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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전사 진압군의 회한 "너 아군이야? 적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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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특전사 진압군의 회한 "너 아군이야? 적군이야?"

    • 2007-05-1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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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 5월 광주 현장 목격한 이경남 목사의 기억과 상처

    이경남
    1980년 5월, 한반도는 마치 압력밥솥 안 기압처럼,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돌았습니다. 조금의 틈만 있으면 우후죽순 새어 나오는 민주정치에 대한 갈망과 군사독재에 대한 극도의 불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여긴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었지만 그들에게 돌아간 건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였죠.

    전남 광주 역시, 비상계엄군이 대학을 장악하고 학생들의 등교를 막았습니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은 격렬하게 항의했죠. 학생들과 비상계엄군 간의 충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거세졌고,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학생의 머리를 향해 진압봉을 휘두르고, 시민의 가슴을 향해 총을 쏴댔던 비상계엄군…. 시민과 학생들은 도청을 점거하고 총기를 탈취해 저항해 보려 했지만 1980년 5월의 광주는 광기 어린 핏빛으로 물들어 갔습니다.

    오늘은 그때 그 현장에 계셨던 이경남 목사를 5월 18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5월, 그날이 오면

    ▶ 현재 평택 효덕감리교회 담임목사님으로 계시는데 부임하신지 얼마나 되셨나요?

    부임한 지는 6년이 되었고 이전에는 강원도 철원에서 목회를 16년 정도 했습니다.

    ▶ 5월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임에도 1980년 이후에는 아름다운 계절만으로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아요. 5월 18일 아침이 되면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떠오르세요?

    세월이 많이 흐르다보니 아프고 괴로웠던 기억들은 희미해졌고 가슴 한곳에 아련하고 귀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 당시 부상을 당하셨다면서요.

    지금은 아주 건강하고 새벽예배 끝나고 2시간 동안 꾸준히 산책을 하고 있어요. 부상의 후유증은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 광주에는 정확하게 언제 투입이 되셨어요?

    투입보다는 당시 광주 민중 항쟁 전후의 상황에 대해 이해가 필요한데, 저희 부대가 강원도 화천에 있었어요. 그러다가 1980년 5월 초에 전국에 있는 공수부대가 부대이동을 하게 됩니다. 강원도 화천에서 김포의 1공수여단으로 와서 거기서 보름 정도 대기하다가 5월 17일 밤에 대학으로 출동명령이 떨어지면서 투입이 되죠. 비상계엄령 선포가 5월 17일이었는데 자정에 동국대학교에서 비상계엄령 확대 방송을 들었어요. 드디어 일이 벌어지는구나 생각했어요.

    ▶ 군 입대는 언제 하셨나요?

    79년 5월 21일에 입대를 했습니다. 당시 목원대 신학대학 3학년을 마치고 개인적인 정황 자체가 공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입대를 했는데 공수부대원으로 차출이 돼서 공수부대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들어가서 1년도 안 되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난 거죠. 들어가서 가장 기본적인 훈련과 부대배치를 받고 강원도 화천으로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한 달 후에 10.26 시해 사건이 나고 비상경계령이 떨어졌는데 또 얼마 후에 12.12사건이 일어나서 굉장히 어수선한 가운데 80년 봄에 광주 민중 항쟁이 발생했어요. 그때 부대 출동명령이 떨어져서 가게 되었어요.

    ◇ 20세기에 벌어진 대한민국의 야만

    ▶ 10.26 시해 사건 이후에 부대에서 교육이 있었어요?

    당시 사병들로서는 이해를 못했죠. 비단 사병들 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방송조차도 베일에 싸인 집단이었기 때문에 군부의 내부적인 문제는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12.12사태가 나면서 합수부를 만들고 보안사령군과 중앙정보부장을 경직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군부실세들이 드러나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향후 정국에 대한 염려와 짐작을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군 내부적으로는 당시의 상황들에 대해서 사전 정신교육들이 이루어지고 있었어요. 시국이 불안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권력자의 공백으로 인한 국가적인 안보의 위기, 남침에 대한 위험성 등을 강조하면서 조속한 시일 내에 시국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어요.노골적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군부의 재집권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것들도 교육을 받았어요.

    ▶ 훈련은 평소에 받던 것과는 다른 훈련이었나요?

    대통령이 죽고 나서는 일반 훈련은 다 제쳐놓고 소위 말하는 폭동진압훈련을 대부분 받았어요.

    ▶ 군대에서 특별한 혜택 같은 것들이 있었어요?

    특전사들은 일반 부대원들과 같지 않고 일반사병이지만 보수가 굉장히 높았어요. 왜냐하면 낙하산을 타는 것에 대한 생명수당이 있었기 때문에 하사관이나 장교도 다 높았어요. 그랬는데 12.12 사태 이후 연말에 하사관이나 공수부대원들에 대한 파격적인 지위향상 등이 내부적으로 다 이루어져 있었어요. 군인들이야 내막을 자세히 모르니까 좋아했죠. 저는 대통령이 죽고 난 후 어렴풋이 군부의 재집권에 대해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 그런 상황에서 광주에 대한 것은 전혀 모른 상태에서 투입이 되신 거로군요.

    당시 군부대 입장에서는 소위 반체제 인사들과 지식인들을 누르고 방송국을 장악하면 다 해결된다고 판단했고 사실 그렇게 됐어요.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유독 주동자들, 정치나 학계, 종교계에서 체제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지식인들을 체포하니까 대한민국의 모든 지식인들이 잠잠해졌잖아요. 서울역 앞에서도 큰 시위가 있기는 했었지만 유독 광주에서 시위가 잦아들지 않고 이어지니까 공수부대가 투입된 거죠. 그래서 제가 5월 18일에 동국대학교에 있다가 저녁 5시쯤에 출동명령이 떨어지면서 그날 밤 9시에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데 갈 때까지도 어디 가는지도 몰랐어요. 그리고 지휘부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 하면, 제주도에 게릴라가 침투해서 소탕하러 간다고 해서 기차 안에서 이제 드디어 북한특수부대원들과 한 판 붙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갔어요. 그런데 내려 보니까 광주역이더라고요.

    ▶ 광주에는 아침에 도착하셨나요?

    광주에 도착하니까 새벽 2시쯤이더라고요. 조선대학교에 바로 들어가서 짐 풀고 잠을 잤어요. 그리고 두어 시간 눈 붙이고 아침 6시쯤인가, 식사도 하기 전에 출동명령이 떨어지더라고요. 위력시위라고 해서 군인들이 군용차량에 탑승해서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오전 내내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시민들의 기선을 제압하는 시위를 했어요. 군부의 위압적인 힘을 시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저항하려는 힘과 데모대의 기를 꺾는 성격의 시위라고 볼 수 있어요.

    ▶ 그럴 때 광주에서의 분위기나 시민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평온했어요. 당시 우리나라 자체가 비상계엄령 아래에 있었으니까요. 또 우리나라 국민들 대다수가 권력공백 상태에 대해 불안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상황이 그렇다 보니까 이번 기회에 독재정권에서 민간정권으로 이양되어야 한다는 양식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누가 권력을 잡든지 나라가 빨리 수습되어서 혼란과 불안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대중들도 있었어요.

    ◇ 금남로에 뿌려진 붉은 피

    ▶ 시위대나 데모대와 맞닥뜨린 것은 언제인가요?

    위력시위 후에 학교로 다시 돌아와서 뒤늦게 식사를 하고 군 내무반에서도 생활환경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런 작업들을 했어요. 그리고 5월 20일 아침에 광주 시내에 나갔는데 심각한 사태가 발생했어요. 당시 우리나라 공수여단이 6개 여단이었어요. 광주에 3개 여단,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공수여단의 절반이 투입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7공수 여단에서 2개 대대, 그리고 저희 11공수 여단에서 3개 대대, 이렇게 해서 5개 대대가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투입되면서 시내에서 진압작전을 했어요. 시내에 투입된 병력이 1,500명 정도 되었을 텐데, 심각할 정도의 난폭한 진압이 이루어졌고 저도 그 현장에 있었어요.

    ▶ 시위가 어떻게 해서 시작이 된 건가요? 시위대가 돌멩이를 던졌나요?

    그것도 아니었어요. 공수부대원들을 시내의 각 요로에 배치를 하고 시위하던 학생도 소수였고 시위하던 학생들도 대학교 정문에서 투석하다가 우리들이 쫓아가면 도망가고 그랬어요. 또 학생들이 흩어져서 시내에 400명 정도가 모여서 시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위대를 포위하려고 군인들을 보냈는데 시내이다 보니까 쫓아가면 학생들은 도망가면 그만이죠. 소수의 시위대를 체포하거나 해산하는 과정에서 일반 시민들과 시위대를 구분할 길이 없으니까 민간인들이 많은 희생을 당했어요.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군인들이 무조건 들어가서 진압하다 보니까 애꿎은 피해자들이 참 많이 나왔고 또 도심 한복판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니까 정치에 별 관심이 없던 시민들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폭력 앞에 격노하게 되고 반항하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그때는 대검이나 발포 등을 하지는 않으셨나요?

    군인들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어요. 시민들을 향해서 특전사 부대원들이 무기를 사용하여 대치한다는 건 생각도 못했어요. 왜냐하면 상식 밖의 일이니까요.특전사라는 부대 자체가 직업군인들이고 고도의 훈련을 받은 최정예 군인들인데 일반 시민들을 적의 개념으로 삼아서 행동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에요.군인들은 찾아가서 소리나 지르고 위협하면 흩어지고 그런 입장이었는데, 그런 과정에서 난폭하게 진압하니까 시민들이 항거를 하게 된 겁니다. 제가 5월 20일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내에 있었는데 군인들의 난폭함 때문에 광주 시내가 초토화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 왜 군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난폭해진 걸까요?

    당시 권력의 공백이 생기니까 유사시에는 대북침투를 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고 또 최전방에서 근무를 하다 보니까 체제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없는 거예요. 빨리 나라가 안정이 되고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생활의 안정을 찾고 싶은 심정이 큰 거죠.민주화 운동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우니까 민주주의고 뭐고 개념을 떠나서 생활이 너무 긴장이 되었어요. 당시 데프콘 Ⅲ가 발동이 되니까 군인들도 외출과 외박은 꿈도 못 꾸고 부대에서 자고 군화 끈도 못 풀고 옷도 입고 자고 하니까 군인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날카로워졌어요. 자칫하면 데프콘 Ⅱ로 바뀌면 바로 전쟁에 투입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또한 군대 내부에서 폭동진압훈련이 주는 고달픔 때문에 굉장히 예민해져있었어요.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이 요구하는 민주화에 대한 이해들이 없었어요. 그리고 시위대에 대해서 좌경이나 용공으로 세뇌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반감도 컸고요. 어쨌든 대부분의 군인들이 빨리 시위를 진압해서 안정을 찾는 것이 국가를 위한 길이라고 가치관과 사고 판단을 많이 했을 겁니다.

    이경남2
    ◇ 인간의 숭고함과 사악함은 동전의 양면

    ▶ 그 와중에 다친 시민을 구해주셨다는데, 그 상황을 잠시 설명해 주시겠어요?

    일반 시민들은 궁금해 하시죠. 어떻게 자국민들에게 군인들이 그렇게 난폭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믿어지지 않겠죠. 이미 5.18 기념관이라든지 5.18묘지를 가보면 저도 놀랄 정도로 참혹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어요.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있었던 곳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랐어요. 제가 2000년도에 KBS와 MBC 기자들, 신문사 기자들과 함께 5.18묘지를 방문한 일이 있는데 현장에서 제가 깜짝 놀랐어요. 이런 일이 있었는가 하고요.

    사진을 보니까 너무 처참한 거예요. 당시 사건이 컸고 광범위하게 벌어지다 보니까 내가 알지 못한 곳에서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됐죠. 광주 민중 항쟁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것들이 공개가 되었기 때문에 다친 시민을 구했다는 걸 말하기 보다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전쟁과도 같은 상황 속에서 두 가지를 경험한다고 생각해요. 인간성의 비열함과 사악함을 봐요.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죠. 200명이 넘게 살해되고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쳤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거잖아요.

    또한 그 반대로 숭고한 인간성을 발견한다고 생각해요. 당시 저는 일병 신분이었기 때문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지만 광주의 처참한 상황들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웠어요.마음으로는 시위대의 요구를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을 우호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고 권력자들의 도구가 되어서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동료들과 지휘관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지적인 인식의 한계와 이해관계에 얽혀서 행동하는 모습에 측은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주변 동료들에게도 자제하도록 요청했고 제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노력은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버님이 직업군이셔서 14년 동안 군 생활을 하셨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아버님을 통해서 전쟁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버님이 6.25참전 군인이셨기 때문에 전쟁에 대한 비극과 불행 뿐만 아니라 그 비극의 와중에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어요. 아버님이 황해도 신천 분이신데 나라가 분단되는 가운데 북한체제에 적응할 수 없어서 4남 2녀의 형제들 중에서 큰아버님과 아버님, 두 분이 월남을 하셨어요. 큰아버님 같은 경우는 군관학교 8기생이신데 6.25 전쟁나기 직전인 23일(금요일)에 결혼하셨고 6월 25일(일요일)에 장교소집 때문에 육군본부에 오셨다가 전쟁이 터진 바로 다음날인 26일(월요일)에 돌아가셨어요. 북한에 남아계셨던 두 분은 형제들이 월남을 하니까 북한에서 하도 괴롭히니까 한 분은 인민군에 입대를 하셨다가 폭격에 돌아가시고 또 한 분은 좌경에 의해서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6.25 전쟁 때문에 4형제 중에서 삼형제가 돌아가신 거예요.

    저희 아버님을 통해서 전쟁에 관련된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어떤 분이 자가용에 많은 옷 보따리를 갖고 오셨어요. 아버님이 전쟁 당시에 부산으로 지프차를 타고 가시는데 병들어서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지프차에 태워서 부산에 있는 육군병원으로 입원시키고 치료를 해 주시고 다시 부대로 돌아왔는데, 나중에 일 때문에 서울에 오셨다가 수십 년 만에 그 분을 만난 거예요. 그 분이 옷가게를 크게 하시는 도매상이었는데 너무 감사하다고 옷들을 가지고 오신 거였어요. 전쟁의 와중에 꽃피운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들었죠.

    80년 5월 21일로 기억이 나는데요. 심각한 진압작전에 광주시민들이 격노하게 되고 지휘관들이 그만하라고 해서 물러났다가 22일에 다시 투입이 되었는데 무자비한 진압에 시위대도 없어지고 시민들도 군인들을 두려워하는 눈빛이 역력했어요. 그래서 22일은 고요했는데 저녁에 시민들이 격노해서 차량시위가 벌어지고 시위대가 다시 운집하고 광주 시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와서 더 이상 시위대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시민들의 거센 항의에 군인들도 어쩔 수 없으니까 조선대학교로 퇴각을 했어요. 그날 밤 9시 경이었는데 군인들도 더 이상 퇴각하지 않고 학동 오거리에서 배수진을 쳤는데 시위대가 소방차를 탈취해서 군인들의 저지선을 통과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그 어두운 밤에 시위대가 던진 투석에 군인들이 다치니까 군인들도 격노하게 되고 결국 시위대와 군인들이 충동해 버렸어요.

    군인들이 끌고 다니던 장갑차에서 계속 공포사격하고 총성 나고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죠. 4~500대 정도의 노동자이신 분이 군인들에게 얼마나 매를 맞았는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다 돼서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냥 그대로 놔두면 죽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들쳐 업고 뛰었는데 어느 집이든 시민들이 두려우니까 아무도 문을 안 열어주죠. 불빛이 나오는 곳으로 뛰어 들어가서 보니까 교회더라고요. 아주 인자하신 나이 많으신 목사님에게 이끌려서 서재로 들어갔는데 군인들 피해서 모인 학생들이 5~6명 숨어 있었어요. 그 노동자를 내려놓고 보니까 머리가 15cm정도 깨져있고 손발은 제멋대로 움직였어요. 일단 부대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나왔는데 밖에는 군인들은 철수했고 시위대가 거리를 꽉 메웠는데 잡히면 제가 죽을 판이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들어갔더니 목사님이 오늘 밤은 여기 있으라고 해서 밤새 그곳에 있었어요. 그러면서 그곳에 있던 학생들과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당시 시민들의 격노, 시민들 측에서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해서 군부에 항의를 한다는 이야기들을 들었었죠. 그 다음 날, 목사님이 길을 인도해주셔서 새벽 4시에 조선대학교로 부대복귀를 했어요. 부대입장에서 보면 비상계엄령 하에서 탈영을 했으니까 즉결처분, 사형감인데, 조선대학교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전남도청 앞에 있는 상무대에 다 들어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침에 차를 타고 갔는데 지휘관이 제가 실종된 줄 알고 있다가 나타나니까 엄청 화가 나서 부대원들 모두가 있는 앞에서 엄청 두들겨 맞았어요. 제가 입고 있던 군복이 피투성이여서 지휘관이 아마 짐작을 했을 거예요. 매만 맞고 끝난 건 천만 다행이지요. 지휘관들도 악당은 아니었거든요.

    ▶ 그 이후에도 또 누군가를 도와주셨다면서요.

    그날이 5월 20일로 도청 발포사건이 난 날이거든요. 9시경에 나갔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도청에서 시위대와 대치할 때 맨 앞에 있어서 현장을 목격했어요. 시위대 돌진하고 군인들 퇴각하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정말 안타까웠어요. 시위대가 애국가와 노래를 부르고 군인들은 더 이상 앞에 나가지 못하고 막고만 있는데 해결할 길이 없어요. 시위대의 요구는 군부세력이 물러가는 거였고 군인들은 시위대를 해산하는 거였는데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어요. 군부 상층부의 문제라서 일선의 지휘관들이 들어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어요. 지휘관들이 훌륭한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 사태만 아니었으면 국가에 충성과 봉사를 다하는 훌륭한 인품을 가진 분들인데 정치적인 문제가 걸리니까 너무 안타깝더라고요.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이분들도 안절부절 못하는 거예요. 그날 도청에서 군인들이 심하게 시민들을 때리고 그런 와중에서 시민 한분을 또 업고 시민들이 있는 쪽으로 데려다줬어요. 차들이 돌진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위험하니까 피신시킨 거죠. 그랬더니 저희 부대 중사 한 분이 제 목에 칼을 대면서 ''''너, 아군이야? 적군이야?'''' 하시더라고요. 세상에, 시민들을 아군과 적군으로 구분하는 게 어디 있어요. 웃고 말았는데 두 번 다시 그런 행동하면 용납하지 않겠다고 그러더라고요.

    ◇ 철저히 통제된 광주의 실상, 아무도 몰라

    ▶ 광주항쟁 당시 군인들의 난폭한 진압 장면을 외국방송에서 대대적인 특집으로 다뤄질 정도였어요.

    저도 그런 이야기들을 들었는데 외국에서 방송된 정보들은 굉장히 지엽적이고 제한된 것들이었어요. 당시 외국방송사 카메라맨들을 공수부대원들이 호위하면서 이것 찍어라, 저것 찍어라 하면서 그렇게 방송을 했어요. 그리고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을 외국방송사에서 제대로 찍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국내방송사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이 에스코트하면서 찍었기 때문에 굉장히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보도가 나갔어요. 그런데 그걸 보고 사람들은 놀랐다고 하는데 실상은 그것보다 더 참혹했어요.

    ▶ 다른 지역에서는 광주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5월 21일 교회의 목사님 서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평택 집에 전화를 했어요. 그런데 전화가 불통이더라고요. 광주가 확산이 되니까 이미 군부 측에서 통신을 차단시킨 거예요. 시내전화는 되는데 시외전화를 차단하니까 광주소식이 광주 이외의 어떤 곳에도 새어 나갈 수 없게끔 군부에 의해서 통제를 받았어요. 또한 버스나 차들이 다니는 도로도 차단하니까 일반 시민들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길이 없는 거죠. 유일하게 광주를 알릴 수 있는 것이 방송국이었는데 그때 MBC방송국을 시민들이 격노해서 불을 질렀는데, 그 이유가 광주의 실상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데 방송국은 이미 군인들이 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폭도, 난동, 간첩 등 이렇게 일방적인 방송을 하니까 시민들이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그래서 방화를 하게 된 거죠.

    ▶ 진압군과 진압군 사이에서도 총격전이 있었나요?

    광주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이 144명, 그리고 죽은 군인들이 24명 정도로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죽은 군인들 대부분이 동료들의 오인사격에 의해서 죽은 거예요. 두 번에 걸쳐서 오인사격이 있었는데 광주보병학교와 11공수여단 사이에 5월 24일에 교전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31사단과 교전이 있어서 오인사격으로 죽었지 정작 시위대와 충돌해서 죽은 군인들은 굉장히 소수였어요.

    ◇ 「20년만의 고백」으로 용서받은 광주의 기억

    ▶ 제대하시고 바로 학교에 복학하셨을 텐데 혹시 특전사에 계신 것을 다른 학생들도 알고 있었나요?

    알고 있었죠. 1999년에 「20년 만의 고백」이라는 글을 썼고 ''''당대 비평''''이라는 잡지에 기고를 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2000년도에 전태일 문학상을 주더라고요. 이 「20년 만의 고백」이라는 글을 쓰기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광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어요. 쉽게 떠들어댈 내용이 아니라서 가슴속 깊이 간직해 있다가 1999년 5월에 3개월간 집사람이 집을 비운 사이에 이제는 글로 쓸 수 있겠다 싶어서 컴퓨터에 앉아서 쓰는데 쓰면서 많이 울었어요. 당시에는 몰랐는데 뒤늦게 겪은 일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회상하면서 글을 쓰니까 너무 기가 막혀서 이틀 동안 글을 쓰면서 많이 울었죠. 포탄과 총탄에 맞아서 부상을 당하고, 생사의 고비를 넘은 광주에서의 일들로 인해서 제 안의 많은 내면의 변화가 일어났어요.

    ▶ 20여 년 동안 많은 마음고생이 있으셨을 텐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한 이후에도 어려운 일들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아내를 만났는데 굉장히 성숙하고 안정된 사람이었어요. 집사람을 만나면서 안정을 찾게 되고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신학적인 정돈도 되었죠.그 후에 결혼하고 강원도 철원에서 목회를 하면서 신앙적인 유익한 체험들을 많이 했습니다. 이곳에서 많은 변화와 신앙적인 성숙을 경험했어요.

    ▶ 망월동 묘지에 가보셨어요?

    KBS, MBC에서 요청해서 몇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2000년 5월에 광주도청에서 100분 토론에 초청받아서 패널로 참여했는데 그 이외에도 신문사, 방송사에서도 요청이 있어서 4~5번 정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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