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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지식인 조영래, 지금 우리에겐 그가 필요하다"



사건/사고

    "진짜 지식인 조영래, 지금 우리에겐 그가 필요하다"

    '인권변호사' 조영래 변호사 30주기
    서울대 수석·사시 합격…출세 버리고 약자에게로
    사시 준비 중 일면식 없던 전태일 죽음 듣고 뛰쳐가
    민청학련 수배 6년간 '전태일평전' 집필
    술 못하고 담배 즐겨…43세 폐암으로 별세
    권인숙 "엘리트 이기주의 실망…조영래 필요한 까닭"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인 권인숙씨(오른쪽)가 조영래 변호사와 법원을 나서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 시대 최고의 사상가이자 실천가. 1985년 '부천 성고문 사건'의 당사자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은 지난 10일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조영래 변호사(이하 생략)를 이렇게 정의했다. 사상과 실천. 인권변호사 조영래는 머리와 몸을 모두 갖춘 법률가이자 운동가였다.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우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들지 않겠다. 다른 것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좋겠다." -1981년 12월13일 일기 中-

    서울대 법대에 수석 입학한 청년 조영래가 대학 졸업 후 사법연수원에서 한 다짐이다. 그는 출세를 꿈꾸지 않고 사회변혁에 투신했다. 그가 법률가가 아니라 피고인으로 먼저 법정에 선 이유다. 1971년 2월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같은해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1년6개월 옥살이를 했다.

    그는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 청년 전태일의 죽음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책을 덮고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시신을 인수해 서울법대 학생장을 주선하고 시국선언문 초안을 썼다.

    1974년 4월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돼 6년 가까이 도피 생활을 했다. 그는 도피 중에도 생전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 전태일의 죽음을 기록하는 데 몰두했다. 3년 동안 청계천 일대를 누비며 전태일의 발자취를 좇아 역작 '전태일평전'을 써냈다. 그러나 그는 살아서는 이 책의 저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복권 후 1982년 서른 다섯의 나이로 늦깎이 변호사가 된 그는 작고하기까지 8년 동안 인권, 노동, 빈민, 환경, 학생 관련 사건에 힘을 쏟으며 기념비적인 성취를 이뤘다. 1986년 권인숙을 성고문한 경찰관 문귀동을 끝내 법정에 세웠고, 이 일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부도덕성을 드러내며 87년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사진=연합뉴스)

     

    88년 서울 상봉동 연탄공장 인근 주민의 진폐증 환자를 도와 '공해병'을 처음 인정받았고, 84년에는 서울 망원동 수재민 2만4천명과 5년이 넘는 법정 싸움을 벌여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았다. 이는 국내 '집단소송'의 효시로 꼽힌다. 88년에는 민변 창립을 주도했다. 그와 함께 권인숙 변호를 맡았던 홍성우 변호사는 "조영래가 가는 그곳에 진실, 정의, 승리가 있었다(추도사 中)"고 했다.

    그런 성취에도 그는 자신을 한없이 낮췄다. 서울대 수석입학이나 사법시험 합격 등 수식어를 부끄러워했고, 출세가 보장된 길을 버리고 약자와 억울한 이들을 찾아가 옆을 지켰다고 그의 지인들은 입을 모은다.

    권 의원은 "대법원 판결 전 6개월 동안 매주 1~2번씩 접견을 와서는 몇시간씩 시간을 보내곤 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무슨 얘길 나눴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양말과 구두가 떨어질대로 떨어졌던 것은 기억한다"고 그를 떠올렸다.

    조영래가 '전태일평전'이나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을 썼다는 사실은 가까운 지인 중에서도 미처 몰랐던 이가 많았다. "언젠가 '나도 베스트 셀러가 있다'고 지나가는 말로 얘기하더라구요. 저도 끝까지 몰랐어요." 권인숙 의원의 말이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있듯이-인생도 그런 것이다." -1990년 1월18일 장남 일평에게 쓴 편지 中-

    권 의원은 조영래가 평일이든 주말이든 바쁜 아내를 대신해 어린 아들을 항상 데리고 나타났다고 회상했다. 아이 돌보는 일이 오롯이 '여성' 몫으로 치부되던 그 시기, 7~8살 아이를 돌보던 그는 누구보다 가부장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던 사람이었다.

    담배. 그는 주변 사람들 모두의 걱정을 살 정도로 담배를 즐겼다. 혹자는 '담배 한 개피에 변론 한 줄을 썼다'고 말할 만큼 꽁초가 재떨이에 수북이 쌓이도록 늘 줄담배를 피웠다. 반면 술은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영래는 30년 전인 1990년 폐암 진단을 받고 그해 12월 12일 43세의 아까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2020년 세밑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가 남긴 말과 글이 주는 울림은 적잖다.

    권 의원은 "검사와 판사, 의사 등 한국 사회에서 소위 엘리트로 불리는 집단의 지독한 편협함과 이기주의를 보며 실망했던 한 해였다"며 "조영래는 사람, 그 중에서도 약자를 치열하게 사랑했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조영래 같은 진짜 지식인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인숙 의원 페이스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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