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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총성…저의 아버지는 '미신청 희생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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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70년 전 총성…저의 아버지는 '미신청 희생자'입니다"

    편집자 주

    역사적 비극이 낳은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와 가족의 고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진실규명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남겨진 가족들이 진실을 알 수 있는 과정도, 국가의 사과를 받고 명예회복이 이뤄지는 과정도 여전히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최병묵(77)씨가 70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천변을 바라보고 있다. 김정남 기자최병묵(77)씨가 70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천변을 바라보고 있다. 김정남 기자
    세종시 조치원읍을 흐르는 얕은 천은 평화롭고 유유했다. 하지만 물길을 지켜보는 최병묵(77)씨의 표정은 복잡했다.
     
    최병묵씨는 이곳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70여 년이 지난 올해 알게 됐다.
     
    농기구 행상이었던 아버지는 군인에게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28살, 아들 병묵씨의 나이는 불과 4살이었다.
     
    아버지가 군인에게 죽임을 당한지도 모르고 아들은 한때 군인을 꿈꾸기도 했다.
     

    아들 이름 외치는 아버지에 총부리…아비 잃은 아들은 떠돌았다


    아들 최병묵씨의 혼인신고일과 아버지의 사망신고일은 날짜가 같다.
     
    "혼인신고를 하러 갔는데 아버지가 살아계신 걸로 돼있다고…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날짜를 잘 몰라 혼인신고한 날 아버지의 사망신고도 똑같은 날로 돼있어요."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가족은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각지를 떠돌았고, 아버지의 사망신고조차 아들이 성장한 뒤 하게 됐다.
     
    어린 최병묵씨가 알던 건 아버지가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것. 돌아가신 장소는 총성과 함께 기적소리가 들렸다고 해 어렴풋이 철길 근처로 추측했다.
     
    "빗맞아서 너무너무 견디기 어려우니까 '병묵아!' 하고 제 이름을 불렀다고 들었어요. 거기에 확인 사살을 한 거예요…"
     
    아버지 없이 살아온 과정은 너무 지난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찾아나갈 겨를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왜 돌아가셨을까'는 평생의 숙제였다. 병묵씨의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냐"고 물을 때도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성장한 병묵씨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이자 어린 시절 살았던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 조치원읍으로 가서 동네 분들에게 들어도 봤지만 또렷하진 않았다. 기록을 더듬어나갔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재판이나 무슨 문서가 보관돼있을 것 아닌가. 그래서 대전에 가서 국가기록물도 확인을 해보고 그랬는데 없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그러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2기 활동을 시작하고 진상규명 신청 접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지난해 알게 됐다. 1기 때는 이런 신청 과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들려준 지인을 찾아 신청을 위한 증언을 부탁했다. 흔쾌히 응하던 지인은 '아들이 못하게 한다'며 말을 바꿨다. 결국 증언자가 없어 신청서를 내지 못했다.
     
    "그런 데 나서지 말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혹시 증언을 했다 입장이 나빠지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좀 가졌던 것 같아요. 이분이 유일한 증언자였는데… 상상할 수 없는 허무라고 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최병묵씨가 지난해 끝내 접수하지 못한 진실규명 신청서를 보고 있다. 김정남 기자최병묵씨가 지난해 끝내 접수하지 못한 진실규명 신청서를 보고 있다. 김정남 기자

    그토록 찾던 아버지의 죽음…'미신청 희생자'로 기록이

     
    어느덧 아들의 머리 위엔 서리가 앉았다. 일흔을 넘긴 최병묵씨는 그렇게 찾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올 들어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알게 됐다.
     
    10여 년 전 진행된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 그곳에 아버지 '최양호'씨의 이름이 있었다.


    ◇ 조치원읍 서창리 강희규 희생사건
     
    1950. 9. 28.(음력 8. 17.) 밤, 마을에 철모를 쓰고 전투복을 입은 군인들이 들어와 부역혐의자를 색출하기 시작하였다. 강희규가 군인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결국 군인들에게 붙잡혀 마을주민 4명과 함께 살해당하였다.
    강희규와 같이 희생당한 마을 사람은 안충열, 최양호, 장태식 등이다. 마을에서 군인들이 부역혐의자들을 색출한 뒤 바로 조치원여자중학교 뒤 강변 둑에서 집단 총살하였다.
    (조사보고서 중)



    강희규씨의 가족이 신청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최양호씨의 죽음이 확인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신청사건 조사 과정에서 인지된 희생 확인자, 즉 '미신청 희생자'로 기록돼있었다.
     
    그렇게 찾던 아버지의 죽음이 국가 조사기관에 의해 드러난 지도 10여 년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더 기막힌 사실도 알게 됐다. '미신청 희생자'가 아버지임을 인정받으려면 따로 진실규명 신청을 해야 하는데, 이미 지난해 신청이 마감된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증언을 거부당해 신청을 하지 못한 것이 또다시 한이 됐다.
     
    미신청 희생자 최양호씨의 가족으로 인정돼야 돌아가신 지 20년이 지나 이뤄진, 아들의 혼인신고일과 같은 아버지의 사망신고일도 바로잡을 수 있고 아버지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명예회복도 이뤄질 수 있다.
     
    그 진실을 애타게 찾던 가족들에게 조사 내용이 제때 닿지 못한 이유에 대해 최병묵씨는 가족들이 살던 곳에 머물지 못하고 각지를 떠돌아야 했던 상황 등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뿐이다. 다수의 피해자가 확인된 사건의 경우 공동체가 함께 목소리를 내기도 하지만 그러지 못한 사정에 놓인 피해자와 가족도 많은 실정이다.
     
    최병묵씨는 아버지 돌아가신 날짜와 장소를 정확히 알게 돼 감사하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것으로 인정받지 못했기에 못내 가슴에 사무친다.
     
    "유가족 입장에서는 '화해'하기 위한 거니까, 국가가 화해하기 위한 것이라면 더 기회를 더 줘야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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