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 스포일러 주의
'연대'의 힘이란 이런 걸까. '고졸'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낮은 곳에서 말도 안 되는 차별을 받던 이들이 '우리'로 뭉쳐 거대 기업의 비리를 통쾌하게 파헤친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 이종필)은 1995년 입사 8년 차로 업무능력은 베테랑이지만 고졸이라 늘 말단인, 회사 토익반을 같이 듣는 세 친구가 힘을 합쳐 회사가 저지른 비리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담았다.
말도 안 되는 사회적 편견으로 온갖 차별과 부조리의 대상이 됐던 이들이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어느새 거대한 부조리의 온상이 된 삼진그룹의 민낯을 드러낸다. 이를 유쾌하면서도 희망적으로 그려내는 건 영화 속 톡톡 튀는 캐릭터들이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의 주축이 되는 건 실무 능력 퍼펙트지만 현실은 커피 타기 달인 생산관리3부 오지랖 '도로시' 이자영(고아성), 추리소설 마니아로 뼈 때리는 멘트의 달인 마케팅부 돌직구 '미쉘' 정유나(이솜), 수학 올림피아드 우승 출신이지만 실체는 가짜 영수증 메우기 달인 회계부 수학왕 '실비아' 심보람(박혜수)이다.
이들은 각자 발로 뛰고, 전략을 짜고, 뛰어난 능력으로 폐수 유출량을 척척 계산해 낸다. 성격만큼 자기가 맡은 역할이 확실하고, 이에 따른 업무 분담도 철저하다. 각 캐릭터가 속한 부서 특성 역시 인물에 반영돼 있다는 설정도 재밌는 지점이다.
평소 어리바리한 보람은 숫자 앞에서 강인한 면모를 보이는데, 페놀이 함유된 폐수 방출량을 컴퓨터처럼 빠르게 계산해내는 모습에서는 감탄이 나올 정도다. 친구들 앞에서는 당당하던 유나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할 말 다 하는 모습도 감동으로 다가온다.
자영, 유나, 보람은 진짜 '일'을 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상고 출신 고졸 사원을 위해 마련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 모인다. 그러나 공장에서 검은 폐수가 유출되는 것을 목격한 자영으로 인해 '일'을 벌이게 된다. 바로 자신들이 몸담은 삼진그룹의 검은 속내를 파헤치는 것이다.
기업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사회가 만들어낸 각종 부조리도 눈에 띈다. 고졸 출신이 갖는 업무와 승진의 한계, 임신한 여성은 더 이상 직장 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차별적 환경, 여직원과 커피의 상관관계, 남녀 노동자간 임금 격차, 끝없이 되풀이되는 갑을관계 등 온갖 차별과 부당함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영어토익반에 모인 세 친구와 그 동료들은 삼진그룹의 검은 폐수 유출 증거를 찾고 이를 세상에 알리면서 '고졸'과 '여성'이 갖는 부조리를 하나씩 끊어나간다. 토익반에서 그토록 외치던 '아이 캔 두 잇' '유 캔 두 잇' '위 캔 두 잇'의 실현이다. 그들의 행동은 희망을 말하고 용기를 전한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연대'의 힘이다. 낮은 곳에 위치한, 작은 힘을 가진 이들이 모여 서로에게 없거나 부족한 점을 채워준다. 그렇게 영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사람을 성장시키는지 잘 보여준다. 웃음 포인트로 다가왔던 "어제의 너보다 오늘 더 성장했어"라는 대사가 영화 후반부에서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지금 시대에도 필요한 감수성이 드러나는 영화 속 부분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회계부 부장 봉현철(김종수)을 통해서다. 그는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갖는 미안함, 진짜 '어른'이자 '상사'의 모습이란 무엇인지 알려준다.
큰 줄거리 속 다양한 이들의 연대와 성장은 탐정물과 스릴러, 드라마 등 장르와 적절히 조화되며 다양한 재미를 충족시킨다. 여기에 이미지에서 이미지, 말에서 이미지로의 전환은 물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긴장감까지 더한다.
'레트로'가 유행인 요즘, 영화의 배경이기도 한 1990년대 사무실 풍경과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프닝과 엔딩에서 보이는 8비트 게임 느낌이 물씬 풍기는 타이포그래피와 애니메이션, 386 컴퓨터, 갈매기 눈썹, 어깨를 강조한 의상, 옛날 로고의 제품들, 공중전화, 다방, 이른바 번데기 발음(th) 강조 등 그 시절 문화가 영화에 재현돼 어떤 관객들에게는 향수를, 어떤 관객들에게는 신선함을 제공할 것이다.
무엇보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완성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개성 강한 캐릭터다. 주연뿐 아니라 삼진그룹 직원들 모두 각자 자리에서 빛나며 자기 몫을 다한 덕이다. 이러한 캐릭터들 특성을 고스란히 살려낸 배우들 연기야말로 영화의 백미다.
110분 상영, 10월 21일 개봉, 12세 관람가.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