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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박근혜 정권 존속 오판했다가 징용판결 허찔러



국방/외교

    日, 박근혜 정권 존속 오판했다가 징용판결 허찔러

    日, 90년대까지 '개인청구권' 인정하며 여유
    냉전, 권위주의 정권 벗어난 2000년대 들어 소송하자 '깜놀'
    전두환 군부정권 존속시 소송도 어려웠을 것
    朴정권 유지됐다면 대법원 판결도 달랐을 것

    대법원이 1940년대 일제에 강제징용 피해를 당한 4명에 대해 일본 기업이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린 30일 피해자 이춘식(94)씨가 서울 대법원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이번 판결은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한 지 13년 8개월 만이자 재상고심이 시작된 지 5년 2개월만의 판결이다.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청구 소송 판결을 내린지 6일로 1주일이 됐지만 일본의 반발은 강도가 커지고 있다.

    한일청구권 협정을 토대로 징용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한국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게 일본측의 반복되는 주장이다.

    정부 뿐 아니라 일본 의원들도 5일 야당을 찾아 가제징용 판결에 대해 "수용할수 없다"며 강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과거 일본의 태도와는 180도 달라진 것이다.

    사실 일본도 청구권협정이 체결된 1965년부터 1990년대까지는 국가 간 협정과 별개로 개인청구권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관련기사:日, 징용 배상의무 없다? '빼박' 증거는 차고 넘쳐)

    1991년 8월 27일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야나이 순지(柳井俊二)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이 "청구권협정은 한일 양국이 국가가 가지는 외교보호권을 서로 포기한 것이지 개인 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 의미로 소멸시킨 것이 아니다"라고 답한 내용이 담긴 참의원 회의록. (사진 출처=연합뉴스 제공)

     

    이런 입장에 변화가 생긴 건 2000년대부터였다. 이는 일본이 이번 대법원 판결에 사생결단식으로 '저항'하는 이유와도 닿아있다.

    경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김창록 교수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1990년대의 냉전 종식 이후 전쟁 피해국가들의 내부 사정이 바뀌면서 한국인 피해자를 필두로, 일본 및 일본 기업에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소송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90년대까지 일본 정부는 개인청구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보면서도, '법원 에서 (개인이) 알아서 하라'는 입장을 고수했다"며 "사실상 일본의 재판소에 한국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해도 일본 재판소가 피해자들 편을 들어줬겠나"고 반문했다.

    어차피 일본 법원도 일본 정부 식으로 한일협약을 해석할 테니 '개인청구권'에 대해서는 부담 없이 인정해왔다는 거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일본의 입장에서는 '위기의식'을 느낄만한 일이 생겼다.

    미쓰비시 중공업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한국 법원에서,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미국에서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각각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일본 정부의 '개인 청구권이 남아있다'는 해석을 근거로 미국이나 한국 법원에서 일본 정부 및 기업에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이후 일본 정부는 이전까지의 논리를 전면 재검토하고, '개인이 청구를 하더라도 일본이 그에 응할 의무는 없다'는 논리를 만들어내게 된다.

    일본 정부는 2000년 11월 미 캘리포니아주에서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전후 보상문제는 한일 청구권 협정 등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했다.

    또 2007년 4월 히로시마 수력발전소에서 강제 노역에 동원된 중국인 피해자와 유족들이 제기한 손배 소송에서 "청구권 협정으로 재판상 소송 권리는 상실됐다"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입장은 국가간 협약에도 개인 청구권이 남아있다고 보던 종전 입장과는 결을 달리 하는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이는 아베 정권의 기본 기조와도 자연스레 이어진다.

    일본 아베 신조 정권은 기본적으로 '우경화'에 기대고 있다. 교육기본법 개정, 고노 담화·무라야마 담화 검증, 야스쿠니 신사참배 강행 등으로 드러나듯, 일본의 과거사를 부정하거나 사죄하는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

    아베 정부는 '고노 담화'에 대해서도 지난 2014년 "한.일간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며 "(위안부)강제동원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내부 검증 결과를 주장한 바 있다.

    이런 논리가 이번 판결에 대한 반응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일본 정부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이 나온 이후, '강제징용자' 대신 '구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우고, '자발적 노동'이라는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서다.

    일본은 이렇게 '강제동원'이라는 단어를 강박적으로 부정하는데, 이 배경에는 90년대 이후 드러난 불법 행위 피해자들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받은 이옥선 할머니.(자료사진=황진환 기자)

     

    청구권 협정 당시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위안부, 사할린 교포 등의 배상 문제가 90년대 이후 불거졌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합법'으로 규정한 테두리에서 이뤄진 한일협정에는 언급되지 않은 불법행위 피해자들이다.

    개인 청구권이 남아있음을 인정해 온 일본의 입장에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다가는 여러모로 번거로운 상황이 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런 국·내외적 이유가 뒤섞인 결과, 일본은 "한일협정으로 마무리 된 사항을 한국이 물고 늘어진다"며 국내 여론을 결집시키고, 대외적으로는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 추궁에서 벗어나려는 입장을 취하게 된 셈이다.

    김창록 교수는 이와 관련해 "90년대 냉전이 붕괴되고, 국내적으로도 권위주의 정권이 무너지며 마침내 여러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게 됐다"며 "이전까지는 일본이 대응 자체를 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이후 대응 할 필요가 생기며 입장에 일부 변화가 생겼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우리나라도 1990년대 이후에도 군부 정권이 계속 이어졌더라면 징용 관련 소송 제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이어 박근혜 정권 같은 권위주의 정권이 존속했다면 대법원의 판결 양상 또한 지금과 달랐을 것이라는 관측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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