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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떠난 임정, 각박한 생활 속 빛난 조력자들



사건/사고

    상해 떠난 임정, 각박한 생활 속 빛난 조력자들

    • 2019-04-02 05:50

    [임시정부 27년의 기록 ③]가흥·항주 시기 1932.05~1935.11

    ※이 글은 100년전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각종 문헌과 기록, 인터뷰에 기반해 시간순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임시정부가 중국내 8곳의 도시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가상의 주인공 ‘나’를 앞세워 내러티브 방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편집자]

    글 싣는 순서
    ①100년 전 상해 임시정부는 어떻게 수립됐나
    ②100년전 4월 혁명의 거점 상해에선 무슨일이
    ③상해 떠난 임정, 각박한 생활 속 빛난 조력자들


    임시정부는 윤봉길 선생의 의거 덕분에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게 됐다. 다른 한편으론 일본이 임시정부에 대한 포위망을 좁혀왔다.

    상해를 떠났지만 우리의 운신의 폭은 더욱 좁아진 상태였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일본이 밀정 300여 명을 푸는 동시에 현상금 60만원에 달하는 거액을 걸어 김구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본에 체포당하는 악몽을 꿨다.

    항주 임시정부가 자리 잡았지만 일제의 감시가 워낙 심해 김구 선생은 항주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김 선생은 항주가 아닌 절강성 가흥에서 피신생활을 시작했다. 김 선생이 가흥에서 머무를 수 있었던 데에는 수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

    절강석 주석 저보성 초상화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절강성 주석 저보성 선생의 도움이 컸다.

    저보성 주석은 가흥 일대의 유지로 이름난 사람이다. 그는 윤봉길 선생의 의거 후 우리 독립운동의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해 우리의 거처를 마련해주는데 힘을 써주었다.

    저보성 주석은 양아들인 진동생의 집에 우리를 머물게 해주었다. 그 덕분에 김구 선생과 나는 일제의 포위망이 심해진 항주를 벗어나 가흥에 머물 수 있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다. 김 선생은 "우리 자손이나 동포 누가 저분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오"라며 저보성 가족의 도움을 고마워 했다.

    가흥 피난시절 임정 요인들과 도움을 준 중국인 (가흥 저봉장 집어린이 왼쪽: 김자동(김의한 아들). 엄기동(엄항섭 아들). 엄기선(엄항섭 딸) / 1줄 왼쪽: 진동생 부인. 정정화(김의한 부인). 민영구 어머니. 연미당(엄항섭 부인). 주가예(저보성 며느리) / 2줄 왼쪽: 진동생. 중국인. 김의한. 이동녕. 박찬익. 김구. 엄항섭. 저봉장)

     

    안락하진 않았지만 김구 선생은 저보성 선생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큰 문제는 임시정부내의 갈등이었다. 실질적 지도자인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 청사에 닿지를 못하니 임시정부내의 당파는 사분오열 하며 자기들끼리 새 체제를 만들어 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최동오의 조선혁명당, 윤기섭의 한국혁명당, 한일래의 조선의열단, 김규식의 한국광복단동지회는 통일동맹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지금의 임시정부 폐지를 꾀하고 새로운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올라설 계획을 세웠다.

    김구 선생은 이에 극히 대노하며 "작금의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와 다름없다. 각 당의 화력을 하나로 합치지 못한다면 우리의 대일전선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슬퍼했다.

    '이 투쟁의 끝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이 일기를 작성하는 지금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힌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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