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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 빈자리에 시스템을 깔다



경제 일반

    총수 빈자리에 시스템을 깔다

    총수책임시대가 바꾼 2인자의 역할

    그들은 바람막이였다. 총수 대신 잘못을 떠안았다. 이런 충성심을 대가로 '권력'이라는 전리품을 얻었다. 재벌그룹 2인자. 이들은 총수의 '복심'이자 '그림자'였다. 하지만 총수책임시대가 열리면서 2인자의 역할과 위상이 변하고 있다. 2인자는 이제 '사람'이 아닌 '시스템'이다.

     

    # [2인자의 暗] 2003년 한국사회를 뒤흔든 불법대선자금 사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대선캠프에 국내 재벌기업이 거액의 돈뭉치를 전달했다가 검찰수사망에 포착된 사건이었다. 차떼기를 비롯한 기상천외한 전달수법이 동원됐다. 자금규모는 수백억원에 달했다. 재벌총수의 '영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이들은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 강유식 LG그룹 부회장, 김동진 현대차그룹 총괄부회장(당시 직함) 등 그룹 2인자들이었다. 오너는 2인자를 방패막이로 폭풍을 피했다. 2인자의 '암暗'이다.

    # [2인자의 明] 재벌그룹 2인자는 소수정예부대를 이끈다. 그룹의 재무ㆍ전략ㆍ기획 분야를 컨트롤할 뿐만 아니라 계열사간 얽히고설킨 자금을 관리한다. 오너 가족의 후계구도를 정리하는 일도 도맡는다. 2인자가 오너의 신뢰를 한몸에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는 2인자에게 그만큼의 권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2인자의 말과 행동에 오너 못지않은 영향력이 실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실례로 국내를 대표하는 A그룹의 2인자 B씨가 계열사에 방문하면 '그룹 회장이 온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돌 정도로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2인자의 '명明'이다.

    어느 기업이든 2인자를 갖고 있다. 글로벌 혁신 아이콘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에겐 팀 쿡이라는 2인자가 있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주에게도 스티브 발머라는 파트너가 있었다. 이들 2인자의 역할은 1인자를 경영적으로 보좌하는 것이다. 그림자라기보단 '파트너' '보좌역'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한국은 다르다.

    한국 재벌의 2인자는 철저한 그림자다. 이너서클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오너의 말과 행동을 외부에 전달하는 역을 한다. 오너나 오너의 가문의 불미스런 일을 대신 책임지는 등 '궂은일'을 도맡는다. 한국의 2인자를 '오너의 복심腹心''한국형 재벌문화가 잉태한 기형아'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국내그룹 2인자의 위상과 역할이 크게 바뀌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이후 검찰ㆍ국세청 등 권력기관의 예봉이 재벌총수를 압박하고 있어서다. 재벌 1인자인 총수가 구속을 피하지 못하는 시대가 왔다는 얘기다. 현 정부 들어 구속되거나 형ㆍ구속집행정지 상태인 재벌 총수는 10여명. 그중엔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구자원 LIG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등이 포함돼 있다. 이전 같았으면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거나 여론이 좋지 않으면 2인자가 대신 책임을 졌을 것이다.

    역할 달라진 재벌 2인자들

     

    이런 상황은 2인자의 역할이 무의미해졌음을 뜻한다. 비리문제나 사건이 터졌을 때 총수 대신 총대를 멜 사람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총수는 특정인에게 권력을 나눠줄 이유가 없다.

    실제로 SKㆍ한화ㆍCJ 등 총수가 구속된 그룹들은 비상경영의 키를 2인자가 아닌 집단지도체제에 맡겼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의 경영공백을 메우기 위해 올 1월부터 '수펙스추구협의회'라는 임시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수펙스추구협의회의 핵심은 총수가 아닌 위원회를 통한 의사결정, 지주회사 중심이 아닌 계열사별 자율경영이다. 각 분과에서 주요 현안을 결정한다. SK 계열사 대표들이 구성원이고, 김창근 의장이 이끌고 있다.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이 법정구속된 올 4월 이후 김연배 한화투자증권 부회장(위원장), 홍기준 한화케미칼 부회장, 홍원기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사장 등 원로 최고경영인(CEO) 3인으로 구성된 비상경영위원회를 출범해 운영하고 있다. 한화의 주력사업인 금융ㆍ제조ㆍ서비스 등 3개 부문으로 이뤄져 있다. CJ그룹은 올 7월 이재현 회장의 구속으로 인한 경영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룹경영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룹경영위원회는 손경식 회장을 위원장으로 이미경 부회장, 이채욱 CJ대표, 김철하 CJ제일제당 사장 등 5명으로 구성돼 있다. 위원회는 그룹의 경영안정과 중장기발전전략, 신뢰성향상 방안을 중점적으로 논의한다.

     

    경영전문가들은 이런 집단지도체제를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지수 경제개혁연구소 변호사는 "사법부가 그룹의 비리책임이 총수에게 있다고 판단하는 쪽으로 달라졌고 국민도 더 이상 2인자를 내세워 꼬리를 잘라버리는 상황을 납득하지 않는다"며 "2인자를 한 사람이 아닌 다수의 합의체로 시스템화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라고 말했다. 총수책임시대가 열린 만큼 2인자의 역할도 변해야 한다는 얘기다.

    집단지도체제, 땜질용에 그쳐선 안돼

    집단지도체제가 재벌의 비틀어진 의사결정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발판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총수의 그른 의사결정에 브레이크를 거는 등 독단적인 리더십을 막는 새로운 장치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이런 집단지도체제가 총수가 복귀해도 가동될 수 있느냐다.

     

    익명을 원한 기업전문 한 변호사는"쥐꼬리만한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하는 총수의 권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집단지도체제가 정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벌 총수들이 먼저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는 일침이다. 이지수 변호사는 "지금은 숨고르기가 필요한 과도기 상태"라며 "빠른 변화에 적응하는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선 총수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약육강식이 판치는 경제정글에서 생존하려면 총수가 먼저 '권력'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은경 기자 kekisa@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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