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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생가 복원, 남북 화합의 가교 삼아야"



강원

    "안중근 생가 복원, 남북 화합의 가교 삼아야"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 "안중근 의사, 남북 모두 이념 넘어 높은 평가"
    "반일 독립운동에서 통일 상징으로"

    중국 뤼순감옥 박물관내 안중근 의사 추모실 사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된 안중근 의사를 향한 관심과 재조명도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안 의사가 7살때부터 살기 시작한 북한 청계동 생가를 남북이 함께 복원해 민족 화합과 한반도 평화 정착의 장으로 탈바꿈시키자는 제안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과 한국기자협회는 지난 8일부터 11일까지 중국 하얼빈과 다롄, 뤼순에서 언론사 논설위원, 역사·문화 전문기자 등을 대상으로 안중근 의사를 중심으로 한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연수를 진행했다.

    특강에 나선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은 안중근 의사를 반일 독립 운동의 상징을 넘어 남북 화합과 통일의 가교로 되살리자며 생가 복원을 출발선으로 제시했다.

    안 의사의 생가는 북한 신천군 청계동으로, 살던 집과 신앙 생활을 시작한 청계동 성당은 현재 터만 있지만 부친 안태훈 묘와 그가 새긴 것으로 전해지는 마을 입구 바위 위 '청계동천(淸溪洞天:경치가 수려한 고장)' 글씨는 선명하게 남아있다고 알려진다.

    정 소장은 "지난해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기념사업회와 북한 종교인협회 대표가 만나 올해 안 의사 의거 109주년에 맞춰 청계동 생가 복원을 논의했다. 선친묘도 새로 단장하고 안 의사를 포함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가족들의 가묘도 조성하자는 의견도 오갔다"고 전했다.

    최근 확장해 새로 문을 연 중국 하얼빈 역사내 안중근 의사 기념관.

     

    복원을 위한 충분한 기초자료 확보는 물론 활성화 방안도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안 의사 의거 직후 천주교 신부들이 가족들을 모아 놓고 생가 앞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마을 전체가 어떻게 돼 있는지 알 수 있는 인문학적 청계동 지도도 이미 있다. 생가와 마을, 성당을 복원하고 기념관을 세우면 개성에서 도로 사정만 좋아지면 1시간이면 갈 수 있다"는 조건들도 강조했다.

    "경기도가 현재 한강 하구 일대에 남북이 서로 마주 보는 구역을 공동개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북한 쪽에 개발단지가 조성되면 배후 관광지로 안 의사 생가가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덧붙였다.

    생가 복원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급변하는 남북 관계를 풀어낼 안 의사의 또 다른 유산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더해진다.

    "안 의사는 이념을 초월해 남과 북 모두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표상이며 존경하는 대상이다. 동생들부터 시작해 후손들이 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데 안 의사 가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알의 씨앗이 아닌 굉장히 많은 씨앗을 중국 동북 3성과 상해, 국내에 뿌려 결실을 맺게 했다"고 평가했다.

    중국 뤼순감옥 박물관내 안중근 의사 순국 현장.

     

    안 의사 일가의 삶은 우리 근현대사의 자화상이다.

    조선과 만주, 중국, 홍콩, 러시아 등지에서 다양한 이념과 노선에 기초해 3대에 걸쳐 항일독립운동과 해방 후 민주화,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광복후 혼란과 분단, 전쟁을 겪으며 안 의사 일가 역시 남북과 미국 등지로 흩어져야만 했다.

    복원된 생가는 안 의사와 그 일가에 대한 작은 보답이자 정치, 이념으로 나뉘며 새겨진 우리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이기도 할 것이란 얘기다.

    의거가 행해진 중국 하얼빈에서 순국의 아픔이 여전한 뤼순 곳곳의 키워드는 '안중근'이다.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남긴 미완의 '동양평화론'을 연구해 온 최봉룡 중국 대련대 교수(동북사연구중심)는 "그 시대에 동양평화론을 통해 공동은행, 공동 지폐 발행 등을 제시했다는 것은 탁월한 선견지명"이라며 "중국 사람들은 한국 대통령은 누군지 몰라도 안중근 의사는 안다"고 역설했다.

    1910년 2월 17일 히라이시 뤼순 고등법원장과 안 의사의 면담내용을 기록한 '청취서'에 담긴 동양평화론은 일본 주도하에 공조, 로마 교황에게 협력을 맹세하고 징표를 받아 국제 사회의 신용을 얻자는 주장은 시대 상황과 인식을 놓고 공방이 있는 대목이지만 나머지 3개 실천방안은 시대를 앞선 탁월한 식견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청, 일 3국이 공동 관리하는 군항을 뤼순에 만들고 각국이 이곳에 대표를 파견해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고 원활한 금융을 위해 3국 공동 은행 설립과 공용화폐를 발행하자는 제안이다. 3국 공동 군대를 편성하고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어학을 가르치면 서로 우방으로 생각하게 돼 형제의 관념도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안중근 의사가 수감됐던 중국 뤼순감옥 실제 장소. 수감 건물 앞 잔디밭에 민들레가 꽃을 피웠다.

     

    중국은 안 의사 의거 현장인 하얼빈 역사 안에 기존 시설보다 두배 가량 넓은 기념관을 최근 새로 단장해 문을 열기도 했다. 수많은 항일 중국인들이 희생된 뤼순 감옥에도 안 의사 수감 장소와 순국 현장을 정성 기울여 보존, 복원해 중심에 두고 있다.

    중국 청소년들의 대표 교육장소인 뤼순 일본관동법원 주인공 역시 안중근 의사다. 내부 곳곳은 안 의사의 당당한 자취와 이에 박수를 보내는 중국 주요 인사들의 평가로 가득하다.

    중국 주은래 총리가 남긴 "청일전쟁 후 중국, 한국 양국 국민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은 금세기 초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은 안 의사를 향한 가감없는 중국의 역사 인식이다.

    정춘매 뤼순 일본관동법원 부 박물관장은 "안중근 의사의 백미는 동양평화 사상이다. 이는 현실(현재)을 살아가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젊은이들도 되새기고 실천해 나가야할 귀한 가르침"이라고 밝혔다.

    안중근 의사 생가 복원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는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연구해 온 최봉룡 중국 대련대 교수.

     

    중국동포 정춘매 뤼순 일본관동법원 부박물관장.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역에 내린 일본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체포돼 1910년 3월 26일 고향에 아내와 어린 삼남매를 두고 31세 나이에 순국한 안중근 의사.

    순국을 앞둔 2월 14일 안 의사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전한 마지막 유언이 뤼순 감옥 박물관 한 벽면을 무겁게 채우고 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중국 현지에서 수 차례 이뤄진 유해발굴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최봉룡 교수는 "남북 유해발굴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이뤄지다 중단되기를 반복하고 있다. 안 의사 유해 발굴은 정치를 뛰어 넘어야 한다. 관련 자료를 확보하고 있을 일본의 역사 인식 변화와 중국의 적극적 협조가 기반이 돼야만 결실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해 발굴과 고국으로의 안장이 긴 인고의 시간이 필요한 '동양 평화'가 전제조건이라면 생가 복원은 이에 앞서 남북이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할' 안 의사가 남긴 또 하나의 씨앗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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