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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리뷰]대학살 방관하는 무력한 세계 '쿠오바디스, 아이다'



영화

    [노컷 리뷰]대학살 방관하는 무력한 세계 '쿠오바디스, 아이다'

    외화 '쿠오바디스, 아이다'(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

    외화 '쿠오바디스, 아이다' 스틸컷. 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 스포일러 주의

    정부가, 세계가 외면한 참극에 무고한 이웃과 가족이 목숨을 잃어가는 걸 목격해야 했던 여인의 모습을 통해 외화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묻는다. 역사적 비극을 외면한, 그리고 외면하려는 세계의 무기력함이 어떤 비극을 만들어냈는지 말이다.

    보스니아 전쟁 말기인 1995년 7월 11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접경 도시 스레브레니차. 아이다(야스나 두리치치)는 스레브레니차의 작은 마을에 주둔한 유엔의 통역자로 일한다.

    세르비아계 반군이 결성한 스릅스카 공화국 소속 라트코 믈라디치가 지휘하는 세르비아 민병대는 압도적인 머릿수와 세르비아의 지원을 바탕으로 유엔이 '안전 지역'으로 선포한 스레브레니차에 밀고 들어온다.

    세르비아 군대가 마을을 향해 폭격을 가하고 점령하기에 이르자 아이다의 가족을 비롯한 수천명의 주민은 유엔 난민보호소로 대피하려 한다. 그러나 한정된 시설에 보급마저 끊긴지 오래인 보호소는 모든 주민을 수용하지 못한다. 협상테이블의 내부자로서 아이다는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되고, 어떻게든 그의 남편과 두 아들을 구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이어간다.

    외화 '쿠오바디스, 아이다' 스틸컷. 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영화는 1995년 세르비아군에 의해 8천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배경으로 한다. 스레브레니차 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단 학살로, 남자와 10대 소년들은 물론 아기까지 살해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스레브레니차 주민이자 동시에 통역관으로 유엔에 소속된 여성 아이다가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정을 따라 당시를 재현한다.

    아이다는 남편과 두 아들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스레브레니차는 유엔에 의해 안전 지역으로 지정됐지만 유명무실한 안전 지역일 뿐이다. 세르비아군은 '안전 지역'을 무시한 채 아무렇지 않게 스레브레니차를 향해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보급도 지원도 없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윗선의 말에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은 무력하게 상황을 바라만 본다.

    그저 각자의 위치, 각자의 이익, 각자의 상황만 중시할 뿐 작은 마을 스레브레니차와 그곳 주민들의 안위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 사이에서 모든 비극을 눈과 머리와 마음에 아로새겨 나가는 것은 스레브레니차와 유엔 두 곳에 소속된 미묘한 위치의 '아이다'뿐이다.

    외화 '쿠오바디스, 아이다' 스틸컷. 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스레브레니차에 위치한 난민보호소와 주민들을 가르는 유엔군의 경계를 오가는 아이다는 주민으로서 가질 수 있는 분노와 공포, 유엔 소속으로 느끼는 무력함 모두를 동시에 경험한다. 경계 밖에 선 주민들의 두려움, 보호소 안에 가까스로 들어왔지만 보급품도 없어 열악한 상황에 놓인 주민들의 얼굴에서 본 꺼져가는 희망을 마주한 아이다는 복잡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가족을 지키고자 자신의 유엔 통역관 지위를 이용해 겨우 보호소 안으로 들이지만 거기까지다. 두려울 것 없는 세르비아군은 당당하게 유엔군의 영역으로 난입하고, 유엔군은 세르비아군의 행태를 두고만 본다. 그렇게 학살을 향한 계획이 차근차근 이뤄져 나가지만 세계는, 유엔은 방관자의 역할에 그친다. 관료들의 셈법에 따라 움직이는 유엔은 그 이름과 달리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정부와 전쟁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방관의 결과는 8천명이 넘는 주민들을 향한 세르비아군의 대학살이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반은 유엔에 걸쳐 있던 아이다는 홀로 살아남는다. 모두가 눈을 감은 속에서 홀로 눈을 뜬 채 어떻게든 살려내고자 했던 아이다는 무기력함과 공포, 슬픔과 상실을 경험한다.

    외화 '쿠오바디스, 아이다' 스틸컷. 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로지르는 것은 아이다의 감정이다. 모든 것을 앗아간 전쟁의 민낯,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고한 주민들을 해친 세르비아군의 학살, 그리고 자신과 가족은 물론 주민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세계 기구 유엔의 방관을 목도한 아이다가 온몸으로 부르짖는 복잡한 내면의 세계가 이 영화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제목에 함축적이면서도 은유적으로 담겨 있다. '쿠오바디스, 아이다'란 제목은 "쿠오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란 질문과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가 떠오르게 한다. 소설 혹은 영화 속 질문과 오페라의 내용을 떠올린다면, 영화의 제목은 더욱 무겁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카메라 역시 영화의 중심인 아이다를 시종일관 뒤쫓는다. UN과 스레브레니차 사이 아이다, UN과 가족들 사이 아이다 등 한 가족의 일원이자 스레브레니차 주민이자 UN 소속인 아이다의 복잡한 심경과 그의 슬픔을 따라 이곳의 비극이 만든 결과를 모두에게 드러낸다. 아이다 그 자체가 된 야스나 두리치치의 열연이 더해져 관객들은 스크린에 더욱 몰입할 수밖에 없다.

    아이다와 함께한 관객들은 학살자와 방관자를 향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들이 '안전 지역'에서 유명을 달리할 때 그들을 보호했어야 할 유엔과 세계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말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세르비아군에 대한 비난과 무력한 유엔의 존폐가 아니다. 미얀마에서 볼 수 있듯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반복되고 있는 전쟁과 이로 인한 참극의 되풀이, 그리고 자신의 본래의 역할을 해야 할 그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았을 때 어떠한 비극이 벌어지는지 아이다를 통해 묻기 위한 영화가 '쿠오바디스, 아이다'다.

    아이다의 눈물과 그의 마지막 얼굴은 지금, 현실의 세계와 정부에 촉구한다. 더 이상 스레브레니차의 비극을 반복하지 말라고 말이다.

    104분 상영, 5월 19일 개봉, 15세 관람가.
    외화 '쿠오바디스, 아이다' 포스터. 엠엔엠인터내셔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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