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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원하면 저고리 앞섶을 베어 주고 받다



책/학술

    이혼 원하면 저고리 앞섶을 베어 주고 받다

    '조선시대 살아보기: 우리가 미처 몰랐던 조선생활사'

     

    '조선시대 살아보기: 우리가 미처 몰랐던 조선생활사'는 실생활에서 조선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건국 당시만 해도 조선은 여자의 경우에도 이혼과 재혼을 금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는 일반민이 이혼을 원할 경우에는 보통 두 가지 방법을 쓰곤 했는데 ‘사정파의’와 ‘할급휴서’가 그것이다. ‘사정파의’란 특별한 이유가 있어 더 이상 부부로 살 수 없다고 생각되면 두 부부가 마주 앉아 부부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하고 결별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정말 쿨하기 그지없었다.

    ‘할급휴서’는 칼로 저고리 앞섶을 베어서 그 조각을 상대에게 이혼의 표시로 주고 상대방이 그것을 받으면 이혼을 수락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할급휴서’의 경우 잘라낸 옷자락이 날개를 편 나비 모양과 같다고 하여 “나비를 주고받았다”라는 말로 이혼에 동의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혼에 동의하는 표식이라면 이것 또한 일종의 이혼합의서와 같은 것인데 하늘하늘 자유롭고 아름답게 날아다니는 나비를 떠올리는 조상들의 운치 있는 행동과 정서는 삶의 아픈 순간에도 멋들어지게 나름의 방식으로 상처를 보듬어주었던 것이다. 일반민들은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자유롭게 이혼을 선택한 후에도 경제적 이유로 집을 나누어 거주지를 분리하지 못하고 같은 집, 심지어 같은 방에서 구역을 정해 동거를 계속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성년의 날에는 ‘관례’라는 이름의 성인식이 치러졌다. 관례는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정신과 육체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15~20세 전후에 행해지는데, 왕실과 양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혼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결혼하지 않은 자라도 관례를 마치면 성인 대우를 해주었다.

    가진 것이 없으니 화려한 의식을 치르고 연회를 베풀지는 못했지만 일반민들은 ‘들돌들기’라는 의식으로 아이가 성인이 되었음을 주변에 알리곤 했다. ‘들돌들기’는 마을 어귀 성황당 나무 아래에 크고 둥근 바위를 두고 그 돌을 들면 어른, 들지 못하면 아이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노동집약적 산업인 농업이 국가경제의 기반을 이루는 조선에서 제대로 된 성인 남자 한 명의 노동력으로 인정받느냐 아니냐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가정을 꾸려 가장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지의 여부와 직결되는 것이어서 육체적인 힘을 인정받는 것이 곧 성인으로서의 인정을 받는 일이었다. 실제로‘들돌들기’를 해낸 자와 아닌 자는 품삯을 지급할 때에도 차등을 두었다.

    일반민 여자의 경우는 ‘손더듬’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15세 전후의 딸을 동네 여인들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길쌈 두레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하고자 날을 잡아 음식을 준비해서 동네 어른들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아직 어려서 손으로 하는 섬세한 길쌈에 서툰 딸이 이제 본격적으로 성인 여자처럼 일을 할 테니 잘 가르치고 이끌어 달라는 의미를 담은 행사였다. 남자의 ‘들돌들기’처럼 여자도 ‘손더듬’을 하고 나면 성인 여성 노동력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다.

    책 속으로

    결국 시간이 흘러 감에 따라 기녀들은 국가행사뿐 아니라 위로는 왕과 세자, 정부관리에서부터 아래로는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군에 속한 남성들을 모두 친밀하게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사회적으로 묵인받은 조선 내의 전무후무한 여성 집단이 된 것이다. 당연하게도 해당 남성 집단만큼이나 다양해진 그들의 아내 집단에게 입고 꾸미는 외모 표현방식까지 포함해서 포괄적으로 질투 어린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황진이, 매창과 같이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는 데 능한 명기들이 등장했고, 전란의 와중에 논개, 계월향, 홍랑과 같이 절개와 지혜를 겸비한 기녀들이 부각되면서, 《춘향전》, 《배비장전》, 《숙향전》, 《옥단춘전》처럼 기녀가 등장하는 소설까지 유행하게 되었다. 이 모든 변화와 흥미로운 기녀들의 이야기는 조선 내의 상업과 유통업이 차츰 발달속도를 빨리함에 따라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조선 내에 퍼져 나가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80-81쪽, ‘5. 삼작저고리, 스란치마, 너울… 규수와 기녀의 옷’ 중에서

    임진왜란 전까지 오늘날 이태원이 있던 곳의 이름은 이태원이 아니라 황학골이었고 이곳에는 비구니들만 거주하는 운종사라는 절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쳐들어 온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부하들을 이끌고 운종사에 들이닥쳐 잔인하게 비구니들을 겁탈했고 떠나면서 절마저 불태웠다. 온갖 고초를 겪은 비구니들은 오갈 곳도 없이 버려져 융경산 아래에 남루한 토막을 짓고 살면서 왜구에게 겁탈당해서 생긴 아이를 낳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왜구의 피가 섞여 태어난 아이들이 사는 이 동네를 ‘태생(胎)이 다른(異)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오늘날 이태원이라는 지명으로 정착되었다는 이야기다.
    -127쪽, ‘8. 궁궐을 등진 방배동과 태생이 다른 마을 이태원’ 중에서

    사간원은 국왕의 옳지 못한 일처리나 정책상의 오류를 비판하고 왕의 바르지 못한 말과 행동을 지적하는 간쟁을 위주로 활동하는 기관이었으므로 모든 것을 자유롭게 비판하고 눈치 보지 않고 지적하는 것이 보장되었다. 때문에 다른 사람의 권위에 눌려 바른 말을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사간원 관원은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관리를 보아도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 묵인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사간원이 업무시간 중에 술을 마시는 것이 허용되는 유일한 관청이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임금의 금주령이 내려진 때에도 사간원 관리는 업무 중에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이것은 하늘같은 임금을 향해 싫은 소리와 험한 지적을 해야 하는 사간원 관리들을 위한 재치 넘치는 배려였다. 임금에게 쓴 소리를 할 용기가 나지 않거든 술기운을 빌어서라도 할 말은 꼭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상징적인 특권을 주었던 것이다.
    -140쪽, ‘11. 권력의 균형을 위한 언론삼사와 억울한 백성을 위한 격쟁과 상언’ 중에서

    요즘도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께서는 생리라는 말 대신 ‘달거리’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곤 한다. ‘달거리’는 순우리말로, 한자 표현인 ‘월경’과 같은 의미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세상을 움직이고자 했던 조선에서는 생리를 의미하는 용어를 그대로 쓰는 것을 남부끄럽다고 여겨 ‘이슬’이라는 단어로 우회적으로 빗대어 사용하기도 했고, 은어나 약어로 ‘몸엣것’, ‘몸’ 등의 용어를 사용하여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생리대를 ‘개짐’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여성들이 생리를 할 때 몸에 가지게 되는 헝겊으로 만든 생리대를 부르는 이름인 만큼 ‘몸가지다’라는 표현에서 나온 말로 보인다. 즉, ‘가지다’라는 단어가 세월의 풍파 속에 변화하여 오늘날 전해지는 모양새의 ‘개짐’이 되었다는 것이다.
    -210-211쪽, ‘14. 깊은 밤 남몰래 처리하던 비밀스러운 달거리’ 중에서

    반주원 지음 | 제3의 공간 | 336쪽 | 16,000원 {RELNEWS: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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