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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왜 6·25 때 이승만 제거 작전을 준비했나



문화 일반

    미국은 왜 6·25 때 이승만 제거 작전을 준비했나

    KBS1 '역사저널 그날'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6·25 휴전협상 당시 고지전·진지전 참극 조명

    사진=KBS 제공

     

    "모든 전선은 고지전으로 돌입한다."

    1951년 7월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시작된다. 하지만 전선에서는 참혹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유엔군과 북한군이 '계속 전투 원칙'에 합의한 탓이었다.

    전선이 고착화되자 38선 부근에서는 치열한 진지전과 고지전이 벌어진다. 백마고지 전투는 열흘간 고지 주인이 7번이나 뒤바뀔 만큼 처참했다. 밤낮없이 포화가 쏟아졌고 하루 사상자만 1천여 명에 달했다.

    오는 2일(화) 밤 10시 방송되는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4부 '휴전협정 - 고지를 사수하라' 편을 통해 회담장에서 설전이 오가는 동안 참극이 벌어졌던 전장을 비춘다.

    첫 휴전회담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2시간 11분간 침묵 속에서 신경전이 오갔고, 교묘한 심리전 역시 빈번했다. 북한군은 회담장에 있는 유엔군 측 의자 높이를 줄여놓거나, 인공기를 유엔기보다 크게 제작하기도 했다. 유엔군도 이에 대항해 회담장 주변에 오인사격을 퍼붓는 등 날선 대립은 그칠 줄 몰랐다.

    그렇게 2년 동안 열린 회담만 575회에 달했다. 압도적인 승리가 어려웠던 양측은 휴전협상에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맞선다.

    포로 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휴전협상은 난항에 빠진다. 북한 측이 억류한 유엔군 포로는 1만여 명인 데 반해 유엔군 측의 공산군 포로는 무려 13만여 명이었기 때문이다. 10배 이상 차이 나는 포로 수는 협상을 또 한 번 대치 상태로 몰아갔다.

    제작진은 "1952년 5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의문의 납치 사건이 발생한다"며 "전쟁 막바지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납치 사건을 살펴보고, 사건의 배후가 노린 것은 무엇인지 알아본다"고 전했다.

    미국과 소련에 새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휴전협상은 급물살을 탄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휴전을 반대하면서 단독 북진을 주장한다. 이승만은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반공 포로 석방도 불사한다. 분노한 미국은 이승만 제거 작전, 이른바 '플랜 에버레디'를 준비한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마침내 정전협정이 조인된다. 하지만 전쟁 당사국인 대한민국은 철저히 배제된 채 진행됐다. 그렇게 대통령 이승만은 휴전협정문에 서명하지 못했다.

    이렇듯 여전히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 이야기가 이번주 '역사저널 그날'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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