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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기대할 수 없는 사회, 복수를 위해 다시 태어난다?



문화 일반

    '공정' 기대할 수 없는 사회, 복수를 위해 다시 태어난다?

    기억 그대로 가진 채 과거로? '회귀물' 인기
    '내 남편과 결혼해줘' '재벌집 막내아들' 등
    '이번 생은 망했다'는 정서가 주된 인기 요인
    미래의 '정보'가 과거에서는 '자원'으로 활용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너무 큰 '부조리' 반영
    공정하지 않은 현실, '사적 복수'에서 쾌감
    서로의 간절한 이야기 들어주는 '경청' 필요


    ■ 방송 : CBS 라디오 <오뜨밀 라이브> FM 98.1 (20:05~21:00)
    ■ 진행 : 채선아 아나운서
    ■ 대담 : 손희정 문화평론가, 김만권 정치철학자
     
    ◇ 채선아> 사회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을 문화평론가와 정치철학자의 시각으로 풀어보는 시간입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김만권 정치철학자, 두 분 나오셨어요. 안녕하세요.
     
    ◆ 손희정, 김만권> 안녕하세요.
     
    ◇ 채선아> 요즘 기억을 가지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사는 '회귀물'이 인기라고 해요.

    ◆ 김만권> 저는 인생을 리셋한다는 '회귀물'과 시간여행을 하는 이른바 '타임슬립'이 어떻게 다른지 제가 궁금했거든요.

    ◆ 손희정> 타임슬립물이나 회귀물이나 시간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대중서사인 건 공통점이 있죠.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간다는 건데요. 근본적인 차이는 목적이 다르다는 겁니다. 타임슬립은 과거에 내가 잘못한 거나 놓친 걸 바로잡기 위해서 과거로 돌아간다면, 회귀물이라는 건 내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는 회귀와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가는 빙의, 아예 다시 태어나는 환생, 이렇게 '회빙환'이라고 하거든요. '회빙환'의 핵심은 미래의 정보를 자원으로 삼는다는 거죠. 반면에 타임슬립에서는 그런 식의 자원을 활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계관과 철학 자체가 다르다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김만권> 제가 아주 좋아하는 타임슬립물 중에 '어바웃 타임'이라는 영화가 있거든요. 이 영화는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 자체가 인생을 리셋하는 행위이면서 타인의 삶에도 영향을 준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거든요. 그런데 그 작품에는 시간을 되돌려서 과거로 갈 수 있으면 복권 당첨자를 알 수 있다거나 그런 장면은 하나도 안 나와요.

    ◆ 손희정> 다른 사람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준다거나, 내가 놓친 사랑을 회복한다든가, 이런 거지 복권을 사는 건 아니잖아요.

    ◇ 채선아> <재벌집 막내 아들>만 해도 예정된 사회 현상을 고려해서 주식을 사고 그러잖아요.

    ◆ 손희정> 그 드라마에서 핵심은 부동산이랑 주식을 한다는 거죠. 그리고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라는 정보가 중요한데 그런 상상력을 보면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죠.

    ◇ 채선아> 최근에 이런 회귀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내남결'이라고 '내 남편과 결혼해줘'라는 드라마가 있었거든요. 간략하게 줄거리를 말씀드리면, 주인공이 암 환자예요. 그런데 집에서 자신의 남편과 자신의 가장 친한 절친이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고 심지어 그 자리에서 남편한테 죽임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다가 눈을 딱 떴는데 갑자기 10년 전으로 돌아가 있는 거예요. 죽임을 당하는 순간의 기억은 그대로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 거죠. 그때부터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그런 작품이거든요. 이 회귀물의 유행에 이런 얘기를 봤을 때 어떤 사회적 배경이 있다고 보시는지 궁금했어요.


    ◆ 손희정> 요즘에 회귀물이 많이 나오는데 문화 평론하는 입장에서는 서사는 욕망이라고 보거든요. 이런 식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 건 우리 시대의 대중적인 욕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고 사실 그랬을 때에는 가장 많이 작동하는 욕망은 '이생망'인 거죠. 이번 생은 망했다, 리셋을 좀 하고 싶다.

    ◆ 김만권> 저는 생각해 봤던 게, 예를 들어 <재벌집 막내아들>의 경우엔 재벌 총수 일가의 비서가 주인공인데 사회적으로 성공한 검사고, <어게인 마이 라이프>는 차기 대선주자의 비리를 조사하다가 죽은 검사잖아요. 이 정도 지위의 캐릭터들이 '이생망'이라고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다른 코드를 생각해보면 '삶의 부조리'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재벌집 막내아들>의 주인공은 비굴하게 그 가문을 위해서 봉사했는데 살해당하고, <어게인 마이 라이프>는 대통령 후보의 비리를 조사하다 살해당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삶의 전망은 뚜렷하지 않은 거죠.

    우리가 어렸을 때 배워왔던 이상과 완전히 현실이 다른 거잖아요. 부조리라는 말의 뜻은 아무리 올바르게 노력해도 잘못된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라는 뜻이거든요. 우리가 옳다고 믿는 세계와 현실에서 작동하는 세계 간의 간격이 너무 멀어지는 거예요. 이런 상태에 대해 니체 같은 사람들은 '야 이거 어쩔 수 없는 거야.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안 바뀌겠지만 이런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게 지식인이 할 일이야'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두에게 지식인의 역할을 요구할 순 없잖아요.

    대개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럴 때 할 수 있는 게 두 가지 정도예요. 이 벌어지는 간격에 절망하거나, 그러니까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아니면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아주 욕망하고 갈망하게 되는 건데 그런 것들의 반사적 표현이 사실 회귀물의 인기로 나타나는 거 아닐까. 아무리 올바르게 노력해도 극복되지 않는 게 너무 현실에 많아졌다는 거죠.


    ◆ 손희정> 실제로 지금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공정 담론이 되게 중요하잖아요. 공정한 세상에서 개인이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고 하는 걸 우리가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실현되지 않는다는 걸 대중들이 알고 있는 거죠. 공정이 구현되려면 한국 사회에 만들어져 있는 구조적인 부조리와 싸워야 되는데 현실에서 싸우기보다는 대중 문화를 통해서 해소하고 있는 게 한편으로는 회귀물이 우리에게 주는 도피성 즐거움, 쾌락 이런 거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내 남편과 결혼해줘> 같은 경우도 회귀해서 되찾는게 대단한 정의라기보다는 주인공이 당연히 누렸어야 한다고 상상되는, 공정하다면 이뤘어야 하는 것들을 되찾아오는 게 목표거든요. 이런 것들은 우리가 재미로 보는 거라고 넘기기보다는 깊이 있게 고민해 봐야 된다는 생각이 들죠.

    ◇ 채선아> 또 요즘은 가성비가 아니라 시성비다라고 해서 작품도 빨리 감기로 보는 시대라고 하잖아요. 회귀물의 유행이 이런 빨리 감기 트렌드와도 좀 연결이 되어 있을까 궁금했어요.

    ◆ 손희정> 그야말로 지금 현대사회에서 시간이 자원이라고 하잖아요. 시간이 있는 사람,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거죠. 이 회귀물과 함께 같이 봤었던 대중문화의 경향성 중에 하나가 뭐였냐면 뱀파이어물의 변화거든요. 옛날에 뱀파이어는 괴물이었단 말이에요. 물리면 나도 뱀파이어가 되니까 피해야 되는 존재였잖아요. 근데 <트와일라잇> 같은 작품들을 보면

    ◆ 김만권> 물리고 싶죠. (웃음)

    ◆ 손희정> (웃음) 뱀파이어가 되고 싶잖아요. 왜 그런가 하면 그 뱀파이어 주인공들이 평생, 영생을 살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개발을 하고, 또 하고, 더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다보니 현대사회에서 이른바 '자기개발 만렙', 말하자면 금수저들이 되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하는, 영생을 누리고 싶어 하는 그 사실은 시간이 자원이 되는 사회라서 그렇다는 것도 회귀물 유행에서 짚어낼 수 있는 점 같아요.

    ◆ 김만권> 모두가 바쁜 우리 시대에 할일 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부담인 거예요.  그러면 내가 무능한 것 같고,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 같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늘 분주해야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거죠. 내가 분주하지 않으면 능력이 없는 사람이고 제대로 된 삶을 못 사는 사람이니까. 그냥 영화 한 편 보면서 쉬어볼까 하다가도 분주한 시간 속에서 쉰다는 것 그 자체가 되게 부조리하면서도, 또 그 자체가 매우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에 낭비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 채선아> 그렇죠. 빨리 봐야죠.

    ◆ 김만권> 심지어 쉬면서도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쉬는 것도 일이 된 사람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좀 들어요.

    ◇ 채선아> 또 이런 회귀물을 보면 복수를 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 손희정> 그런 부분에서 회귀물과 함께 같이 보고 싶었던 또 다른 대중문화 장르는 자경단 서사입니다. 국가나 공권력이나 경찰 검사 같은 사람들이 정의롭지 않다는 감각이 있는 거죠. 2000년대 초만 해도 내가 불의나 부조리를 알고 있다면 언론에 터뜨린다든가, 법정으로 가면 해결될 거라는 식의 드라마 되게 많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법정에 가거나 언론에 얘기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다음부터 뭐가 생기기 시작하면 <모범 택시>같은 사적 복수와 자경단 이야기들이 나오는 거죠. 현실이 공정하지 않고 법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내가 과거로 가서 복수하겠다.

    ◆ 김만권> 아무리 올바른 행동을 해도 바뀌지 않는 상황이라면, 가장 보편적인 감정은 억울함이거든요. 억울함이 해소가 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 병들게 돼요. 그거밖에 집중이 안 되고 무슨 말을 해도 다른게 떠오르지 않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 회귀물의 공통적인 특징은 해피엔딩이 되거든요. 억울함을 해소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행복한 결말이 필요하죠.

    ◆ 손희정>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타임루프물이 엄청 많이 나왔었어요. '시그널'이라든지, '하루' 같은 작품들은 내가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그 순간으로 계속 돌아가서 어떻게든 그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그 역사를 다시 쓰면서 부조리와 싸우려고 하는 이야기들이 되게 많았는데요. 이런 것들을 문화 비평에서는 포스트 세월호 텍스트라고 분석했어요.

    우리가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던 그 시간으로 계속 돌아가면서 우리의 집단적 의식, 무의식이 이 역사를 다시 쓰고 싶어 했었던 거죠. 그런데 그 욕망이 대중문화의 장에서만 해소될 뿐, 정치의 장이나 사회적 장에서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을 때 결국 '이생망'으로 돌아온다는 건 내 개인적인 욕망처럼 보일 수 있잖아요. 결국은 사회의 실패가 개인으로 내면화돼서 이제는 회귀물로 가는 게 아닌가, 코인과 주식밖에 안 남은 상태가 돼버린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 김만권> 회귀물의 또 다른 한 측면이 어떤 '삶에 대한 간절함'이잖아요. 나한테 저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우리는 그런 기회를 개인적으려 쓰려고 하지 사회적 참사나 그 비슷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쓰려고 할까? 이런 생각이 좀 들었거든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돌아보면 간절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거죠.

    내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불가능하잖아요. 하지만 현실에서 내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 가능해지는 순간은 간절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 같아요. 서로가 서로의 간절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는 건,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듣는다는 거잖아요. 결국은 그렇게 간절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내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지 자꾸 내 시간을 되돌렸으면, 이럴 수 있으면 땠을까를 상상하는 게 정말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 손희정> 이 회귀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신동엽 씨가 떠오르더라고요. 신동엽 씨가 어느 인터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어디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을 받아요. 그때 답변이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때 했었던 그 실수들이 쌓여서 지금의 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어느 지점에 멈추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한국 사회가 만들어온 여러 가지 실수들 끝에 지금 여기에 와 있다면 그걸 바로잡으려고 우리가 얼마나 노력했는가. 특히 정치의 장에서는 무엇을 해왔는가를 다시 질문하면서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는 배짱 같은 것들을 좀 많이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김만권> 한 사회가 어떤 서사를 만들 때 그런 서사들이 하는 역할들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서사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해결책에 관한 욕망이나 이런 것들을 열어주어야 하는데 철학자 한병철 선생님이 쓰시는 표현이 '서사의 위기'라고 하거든요.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그 스트레스 같은 것들 풀어주는 방식으로 서사가 작동하고 그 이상의 서사가 역할을 못하는 것, 서사가 사람들에게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뭔가를 같이 해보자라는 것 대신에 저기 대신 누군가를 복수해준대, 그러니까 내가 이거 뭔가 풀렸어라는 그런 것들은 서사의 역할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채선아> 네. 여기까지, 손희정 문화평론가, 김만권, 정치철학자와 함께 했습니다. 두 분 수고하셨습니다.
       
    ◆ 손희정, 김만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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