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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스크린, 그 속에 낭만이 있었잖아



전북

    비 내리는 스크린, 그 속에 낭만이 있었잖아

    전주국제영화제 20주년 기획 <안녕, 극장>③
    공룡극장이 판치던 극장가에 떨어진 운석, TV
    변기 개수까지 규제하던 70년대 공연법
    야한 영화를 볼 자유?! '동네 소극장에서…헉'

    전주국제영화제가 성년이 됐습니다. 지난 1999년 디지털 영화와 독립영화를 위해 우렁찬 울음을 터뜨린 게 벌써 20년 전입니다. 이제 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와 표현의 해방구'를 자처하며 영화 발전의 한 축을 맡고 있습니다. 전북CBS는 오는 5월 2일 영화제의 스무 번째 생일을 맞아 전주 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전주의 영화인 故 탁광 선생의 삶의 궤적을 다시 그려봤습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비빔밥도, 한옥마을도 아니다…전주는 '영화'다
    ② 전주 최고의 극장을 꿈꾸다…코리아 vs 삼남
    ③ 비 내리는 스크린, 그 속에 낭만이 있었잖아
    (계속)


    전주시 태평동에 있던 태평극장. 연도미상. (사진=네티즌 'artbet'님 제공)

     

    Scene #3 TV 도입과 공룡극장 멸종, 그리고 다시 찾아온 봄

    코리아극장과 삼남극장, 씨네마오스카극장(백도극장) 등 공룡들이 주름잡던 6·70년대, 전주 극장가에 운석이 떨어졌다. 바로 TV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70년 당시 전북 전역의 TV를 다 합쳐도 3800여 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10년 뒤 전주시의 가구당 TV보급률은 88.9%로 치솟았다. 극장가에 빙하기나 다름없는, 안방극장 전성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각종 규제도 기존 극장들의 숨통을 조였다. 70년대 초중반 잇따른 공연법 시행령 개정으로 통로 크기, 비상구 설치 등 안전에 관련된 요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의자의 안락함'이나 화장실 소변기·대변기 개수까지 국가가 일일이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극장 운영자들은 골치를 앓아야 했다. 그 결과 70년대 전주에 새로 문을 연 극장이 단 한 곳도 없을 정도로 극장가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1981년 12월 극장가에 다시 한번 봄이 찾아왔다. 객석이 300석 이하거나 객석 바닥면적이 300㎡이하인 공연장은 허가 없이 개관하게끔 공연법이 개정됐다. 덕분에 80년대 들어 전주에 소극장 12개가 들어섰다.

    요즘 극장들이야 스크린이 집채만큼 크고 편하다 못해 아예 누워서 영화를 볼 정도로 영화 관람 환경이 뛰어나지만 그 시기 극장들의 상황은 확연히 달랐다. 퀴퀴하고, 음향도 그저 그랬다. 무엇보다 화질이 아쉬웠다. 개봉 후 보름만 지나면 필름이 영사기에 닳고 닳아 스크린 양 끝에 비가 내리는 듯한 착각 속에 영화를 감상해야했다.

    영화광 이병수(56)씨는 심지어 스크린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장면도 목격했다. "필름 시절이었잖아요.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드르륵 나면서 영화가 상영되는데 갑자기 스크린에서 불이 난 거예요. 극장에 있던 사람들 다 소리 지르고 난리 나고 그랬죠. 나중에 알고 보니 영사기가 열을 받아서 필름이 눌어붙다 불이 났는데, 그걸 화면으로 쏴주니까 스크린에 불이 난 것처럼 보였던 거죠. 깜짝 놀랐어요."

    그래도 돌아보면 낭만이라고 이지선(45)씨는 말했다. "영화 보던 중에 갑자기 소리가 안 나요. 그러면 뒤에다 대고 '왜 소리 안 나요!'하면서 다들 따져요. 그러면 뒤쪽에서 뭘 만지작만지작하는 소리가 나더니 다시 소리가 나고. 그게 동네 작은 극장들 나름의 매력이었죠."

    그때 소극장들은 대다수가 이른바 재개봉관으로, 극장마다 자기만의 색깔을 자랑하며 관객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인문공간 '파사주' 성기석(47) 대표는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극장을 묻자 곧바로 '태평극장'을 언급했다.

    "우리 세대에게 태평극장은 중요한 역할을 했죠. 어떤 역할이냐고요? 야한 영화를 볼 수 있는. 하하.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해요. 동물원으로 소풍을 갔다가 단체로 태평극장에 갔어요. 미키 루크와 킴 베이싱어 주연의 '나인 하프 위크(격정적인 애정신을 담은 할리우드 영화)'도 봤죠."

    성 대표처럼 안방극장을 박차고 나온 지금의 40·50세대들은 영화와 함께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당시 추억을 떠올리던 강지희(43)씨는 "돈이 궁한 때라 명절 세뱃돈을 받아 남자친구와 같이 영화를 봤어요. 그땐 팝콘도 없었어요. 대신 오징어 다리를 씹었지. 물론 그분이 지금 신랑은 아니에요"하며 깔깔 웃었다.

    소극장과 청춘들의 호시절은 IMF 외환위기로 경제난이 불어 닥친 9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다. 독립영화감독 최진영(39)씨는 1998년 개봉한 '타이타닉'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 극장을 찾았다.

    "'그 영화를 보면 금 모으기 운동을 한 게 모두 헛것이 된다'는 소문이 나돌았어요. 다들 그 영화를 보네 안 보네 하면서 눈치싸움을 하던 게 기억나요. 참다 참다 몰래 들어갔는데, 정말 사람 많더라고요."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전주에 최초의 멀티플렉스 '프리머스' 영화관이 상륙했다. 극장판의 판도가 또 한번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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