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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의 산티아고 피신기



책/학술

    정신과 의사의 산티아고 피신기

    신간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정신과 의사 김진세. 그는 환자 진료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는 의사다. 하지만 그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정확히는, 일에 열정을 쏟아붓던 사람이 극도의 피로감과 무기력감을 겪게 된다는 '번아웃 증후군'이 들이닥친 것이다.

    ‘산티아고 길 순례’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한 것은 이래선 안 되겠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떠나서 일단 피하고 봐야 했다.

    신간 '길은 모두에게 말을 건다'는 위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떠난 한 정신과의사의 산티아고 피신기이자, 그 길 위에서 얻은 귀중한 깨달음의 기록이다.

    ‘길 여행’의 원조 격인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프랑스 국경의 작은 마을인 생장피드포르에서 출발해 성 야고보의 유해가 묻혀 있는 스페인 카톨릭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길인 ‘프랑스길’은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길로, 해마다 20만여 명의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800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길에서 원대한 꿈을 꾸고 격한 감동을 느끼고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도피 삼아 시작된 여정이지만 저자 역시 이 길에서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나를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나와 내 주변, 과거와 미래, 사회와 우주에 대해 마음껏 사색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주로 드는 생각이라고는 밥은 무엇을 먹을지, 잠은 어디에서 잘지 등의 원초적인 고민들이라니……. 그도 그럴 것이 환경이 바뀌고 인위적으로 생각을 몰아간다고 해서 순식간에 사색가가 될 수는 없는 법. 저자가 순례길에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낯선 환경도 필요하지만, 그와 함께 익숙한 것과 단절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깨달음의 순간은 역설적으로 생각의 방향을 억지로 몰아가지 않음으로써 찾아왔다. 며칠 동안 길과 여정에 집중하다보니 방황하던 마음이 점차 본래의 마음을 찾고 평소에는 알지 못하던 자신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정답은 길 위에 있었다.

    이 책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는 각 장의 제목들이 보여주듯 단순히 혼자만의 여행기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 그리고 거기에 얽힌 저자의 고민들로 구성되어 있다. 산티아고 길은 그야말로 다양한 상처와 고민의 각축장이다. 재미있는 것은 국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민이 우리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순례길을 걷는 그들 역시 진로와 결혼으로 갈등하고, 정체성과 노년의 삶에 대해 고민한다. 때로는 사랑에 들뜨기도 하고, 때로는 상실로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모두들 길에 질문을 던진다. 길은 직접 응답해주지 않을지라도 많은 이들이 각자의 해답을 안고 돌아가곤 한다.

    1년에 환자를 포함해 1만 5천에서 2만 명과 얘기를 나눈다는 저자는 전공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일반적인 여행에서는 겪기 힘든 깊이 있는 사귐과 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길동무들의 고민을 해결해주기도 하며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덕분에 지쳐 있던 자신을 조금씩 추스르게 된다. 마침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들어선 스물아홉째 날, 저자는 여섯 명의 순례자들과 만찬을 가진다. 각자 가장 감동적이었던 일이나 깨달음을 이야기해보자는 제안에 저자가 꺼낸 다음의 고백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그가 얻은 것을 압축해서 말해준다.

    “제게는 지금 이 순간이 깨달음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만나,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을 나누고 있잖아요. 행복의 조건 중에 관계가 제일 중요하다는 평소의 믿음을 확인한 거지요.”

    책 속으로

    갑자기 눈이 환해지면서 ‘산티아고 길 순례’란 글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프랑스 국경의 작은 마을에서 스페인의 가톨릭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도보여행을 하는 ‘산티아고 길 순례’는 열심히 살아온 내게 주는 휴식과 선물의 의미로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은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내게 휴식과 선물을 주어야 하는! 아니, 어쩌면 도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떠나자! 떠나서 일단 피하고 보자. 순례의 고난과 의미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몇 주만 쉬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었을 뿐. (13쪽)

    누구나 걷는 속도가 다르다. 아무리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도, 걷는 속도가 다르면 몹시 지치고 힘들다. 한 사람이 속도를 줄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속도를 더 내야 한다. 빨리 걸어야 하는 사람은 힘에 부쳐서, 늦게 걸어야 하는 사람은 리듬을 놓쳐서 모두 힘들다. (49쪽)

    살다보면 남이 잘 안 가는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매너리즘에 빠져 삶이 고달프거나, 삶의 의미를 잃고 그럭저럭 살아갈 때, 가끔은 나만의 길로 걸어봐야 한다. 색다른 길에서 발견한 것의 가치 때문이 아니다. 다른 길을 걷는 과정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에우나테의 작은 성당이 다른 어떤 화려한 성당보다도 내 머리 속에 깊이 남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걸었던 덕분이다. (62쪽)

    도시에서는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몸을 쓸 일이 많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여유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러니 ‘정신력’ 하나면 다 해결되는 줄 안다. 하지만 카미노는 다르다. 매일매일 무릎이 삐걱거리고 발바닥이 화끈거리는 몸을 마주해야 한다. 더구나 여유가 많으니 몸이 하는 소리를 들으면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 ‘이렇게 아파서는 내일 못 걷겠군. 하지만 오래 쉬면 전체 일정에 무리가 갈 텐데…….’ 전에 없던 일이다. 몸이 시켜서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151쪽)

    그녀는 걸음이 느린 만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걷는다. 시계처럼 철저하게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스위스인답게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느린 만큼 더 오래 걸어요”라고 했다. 코가 햇볕에 타서 화상을 입은 듯한 루스가 어서 가라고 재촉을 한다. 내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페이스가 깨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인사를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돌아보니 역시 열심히 자신의 속도로 걷고 있다. (201쪽)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인생의 오르막길만큼 내리막길은 중요하다. 내리막길에서 아프면 더 아프다. 그리고 잘못하면 완주를 못 할 수도 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잘 실패하고, 잘 견디고, 또 잘 질 수 있는지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 (303쪽)

    감동은 함께 나누는 것이다. 빨간 ‘Santiago de Compostela’라는 안내판에 겸연쩍었던 것도, 대성당의 종탑이 그냥 멀게만 느껴졌던 것도, 대성당을 앞에 놓고도 덤덤했던 것도, 모두 기쁨을 표현하고 나눌 친구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광장에 앉아 순례자들을 보았다. 모두 나처럼 한 달 동안을 고생한 사람들이다. 나와 같은 길을 걷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나와 같은 감정과 기분으로 어렵사리 완주를 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감정이 내게 다가왔다. 공감이 살아나자, 나의 감정이 밖으로 나와 느껴지기 시작했다. (338쪽)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길 위의 마음들

    “일은 열심히 해야지요. 그런데 일이 삶 자체는 아니잖아요. 삶에는 일뿐만 아니라, 휴식도 있고 파티도 있고 또 산티아고 순례길도 있잖아요.”
    _ 잘생긴 독일 청년 크리스토퍼

    “오늘은 오늘 걷는 길에서 즐거움을 얻고 행복해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_ 산장에서 일하는 일본인 켄

    “이미 완주를 해본 길이니까 성공에 대한 미련은 없어. 이 길은 완주하는 사람들만의 길이 아니잖아. 생각해봐. 길은 계속 걷는 거니, 끝내지 않는 한 실패는 아니지.”
    _ 무릎이 아파서 돌아간 미국인 할아버지

    “몸과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느껴봤어요? 여기서는 몸이 마음의 행로를 결정을 하기도 해요.” _ 카미노를 다섯번째 걷는 독일인 크리스티나

    “내겐 힘든 길이긴 하지만, 반드시 내 힘으로 다 걷고 말 거예요. 느린 만큼 더 오래 걸어요!” _ 걸음이 느린 스위스 소녀 루스

    “이제야 아버지가 왜 내게 이 길을 함께 걷자고 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나 자신, 가족과 이웃 그리고 우리가 믿는 신을 좀더 깊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_ 2년 전 아버지를 잃은 덴마크 청년 야스퍼

    “혼자 길을 걷다보니 ‘내가 한 사랑’에 대해 생각이 나는 거예요. 부모, 남편, 아이들, 그리고 많은 친구들. 그들의 존재가 그렇게 대단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어요.”
    _ 시애틀에서 온 건축가 다이앤

    “내가 깨달은 것은, 또 걸어야겠다는 거야. 비록 양쪽 발 물집 때문에 고생했지만, 걷는 도전만큼 성취감이 큰 것이 없더라고. 늙어서도 할 수 있고.”
    _ 호주에서 온 키다리 마이크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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