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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처럼 찾아온 독립, 임정의 혼란



사회 일반

    도둑처럼 찾아온 독립, 임정의 혼란

    [임시정부 27년의 기록 ⑩]중경시기 1940.09~1945.11

    ※이 글은 100년전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각종 문헌과 기록, 인터뷰에 기반해 시간순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임시정부가 중국내 8곳의 도시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가상의 주인공 '나'를 앞세워 내러티브 방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100년 전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됐나
    ②100년전 4월 혁명의 거점 상해에선 무슨일이
    ③상해 떠난 임정, 각박한 생활 속 빛난 조력자들
    ④중일전쟁 발발로 풍전등화의 처지 임정
    ⑤내부의 적이 쏜 흉탄에 갈등의 골만
    ⑥위태로운 임정에 가해진 네 발의 총격
    ⑦지독히도 임시정부를 괴롭힌 일본군의 폭격
    ⑧한국 청년들의 멋과 흥으로 유주 땅을 뒤흔들다
    ※[팩트체크] 1948년 건국 논란, 이승만도 부정했다?
    ⑨임정의 정신적 지주 이동녕 타계하다
    ⑩독립은 별안간 밤에든 도둑처럼 찾아왔다


    우리는 최종 목적지인 중경으로 이동했다. 이동 후 혹시 도사릴 지 모를 위험을 줄이기 위해 김구 선생은 중경의 장개석 주석으로부터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약속 받았고, 무사히 중경에 터를 잡을 수 있었다.

    나를 비롯한 임정 식구들은 중경의 외곽인 토교에 자리를 잡았다. 임시정부는 중국진재위원회로부터 6만 원의 원조를 받아 이곳의 땅을 15년 기한으로 빌렸다. 그리고 집 세 채를 새로 짓고 10여 가구가 이곳에서 새로이 생활을 시작했다.

    중경에서도 궁핍한 생활은 계속됐지만 저마다 텃밭을 가꾸고 고구마와 옥수수를 재배하며 식구들끼리 나눠 먹었다.

    팍팍한 생활이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유로운 날들이 계속됐다. 정정화 선생은 이런 생활이 퍽 맘에 들어서인지 나에게 흡사 고향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에서 대회사를 하는 김구. 한국 광복군 성립 전례식이 1940년 9월 17일 중경 가릉빈 관에서 거행되었다. 임시 정부 국무 위원과 중국인, 기타 외국인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임시정부는 중경에서 본격적인 국가 기틀을 닦았다. 임시정부는 기강 때부터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논의했고 1940년 9월 17일 가릉강 기슭에 위치한 가릉빈관 호텔에서 마침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열었다.

    광복군 창설의 실무 작업은 군사간부로 일하던 지청천, 이범석, 유동열, 김학규 선생들이 맡았다. 지청천 선생이 한국광복군의 초대 총사령으로 임명됐고, 참모장은 이범석, 각 지대장은 이준식, 공지원, 김학규, 나월환 선생이 맡게 됐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내 큰 난관에 봉착했다. 중국군사위원회가 한국광복군을 자기들 지도아래 두고자 하는 속셈으로 한국광복군의 승인을 불허하는 것이다.

    지난한 교섭 끝에 중국의군사위원회는 1941년 5월 한국광복군을 지휘하는 조건으로 광복군을 승인했다.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 참석한 한중 대표한국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대였다.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 광복군 성립 전례식이 열렸다. 총사령관은 지청천, 참모장은 이범석이었다. 앞줄 왼쪽 여섯 번째부터 홍진, 이청천, 김구, 차이석이고, 한 사람 건너서 이시영이다

     

    비록 중국군의 지휘를 받게 된 게 아쉬웠지만 드디어, 나름대로 국가의 정규군으로서 무력을 갖추게 됐다는 생각에 나로서는 큰 기쁨이었다.

    실질적인 물리력을 갖게 되자 김구 선생과 조소앙 선생 등 임정 지도부는 협의 끝에 일제에 무장투쟁을 벌이자는 결론을 내게 됐다. 그리고 일제가 진주만을 공습한 지 이틀 뒤인 12월 10일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고 일본군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선전포고서는 사실 상징적인 문서였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전쟁을 치루는 일본과 정면으로 맞선다는 건 광복군의 궤멸을 뜻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는 무력을 우회적으로 이용해 일제를 몰아낼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그 결과 추축국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연합군에게 일단 독립 승인을 받고 연합군의 작전에 공동 참여하자는 안에 힘이 실렸다.

    그런데 임정에는 연합군과 직접 연결한 통로가 없었다. 따라서 국민당 정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연락을 꾀해야 했다.

    우리는 국민당 정부의 승인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국민당 정부는 미국이 우리를 승인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민당은 임시정부를 국민당 단독으로 승인하는 것이 어렵다다고 통보해왔다.

    참으로 답답한 상황이었다. 큰 산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 즈음 우리에게 반가운 소식이 도착했다.

    1943년 11월 경 미국, 중국, 영국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대일항전과 전후 처리에 대하여 구체적인 회담을 갖는다는 첩보가 전해졌다. 그러지 않아도 연합군에게 독립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힘쓰던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우리는 곧장 국민당 장개석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조소앙 외무부장, 김규식 선전부장, 지청천 광복군총사령, 김원봉 선생 등이 장개석과의 면담을 위해 회담장에 나갔다.

    카이로 회담에서 만난 연합국측 고위관료들(카이로 회담에서 만난 연합국측 고위관료들. 앞줄 왼쪽부터 장개석 총통, 루즈벨트 대통령, 처칠 수상, 송미령. 뒷줄 왼쪽 세번째는 Anthony Eden, John G. Winant, Eden의 왼쪽부터 왕정위 박사(안경), R.G.Casey. 뒷줄 오른쪽에서 네번째부터 Averill Harriman, Harold Machillan 의원.)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은 줄곧 국제공동관리설에 대해 반대하며 장개석을 설득했다. 장개석은 미국과 영국을 설득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지만 힘써보겠다고 약속했다. 마침내 1943년 12월 1일 연합국 수뇌가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카이로 선언'이 발표 됐다.

    선언문에는 애매한 어구 등이 있었다. 임시정부 내 갑론을박도 이어졌지만, 일단 우리에겐 너무나 큰 호재였다.

    1945년 2월, 우리는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미국의 전략정보국인 OSS도 우리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 계획에 함께하기로 했다.

    OSS의 작전은 광복군을 한반도에 진입시켜 첩보활동을 한다는 계획인 '독수리 작전'을 수립했고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광복군은 서안에서 미군에게 3개월 과정의 군사 교육을 받았다.

    미군 OSS에서 위탁교육 받던 한국광복군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등 군 지휘관이 미군과 협의한 결과 국내 진공 작전은 크게 세 단계로 계획됐다.

    1단계, 광복군 대원들이 잠수함으로 국내에 진입. 2단계, 국내에 거점을 마련하고 공작을 통해 인심을 선동. 3단계, OSS측과 연결해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하여 적 후방에서 대규모 무장.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미군에 3개월 간 교육을 받으러 갔던 우리 군사도 이제 출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8월 9일 나는 김구·지청천 선생과 함께 서안에 머물고 있었다.

    8월 9일 나는 김구선생과 섬서성 주석 축소주의 관저인 서안에서 저녁만찬에 참석하고 있었다.

    대략적인 저녁식사를 마치고 난 뒤 축소주 주석과 김구 선생, 나는 후식으로 수박 몇 점을 들던 참이었다.

    이윽고 관저 안방에서 요란한 전화벨이 울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축소주 주석은 묘하게 상기된 얼굴로 우리에게 소리쳤다.

    "일본군이 항복한답니다"

    소식을 들은 김구 선생은 침묵에 잠겼다. 나는 김구 주석을 바라만 보았다. 침묵은 오래 갔다.

    김구 선생은 착잡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이 소식이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인 기분일세. 수년 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마는 형국인데 이에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는가"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온 광복, 거의 다 준비됐던 국내 진공작적 무산. 임시정부는 혼란스러웠다.

    당장 미국과 임시정부의 이전에 대해 협의해야 했고, 중국에 거주 중인 한인의 입국도 관장해야 했다.

    우리는 곧장 미국에게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국내에서 정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우리의 뜻과는 다르게 미국은 임시정부를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귀국을 허락한다고 입장을 표했다.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은 극노를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며칠 못가 김구 주석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임시정부 요인이 모두 귀국하는 것은 정부가 귀국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구 선생은 귀국 채비를 서두르자고 명했다. 귀국이 결정되자 중경에서 상해까지는 중국이상해에서 대한까지는 미군 측에서 필요한 교통편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10월 하순경에는 중국의 환송연도 열렸다.

    장개석 주석은 특별히 환국 경비로 1억 원과 미화 20만 달러를 내어주었다. 27년을 옮겨 다니며 이런 극진한 도움만 받으니 미안한 마음이 마음속을 떠나질 않았다.

    11월 3일 중경 청사인 연화지에서 환국기념 사진을 촬영을 했고, 이틀 후 우리는 상해에 도착했다. 그 달 23일, 오늘. 나는 김구 주석과 비행기에 올랐다. 김구 주석은 국내로 돌아가면 임시정부 때보다 더 큰 혼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며 나에게 경거망동 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하지만 27년만에 고국을 만난다는 생각에 떨리는 가슴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나는 기억을 잊기 전에 임정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기내에서 마지막 일기를 쓰고 있다.

    영광스러움, 슬픔, 기쁨, 환희와 같은 것들이 한 데 뒤섞여 설명하지 못할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글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고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해방은 우리에게 왔다.(끝)
    중경 연화지 청사에서 환국기념사진을 찍은 임정 주요인사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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