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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전용호텔, 맨해튼 '인형의 집'이라 불린 그곳…'호텔 바비즌'



문화 일반

    女전용호텔, 맨해튼 '인형의 집'이라 불린 그곳…'호텔 바비즌'

    • 2023-09-18 14:52

    미국 여성전용호텔 '바비즌'의 명멸 그린 인문서

    바비즌 호텔 입구. 연합뉴스바비즌 호텔 입구. 연합뉴스
    훗날 모나코의 왕비가 된 배우 그레이스 켈리(1929~1982)는 종종 뉴욕 맨해튼에 사는 삼촌 집에 가 브로드웨이 공연을 보곤 했다. 공연을 보며 배우의 꿈을 키웠지만 필라델피아 상류층 특유의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탓에 배우가 되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켈리가 대학에 가길 원했다.

    그러나 입시에 실패하자, 켈리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끈질기게 뉴욕에 보내달라며 아버지를 설득했고, 마침내 아버지의 허락을 얻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반드시 여성 전용 호텔에 묵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켈리가 뉴욕으로 향할 때, 바비즌은 이미 뉴욕을 대표하는 여성 전용 호텔로 명성을 드날리고 있었다. 1928년 2월 개장한 바비즌은 운동 시설 등 여러 시설과 북클럽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꿈의 호텔'이었다.

    바비즌에는 아무나 입성할 수 없었다. 투숙객은 신원을 보증하는 추천서가 필요했다. 남성들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다. 바비즌은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하는 젊은 여성들과 보수적인 부모의 우려를 절충할 수 있는 해답지였다. 바비즌이 큰 인기를 누린 이유였다.

    호텔에는 늘 배우, 모델, 가수, 예술가, 작가 지망생이 가득했고, 일부는 유명인이었다. 뉴욕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꿈꾸는 여성들에게 '호텔 바비즌'은 이미 선망의 대상이 된 지 오래였다.

    미국의 언론·여성학자 폴리나 브렌이 쓴 '호텔 바비즌'(니케북스)은 20세기 미국 여성의 독립과 야망의 산실 역할을 했던 바비즌 호텔의 역사를 조명한 책이다. 사회학 연구와 역사 기록, 다중 시점의 단편 소설, 가십 칼럼이 뒤섞인 이 책은 20세기 미국의 여성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여성 전용 호텔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건 1920년대부터였다. 스윙과 재즈의 시대였던 20년대, 여성들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1920년 참정권을 획득했고, 대학에 진학하는 수가 급증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코르셋을 벗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남자들과 시시덕거리는 '플래퍼'(Flapper)라 불린 신여성이 등장했다.

    독립적으로 살고, 소비에 탐닉하는 플래퍼들의 삶을 충족해줄 만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압도적인 명성을 얻은 곳이 바비즌 호텔이었다.

    바비즌은 구상 단계부터 예술적 성향이 강했다. 바비즌이란 이름도 19세기 프랑스 예술운동 바르비종파(화가 코로·밀레 등이 속한 유파)에서 딴 것이다. 1928년 2월 문을 연 이 호텔은 예술가, 배우, 음악가, 패션모델을 꿈꾸는 젊은 여성을 위한 공간이라는 틈새시장을 개척해 신체를 단련하는 체육관, 스쿼시 코트, 수영장, 음악·미술 스튜디오, 도서실 등의 시설과 매달 열리는 연극, 콘서트, 강연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해 설립 초기부터 여성들의 시선을 잡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바비즌은 뉴욕의 '인형의 집'이란 명성을 얻었다. 그곳에 가면 멋진 여성들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났다. 남성들은 호텔 로비까지밖에 들어올 수 없었지만,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J.D 샐린저조차 바비즌 커피숍을 기웃거리며 여자들을 만나려 했다. 수많은 미인대회 출신 여성, 작가, 배우 지망생들이 그곳에서 생활했다.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였던 실비아 플라스도 바비즌에 묶었다.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자전적 소설 '벨자'를 가명으로 발표했는데 소설에 등장하는 '아마존' 여성 전용 호텔은 '바비즌'을 상기시켰다.

    플라스, 그레이스 켈리, 배우 앨리 맥그로, 무용수 바버라 체이스 등 수많은 유명인이 바비즌에 머물렀다. 개장부터 전성기였던 1960년대까지 이 호텔을 거쳐 간 여성만 35만명에 달했다. 그중에 꿈을 이룬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못했다. 몇몇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몇몇은 호텔에서 나이만 먹어갔다.

    호텔도 세월이 흐르면서 퇴락의 길을 걸었다. 1970년대 페미니즘 등장 속에 '여성을 남성과 분리해야 한다'는 관념은 시대에 뒤처진 논리로 취급받았다. 1981년 호텔은 여성 전용을 포기하며 사실상 정체성을 상실했다. 2005년 이후에는 부호들이 사는 고급스러운 콘도미니엄으로 변모했다.

    저자는 "바비즌 호텔은 스스로 새로운 삶을 만드는 곳이었고, 그런 곳은 그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비즌이 한때 여성이 안전하게 야망을 발산했던 꿈의 장소였다고 덧붙인다.

    "바비즌은 20세기 대부분 기간 여자들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곳, 자기만의 방을 갖고 자기 삶을 계획하고 설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 호텔은 여자들을 자유롭게 했다. 여자들이 다른 곳에서는 불가능하게 여겨졌을지라도 꿈의 도시에서는 상상하고 실현하고 실행할 수 있었던 야망을 발산하고 욕구를 추구하게 했던 것이다."
    홍한별 옮김. 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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