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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규정한 '나'만 남은 실존의 물음 '사라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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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페셜 노컷 리뷰

    타인이 규정한 '나'만 남은 실존의 물음 '사라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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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컷 리뷰] 영화 '사라진 시간'(감독 정진영)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 스포일러 주의

    누구나 한번쯤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일까', '나를 규정하는 것은 누구일까 혹은 무엇일까'에 관한 질문을 던져봤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이러한 존재인데, 타인은 나를 저러한 존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간극에 나는 없는 걸까. 영화 '사라진 시간'은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나'만이 남은 존재가 겪는 감정과 실존에 관한 질문을 그린다.

    33년차 배우 정진영의 감독 데뷔작 '사라진 시간'은 의문의 화재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 형구(조진웅)가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충격적인 상황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영화가 이러한 질문과 고민을 관객에게 던지는 방식은 흥미롭다. 영화는 흑백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흑백 화면 속에 등장한, 클로즈업된 형구의 얼굴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가득하다. 형구는 왜 그곳에 있으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모든 건 기괴한 듯 아름답게 일렁인 불에서 시작한다. 화재 사건은 마법처럼 형구를 마을로, 이상한 세계로 끌어들이게 된다.

    한적한 소도시의 시골 마을, 외지인 부부 수혁(배수빈)과 이영(차수연)이 의문의 화재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을 수사하던 형구는 어느 날 갑자기 익숙하지만 낯선 세계에서 깨어난다.

    나는 그대로인데, 내가 기억하는 내가 아니다. 나를 제외한 타인의 시선과 기억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됐다. 내 기억을 따라 사람과 장소를 더듬어가지만 내가 알던 사람과 장소가 아니다. 남은 건 당혹과 혼란뿐이다. 형구는 악몽 같은 지금에서 깨어나려 하지만, 아무리 깨어나려 해도 이건 꿈이 아니고 현실이다.

    내가 쌓아 올린 시간과 내가 사라졌다. 이 이상한 세계에서 마주하는 것이라고는 타인이 만들어내고 있는 나밖에 없다. 내가 만들어 온 나는 어디로 간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형구는 새로이 마주한 현실을 부정한다.

    영화는 존재나 실존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고 질문하게 만든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누구인가. 타인이 규정하는 나와 내가 규정하는 나 사이의 간극, 그 간극이 주는 당혹감과 공허함에 관해 질문하게 만든다. 정말, 나는 정말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거듭 던지게 된다.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에게 남은 원래의 나, 옛날 나의 흔적은 자신의 휴대폰 번호가 적힌 종이뿐이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내가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유일한 흔적은 신기한 인연을 가져온다.

    영화에서 기묘한 인연으로 얽힌 게 바로 형구와 초희(이선빈)다. 형구의 원래 전화번호는 새로운 현실 속 초희의 옛 전화번호였다. 형구가 모르는 형구를 기억하는 초희는 매일 밤 나도 모르게 타인이 된다고, 그래서 힘들다고 한다. 형구와 어찌 보면 가장 비슷한 감정을 가진 처지다. 초희는 새로운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저쪽 현실의 나를 기억할 수 있는 연결고리이자, 어쩌면 새로운 세계와 나에 발붙이게 되는 역할일 수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간다. 이번엔 흑백이 아닌 색을 담은 장면이다. 형구를 클로즈업해 따라가던 카메라가 암흑이 되고, 형구의 마지막 말만이 관객에게 던져진다. "참 좋다."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들은 영화가 아무런 결론을 내거나 해결 짓지 않고 끝나는 걸 보면서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영화를 보며 가진 물음과 감정을 미처 거둬들이기도 전에 치고 들어오는 당혹스러움,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봐 온 걸까 하는 의심들은 어쩌면 형구가 이상한 현실에 눈을 뜨고 마주한 상황에서 느낀 감정과도 같을 것이다. 한순간에 지금까지의 현실을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당혹감 말이다.

    우리는 사실 우리 감정과 고민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못한다. 우리를 재촉하기 바쁜 현실에 쫓기며 나는 뭘까, 그럼 나는 누구일까를 질문하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생각했던 나와 타인이 생각한 나 사이 괴리감을 느낄 때 오는 감정을 찬찬히 파고들기도 쉽지 않다. 형구라는 캐릭터는 각자가 가진 실존에 대한 고민을 한 발 떨어져 들여다보고, 고민하게끔 한다.

    영화 '사라진 시간'은 뚜렷한 장르나 명확한 결말이 없다. 장르적 경계의 모호함마저 형구의 처지 같기도 하다. 형구의 아내 지현(신동미)은 화재 사건을 수사하는 형구에게 "소설 쓰지 말고, 보이는 것만 따라가"라고 말한다. 그 이후 형구에게 벌어진 일들, 그리고 그가 변화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정말 '보이는 것만 따라가'야 하게 됐다. 이는 관객도 마찬가지다.

    조진웅은 하루아침에 삶이 사라진 형구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특히 밤새 술을 마시며 감정의 파도 속에 흔들리는 형구의 모습이 롱테이크로 그려지는 장면은 인상 깊다. 형구의 혼란스러운 감정과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느끼는 좌절 등은 무거울 수 있다. 그러나 감독이 중간중간 끼워 넣은 유머 코드는 형구의 복잡한 감정에 관객이 영화 내내 짓눌리지 않게끔 만든다.

    6월 18일 개봉, 105분 상영, 15세 관람가.

    (사진=㈜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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