다시 고양이상으로 웃으며 말한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평소 저무는 시간에 비해 더 어두웠다.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에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운동장에, 텃밭에 그리고 빗물저금통에. 흰 운동화가 젖을 것 같다. 그래도 오늘 만큼은 괜찮을 것 같다. 아니, 괜찮다. 흙탕물이 튀어도. 제1화 끝. 2025.03.30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