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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뇌부 쑥밭…꽃이 휘날리듯 아름다워"



책/학술

    "일본 수뇌부 쑥밭…꽃이 휘날리듯 아름다워"

    [임기상의 역사산책 35]여성혁명가 이화림, 테러에 이어 무장투쟁에 나서다

    일본 군인들에게 체포된 윤봉길 의사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 부부로 가장해 식장에 들어간 윤봉길, 폭탄을 던지다

    상하이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이 한바탕 맞붙은 상해사변 직후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현재의 노신 공원) 입구.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곳에서 상해사변 전승 기념과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기념식을 열 예정이었다.

    이 공원에 말쑥한 스프링 코트를 입고 도시락과 물통을 든 청년이 화사한 양장을 한 여자와 함께 다정하게 들어섰다.

    식장 입구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헤어집시다"
    "반드시 성공하세요"

    남자는 김구 선생이 지휘하는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로, 약관 24살의 나이였다.

    양장을 한 여인은 김구 선생의 비서인 27살의 '항일전사' 이화림이었다.

    오전 11시 40분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 갑자기 폭음소리가 잇따라 들렸다.

    "쾅~ 쾅~"

    식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도시락과 물통에 담긴 폭탄은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일본거류민단장을 죽여버리고, 노무라 중장의 두 눈을 날려 버리고, 우에다 중장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시게미츠 주중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어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고 살았다.

    윤봉길 의사의 폭탄을 맞은 시게미츠 일본 외상은 패전 후 미주리함에서 열린 항복 조인식에서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식장 밖에서 초조하게 거사를 기다리던 이화림은 단상이 박살나는 모습을 보자 탄식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정말 꽃이 휘날리듯 아름다운 모습이구나~"

    회고록에는 "마치 추풍낙엽이 지듯이 일본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묘사했다.

    ◈ 이화림, 이봉창에 이어 윤봉길 의사의 순국 소식 듣고 오열하다

    윤봉길과 이화림은 전날 부부로 가장하고 홍커우 공원을 미리 답사했다.

    원래는 둘이 같이 식장에 들어가기로 했으나, 김구 선생이 이화림이 일본어에 능통하지 않기 때문에 같이 체포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들어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두 명 다 희생시킬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1931년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열린 선서식. 오른쪽은 선언문 사본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위 선서식에서 윤봉길 의사는 "나는 적성(赤誠)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는 맹세한 그대로 적들을 도륙하고, 기개를 잃지 않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는 짧은 유언이었다.

    상해임시정부 건물 안에 있던 이화림은 윤봉길의 순국 소식을 듣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뇌리 속에 웃으며 일본으로 떠난 이봉창 의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다리 사이에 찬 특제 '훈도시'는 이화림이 밤을 새워 만든 것이었다.

    이봉창은 그 속에 수류탄 2개를 숨긴 채 일본으로 향했다.

    윤봉길의 거사가 있기 3달 전인 1932년 1월 8일 일본의 수도 도쿄의 고지마치 구 사쿠라다몬.

    서울 용산 효창운동장 입구에 있는 이봉창 의사의 동상

     

    31살의 조선 청년 이봉창은 일왕 일행이 나타나자 힘차게 수류탄 2개를 잇따라 던졌다.

    그러나 거리가 먼데다 일렬로 지나가는 마차 행렬 중 일왕이 탄 마차를 식별하지 못해 기수와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 표적을 놓쳐버렸다.

    일본의 심장 일왕이 테러를 당하자 일본 열도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을 받은 중국인들과 모든 언론매체들이 흥분했다.

    모든 신문들이 "조선인 리봉창, 일왕을 요격했으나 불행히 명중 못했음"이란 제목의 기사를 쏟아냈다.

    열받은 일본당국은 군경을 동원해 중국 신문사를 습격했다.

    체포된 이봉창은 일본 경찰의 심문에 일체 불응한 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 소식을 들은 이화림은 눈물을 흘리며 지인들에게 이봉창의 얼굴을 묘사했다.

    "그 청년은 적동색 얼굴빛, 짙은 눈썹 아래 정기 넘치는 두 눈, 툭 삐어져 나온 높은 관골, 우뚝한 코마루, 갸름하면서 선이 굵은 생김새는 퍼그나 패기 있고 당차보였습니다"

    ◈ 투사 이화림, 김구 선생의 슬하를 떠나 무장항일투쟁에 뛰어들다

    1905년 평양에서 태어난 이화림은 독립군인 오빠들의 영향을 받아 일찍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25살에 홀어머니와 작별하고 상해로 넘어온 그녀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여기서 사격과 무술을 배우고, 일본 밀정들을 유인해 살해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도운 이화림은 테러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조선인 혁명가들이 운집한 광저우로 근거지를 옮겼다.

    1932년 가을 그녀는 의열단의 추천을 받고 중산대학에 입학해 의학 공부에 매진했다.

    손문 대총통이 세운 중산대학. 이화림이 입학할 무렵 조선인 학생 30여명이 다니고 있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10월 10일 한커우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규모는 100~300명 정도이지만, 대원들의 지적, 군사적 소양과 항일투쟁 경력으로 볼 때 중국내 한인 무장단체로는 최정예였다.

    1938년 창립한 조선의용대 창립 사진. 산전수전 다 겪은 항일투사들이 한 곳에 모였다.

     

    공부를 마친 이화림은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는 계림으로 가서 입대해 부녀대 부대장으로 임명됐다.

    부녀대는 일본군 진지 앞까지 접근해서 선전공작을 벌였다.

    조선의용대는 본격적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팔로군 129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화북지방의 태항산으로 이동했다.

    이화림은 부녀대 부대장 자격으로 조선인 간부들도 양성하고, 틈만 나면 총을 들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시간이 나면 대원들을 이끌고 돌미나리를 캐어 김치를 담궜다.

    이때 우리 민요 '도라지' 가락에 가사를 바꿔 만든 '미나리 타령'을 합창했다.

    "미나리, 미나리, 돌미나리
    태항산 기슭의 돌미나리
    한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철철 넘치누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거라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 무정 장군의 부름을 받아 의학 공부에 매진하다

    조선의용대가 1943년 연안으로 이동한 직후에 조선의용대장 무정 장군이 이화림을 불렀다.

    팔로군에서 한국인으로는 최고위직에 올랐던 조선의용대장 무정 장군. 해방 후 북한에 들어왔으나 김일성에게 숙청당한다.

     

    "우리 혁명사업에는 전문 훈련을 받은 의사들이 필요합니다.
    항일전쟁이 끝나면 우리 앞에는 더 간고하고 복잡한 혁명과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지는 의학 공부를 중도에 폐하지 말고 잘 배운 다음 우리 부대로 돌아오세요"

    이화림은 총을 내려 놓고 의과대에 입학해 공부를 하다 해방이 된 후에는 새 중국의 의료보건사업에 몰두했다.

    노년에는 연변자치주와 대련시에서 조선인 대표로 활동하고, 수중의 재산을 틈틈히 아동문학 작가들을 위해 기부했다.

    그녀는 1999년 2월 10일 95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임종 전에 유언을 남겨 자기의 전 재산 5만원을 대련시 조선족학교에 기증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한국의 이윤옥 시인은 시 한 수를 헌정했다.

    "화려한 불빛 속 상하이의 밤
    서러운 이방인 삼삼오오 모여 이룬 숲
    서둘러 국권회복의 길 암중모색 중

    일본 사쿠라다몬으로 떠나는
    이봉창 가슴에 안겨준 폭탄
    불발로 품은 뜻 히로히토 화들짝 놀라
    그날 밤 이불에 오줌 지렸을게다

    석달 뒤 상하이 홍구공원
    물샐 틈 없는 수비 뚫고
    단번에 날린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도
    여장부 이화림이 도운 거사였다네

    태항산 거친 산림 속 마다치 않고
    조선의용대 끌어안고 부르던 노래
    아리랑 피 끓는 함성 속에
    절절이 묻어나던 조국해방의 염원

    돌미나리 민들레 수양버들 잎사귀로
    배 채우며 쟁취한 광복
    고국은 그 이름 잊었어도
    그 이름 천추에 길이 길이 남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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