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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처럼 직진하며 뜨겁게 살았던 남자…'안중근의 말'



책/학술

    총알처럼 직진하며 뜨겁게 살았던 남자…'안중근의 말'

    [북리뷰]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쓴 나의 삶과 나의 나라 이야기
    불의를 보면 돌진했던 사나이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감동
    "죽으면서 나는 기쁘다. 나는 조국 해방의 첫번째가 선구자가 될 것이다"

     

    10월 26일 가을 아침 7시. 역전은 분주하다. 러시아 고관과 군인들이 귀빈을 영접하기 위해 바삐 움직인다.

    그는 역 근처의 한 찻집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신다. 특별열차는 9시 무렵에 도착한다.

    두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가족들에 대한 생각과 의병활동을 하면서 겪었던 고초,조국을 잃은 비통함과 일본에 대한 분개,거사의 성패에 대한 초조함,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하지만 특별열차가 도착한 뒤 그의 생각은 오로지 하나로 모아진다.

    "어느 시간에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할 즈음 일행이 기차에서 내려오자 의장대가 경례하고 군악 소리가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용솟음치고 삼천길 업화가 머릿속에 치솟아 올랐다.(중략)울분을 참으며 용기있게 뚜벅뚜벅 걸어 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편에 이르렀다.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사람들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한 조그마한 늙은이가 있었다.저자가 이토일 것이다. 생각하고 바로 단총을 뽑아 4발을 쏘았다.(중략)만일 관련 없는 사람을 쏘았다면 일을 어쩌나 주춤하는 사이 러시아 헌병이 나를 체포하니 1909년 10월 26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대한 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헌병대로 붙잡혀 갔다" 200페이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다' 중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쓴 나의 삶과 나의 나라라는 부제가 달린 '안중근의 말'(이다북스 펴냄)은 안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쓴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풀어 엮어낸 책이다.

    안 의사가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를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썼기 때문에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알기 쉽게 한글로 옮겨 발간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대표적인 항일 운동가 안중근 의사는 너무도 유명하다.

    하지만 무지해서였는지 책이 있는 줄 몰랐던지 학창시절 김구의 백범일지는 보았지만 안 의사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는 본 적이 없어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웠다.

    책 제목인 '안중근의 말'의 바탕이 된 '안응칠 역사'는 총알처럼 뜨겁게 살았던 또 총알처럼 직진으로 날았던 안 의사의 솔직 담백한 31년 생애 기록이다.

    해주는 물론 도내 자선가로 알려졌던 할아버지 이야기 등 집안내력부터 자신의 이름인 '중근'과 자인 '응칠'을 갖게 된 연유, 결혼과 항일 의병,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게 되는 과정, 재판과 옥중생활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거사를 하고 감옥에 수감되었던 1909년 12월 13일부터 집필하기 시작해 순국하기 열흘 전인 1910년 3월 15일에 탈고했다고 하는데 풍전등화 같은 시대 상황과 우리 민족에 겪은 고뇌와 그의 남다른 민족애와 평화정신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웃을 사랑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정과 삶의 열정,국제정세에 대한 이해와 일본을 꾸짖는 논리와 기개는 탄복을 자아내게 한다.

    그는 술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 또 공부보다는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데 때로는 기생에게 바르게 살 것을 권고했다가 되레 기생이 되바라지게 반응하면 욕을 하고 손찌검을 하는 순수(?)청년이기도 했다.

    의병활동을 할 때 며칠을 굶으며 산속에서 헤메던 이야기는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그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너무 애통해하다가 몇달을 앓았고 나라가 망해갈 때는 아버지와 시대를 통탄하며 계책을 구하는 효자였다.

    또 교인을 낮춰보는 프랑스 신부에 정면으로 대들면서도 전도에 열심인 독실한 신앙인이었고 서양인의 역사의 지혜와 충고를 수용할 줄 아는 청년이었다.

    여순감옥에서의 안중근 의사 (사진=안중근의사숭모회 홈페이지 캡쳐)

     

    검찰 조사와 법정에서 보인 그의 기개는 일본인들조차 탄복하게 만든다.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붙잡힌 뒤 첫 검찰 신문에서 한 진술과 재판정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의 이성과 심장은 너희들에 의해 병들었다. 죽으면서 나는 기쁘다.나는 조국 해방의 첫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1909년 11월 러시아의 한 일간신문 보도 내용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직무로 하얼빈에서 전쟁을 수행하다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뤼순 지방재판소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니 만국 형법과 국제 공법으로 판결하는 것이 옳다"

    안 의사는 1심 사형선고를 되돌릴 수 없을 직감하고 일제 고등법원장에게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고 항소를 포기한다.

    그는 사형집행을 몇달이라도 늦출 수 있다는 법원장에게 감사해한다.

    동양평화론은 침탈하는 서구에 맞서기 위해서는 동양의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하는데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조약을 맺고 이웃 국가들을침탈하는 것은 패악무도한 것이어서 일본이 정책을 바꿔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서문과 1장만 쓰여진 채 미완성으로 남는다.

    책을 집필할 시간을 주겠다던 말은 거짓이었고 속전속결로 사형이 집행됐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 전 안 의사가 두 동생에 남긴 유언은 이렇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자 나라를 위해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해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모아 공을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들여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독립은 되었지만 안 의사의 유해는 아직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비밀리에 묻어 유해가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북 모두 그의 유해를 찾는데 실패했는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나라 걱정을 많이 하는 스타일인가 아닌가? 또는 삶이 너무 바쁘거나 무료한가는 전혀 상관 없다.

    안중근. 태어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일곱개의 점이 있어 '응칠'이라고 불렸던 해주 출신 사내의 이야가 감동과 새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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