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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장준하, 만주군 박정희의 유신체제 흔들다



책/학술

    광복군 장준하, 만주군 박정희의 유신체제 흔들다

    [임기상의 역사산책 65]"국민들 누구나 대통령 될 수 있지만 박정희만은 안된다"

    ◈ 장준하, '사상계' 발행을 접고, 반독재투쟁에 뛰어들다

    동양의 노벨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들. 뒷줄 왼쪽이 장준하,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훗날 노벨 평화상을 받은 마더 테레사 수녀이다.

     


    1962년 8월, 경영난에 빠진 <사상계> 잡지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발행인 장준하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필리핀 막사이사이 재단에서 1962년도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학 부문 수상자로 장준하를 선정했다는 낭보였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수상이었다.

    "지식인들의 국가재건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불편부당한 잡지를 발간함에 있어 성실성을 나타냈고, 금전상의 이익이나 정치적 권력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새로운 세대를 계몽해 그들로 하여금 보다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길을 찾게 했다"가 수상 결정 이유였다.

    장준하는 적지 않은 상금까지 받자, 이 상금으로 독립문화상을 창설했다.

    제1회는 함석헌, 2회는 한국신문편집인협회가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상계> 발행인인 장준하가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후 귀국해 환영을 받고 있다. 오른쪽은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창간된 <사상계> 창간호 표지.

     

    이 수상을 마지막으로 장준하는 잡지 발행을 포기하고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 반민족적 통치에 저항하기 위한 정치활동에 뛰어 든다.

    <사상계>는 백범 김구 주석의 암살 이후 갈 길을 잃은 장준하가 인생을 바쳐 만든 그의 분신이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53년 4월에 창간호가 나온 이래 <사상계>는 우리 민족에게 어둠을 밝히는 하나의 촛불이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편집위원회를 구성, 최고의 글을 게재해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발행부수가 10만부를 넘어설 정도였으니 지식인 사회에 준 영향은 막대했다.

    여대생들은 '지적 수준'을 과시할 목적으로 가슴에 안고 다녔고, 학자라고 자신을 내세우려면 <사상계>에 최소한 글 한 편이 실려야 할 정도였다.

    <사상계>는 특히 마지막 발악을 하는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매섭게 비판했다.

    그러나 4.19혁명이 낳은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린 쿠데타 세력은 <사상계>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1963년 1월 7일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사상계 고사작전="">이 벌어진다.

     

    1961년 <사상계> 7월호가 시중에 깔린 후 4,5일이 지나자 장준하와 함석헌은 중앙정보부로 연행됐다.

    장준하는 취재부장 고성훈과 함께 중앙정보부장실로 끌려갔다.

    장준하의 회고를 들어보자.

    "요란스런 발자국 소리와 함께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씨가 계급장이 없는 군복 차림으로 부하들과 함께 들어왔다. 그는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거치른 숨결을 억제하며 <사상계> 표지에 나온 제목인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부분의 둘레에다 볼펜으로 선을 쳐서 내 앞에 내놓더니 '정신분열자 같은 영감쟁이(필자인 함석헌 선생을 지칭하는 말)의 이따위 글을 도대체 어떤 저의로 여기에 실었소? 성스런 혁명과업 수행 과정에서 당신은 우리 군사혁명을 모독한 것 아니오? 이것을 싣게 된 목적과 경위를 말해보시오"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의 고사작전이 시작됐다.

    <사상계>를 발행해 서적 총판을 통해 시중에 깔면 중앙정보부가 서점들이 책을 팔 수 없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렇다고 바로 반품시키지도 않았다.

    그냥 서점 창고에 석달 정도 보관하게 한 후 다시 반품하도록 하는 전략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의도를 가진 세무조사를 잇따라 실시했다.

    빚더미에 쌓인 장준하는 잡지 발행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박정희 정권과의 본격적인 대결에 나선다.

    ◈ 광복군 장교 출신의 장준하,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를 정면으로 공격하다

    만주군 다카키 마사오 중위(왼쪽)와 광복군 장준하 대위.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은 죽는 날까지 숙명적인 대결을 벌인다.

     

    장준하와 박정희.

    아무리 식민지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해도 이렇게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장준하는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해 중경임시정부에 합류한 후 광복군에 들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총을 든다.

    박정희는 제 발로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사관학교를 거쳐 우등생이라는 이유로 일본 육군사관학교까지 들어간다.

    졸업 후 만주군 중위로 근무하다 일본이 패망하자 잽싸게 '대한민국 군복'으로 갈아입고, 그 만주군 인맥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통한 집권에 성공한다.

    해방 후 장준하가 김구 선생 비서로 통일운동에 매진하는 동안 박정희는 남로당에 입당해 비밀당원으로 활동하다 전향한다.

    정치적 성향도 다르다.

    장준하는 철저한 민주주의 신봉자인 반면,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거추장스러운 장식물로 여겨 흔적도 남기지 않고 부셔버린다.

    장준하의 첫 정치활동은 일본과의 굴욕회담 반대투쟁이었다.

    장준하가 대중집회에서 박정희 정권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어 1967년 대통령 선거운동에 뛰어들어 연설원의 하나로 박정희 후보에 대해 독설을 퍼붓는다.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나 일정한 자격과 조건만 갖추면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박정희 씨는 안됩니다. 박정희 씨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의 독립 광복군에게 총부리를 겨누었으니 이런 인물이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있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수치입니다"

    "박정희 씨는 과거 공산주의의 남로당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남한에서 지하 조직활동을 한 사람이며, 조직원 동료를 팔아 희생시키면서 자기 목숨을 살린 사람입니다"

    "박정희 씨는 국민을 물건으로 취급하여 우리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고 있고, 그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1967년 5월 8일 장준하는 구속되었다.

    구속 사유는 '국가원수 모독죄'였다.

    장준하는 그 해 6월 8일 실시되는 국회의원 선거에 옥중 출마했다.

    지역구인 동대문 을구 유권자들은 육사 9기 출신의 공화당 강상욱 후보 대신 광복군 출신의 장준하에게 몰표를 주었다.

    장준하는 어렵게 국회에 등원했지만, 3선개헌에 이은 10월유신이란 친위쿠데타로 정치활동이 불가능했다.

    ◈ '유신시대'의 개막…장준하, 유신체제 타도에 몸을 던지다

    1972년 10월 17일을 기해 '10월 유신'이 공포되었다.

    유신헌법은 한 마디로 '박정희'란 한 사람의 종신집권을 위한 악법이었다.

    오죽했으면 그가 측근에 의해 사살되자, 그의 참모들이 바로 휴지조각으로 만들었을까?

    대한민국은 '겨울공화국'으로 변모했다.

    장준하는 이에 맞서 '유신헌법 개헌을 위한 100만인 청원 서명운동'에 착수했다.

    그것은 마른 초원에 불이 붙은 격이었다.

    불과 10여 일만에 무려 30만명이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놀란 유신독재정권은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표하고, 첫번째로 장준하를 구속했다.

    긴급조치를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군사법정에 선 장준하(맨 오른쪽)와 백기완(그 왼쪽)

     

    장준하는 민간인 신분이면서도 긴급조치 규정에 따라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의연하게 자신이 할 말을 다했다.

    그 댓가는 혹독했다.

    무려 15년의 징역형이 선고된 것이다.

    장준하를 석방하라는 압력이 국내외에서 쇄도했다.

    주한 미대사관의 요청을 받고 미국 정부가 강하게 압력을 가했다.

    결국 구속된지 11개월이 지난 1974년 12월 3일 '병보석'이란 명분으로 석방되었다.

    형집행정지로 출감하는 장준하를 함석헌 선생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이 사건은 박정희의 비참한 '패배'였다.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 제거를 위해 다른 방법을 강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 장준하, 약사봉 계곡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다

    박정희가 유신 선포와 함께 계엄령을 선포한 후 수많은 정치인과 민주인사를 무참하게 고문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누구나 인권유린이 만연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 강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박정희가 시해되기까지 7년간 교도소는 대학생과 재야인사, 말 한 마디 잘 못해 '막걸리 반공법'에 걸린 서민들로 넘쳐났다.

    먼저 일본에 망명한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가 1973년 8월 8일 백주대낮에 납치당해 한국으로 끌려왔다.

    2달 후에는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 앞마당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이어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의 사형이 집행되는 살벌한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출감 후 건강을 추스리고 있는 장준하에게도 여러 갈래로 '뭔가 진행되고 있으니 몸조심하라'는 경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운명의 약사봉 등반에 나선 것이다.

    약사봉. 장준하는 하산길에 경사 75도, 높이 12m의 가파른 절벽을 아무런 장비없이 내려왔다고 한다.

     

    1975년 8월 17일 오후, 여느 해처럼 폭염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날 동아일보는 "항일 독립투사이며 전 국회의원인 장준하 씨가 17일 오후 2시 반경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3리 약사봉에 등산을 갔다가 하산길에 벼랑에서 실족, 추락해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면목동 장준하의 전셋집에는 함석헌 등 여러 사람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침통한 표정으로 비좁은 안방과 마당에 앉아 있었다.

    장준하의 시신은 다음날 새벽에야 집에 도착했다.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절벽에서 떨어졌다는데 주검이 너무 멀쩡했고, 멍도 없고, 오른쪽 귀 뒤쪽에서만 피가 나왔다. 양팔 겨드랑이 쪽에 멍이 있었는데 누군가 잡아끌고 갈 때 난 것처럼 보였다. 의사들이 만져보더니 '뒷골이 함몰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에도 '약사봉 현장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퍼졌다. 아버지가 추락한 것을 봤다는 증언도 거짓으로 드러났다. 결론은 아버지는 추락 현장에 가지 않았고, 다른 데서 변을 당한 뒤 시신을 옮겨놓은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1975년 8월 2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장준하 선생 장례식에서 아들 장호준이 고인의 영정을 들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박정희도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4년 후 궁정동에서 비명횡사하고, 다시 세월이 흘러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이때서야 비로소 장준하 선생의 죽음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판단을 유보한다는 의미의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유골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데다 국정원, 기무사에 있을 자료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진실을 판단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극적인 반전이 왔다.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규명 공동위원회가 공개한 장준하 선생의 유골. 오른쪽 두개골이 6~7cm 가량 함몰됐다. (사진=장준하 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 제공)

     

    2012년 여름 비 피해로 파주시 천주교 나사렛공동묘원에 있는 장준하 묘소 뒤편의 석축이 붕괴되었다.

    유족들은 유골을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통일동산의 장준하공원으로 이장했다.

    이장 때 유골을 검시한 결과, 머리 뒷쪽에서 지름 6~7cm의 원형으로 함몰된 구멍과 금이 간 흔적이 발견되었다.

    장준하 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는 다음해 3월 26일 '유해 정밀감식 결과 대국민 보고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서울대 이정빈 교수는 추락사 시물레이션을 통해 '유골의 둥근 골절상은 머리뼈가 둔기에 맞아서 생긴 상흔'이라고 발표했다.

    이제 진상 규명의 마지막 관건은 사고 당시 유일한 목격자이자 '추락사'라고 주장한 김용환이란 인물의 진실 고백 뿐이다.

    그가 끝내 진실을 말하지 않고 세상을 떠날 경우 어딘가에 보관돼 있을 당시 중앙정보부나 보안사령부의 관련 자료를 찾는 길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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