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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새롭게 질문하기는 저항의 시작이다"



책/학술

    강남순, "새롭게 질문하기는 저항의 시작이다"

    신간 '정의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는 신문 칼럼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교수 강남순의 첫 대화서이다. 저자는 새로운 질문하기를 통한 비판적 사유야말로 인문학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비판적 사유는 당연하다고 간주되는 관습 및 사회체제에 '왜'라는 물음표를 붙이게 한다. 그 물음표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순을 인식할 수 있는 실마리다. 세계의 모순을 인식한다는 것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와의 연대 및 사회적 책임의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이며, 이는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저항의 출발점이 된다. 정의의 부재 상태를 개선하고 자유와 평등을 확산시킬 수 있는 단초가 바로 인문학인 것이다. 저자는 그런 인문학을 ‘비판적 저항으로서의 인문학’이라고 명명한다. 이 책은 저자가 비판적 저항으로서의 인문학 정신에 입각하여 우리 인간과 세계를 성찰한 결과물이다.

    '정의'는 인문학적 성찰과 더불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그렇다면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저자는 그동안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온전히 누리지 못했던 존재, 즉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 노동자, 빈곤층 등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게도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부여되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비판적 담론을 통한 논의 및 사회운동으로 많은 이들이 그 권리를 조금씩 획득해왔지만 여전히 남성, 이성애자, 비장애인, 백인 등의 범주에 속하는 이들만이 온전한 시민으로 대접받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만약 누군가가 생각하고 부르짖는 정의가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거나 심지어 그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그것이 설령 일정한 타당성을 담고 있더라도 정의라고 하기 힘들 것이다. 예를 들어 노동문제나 통일문제 해결이 우선이므로 여성이나 성소수자문제 해결은 보류해야 한다는 잘못된 정의 인식이 그에 해당하겠다.

    한편 강남순은 '저울'이 상징하는 근대적 의미의 정의 이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근대적 정의는 법을 준수하는 것과 동일시되며, 구체적 정황과 상관없이 표면적이고 기계적인 균형만을 내세우는 한계를 보이기 때문이다. 2016년 7월, 인기 가수 리쌍이 자신들 소유 건물의 세입자와 갈등을 겪는 모습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보통 상대적 약자의 편에서 공감해주는 경향이 있음에도 이 경우 오히려 건물주인 리쌍의 편을 들어주는 이들이 많았다. 거기에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리쌍이 세입자를 내보내는 것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정당하게'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한국의 '상가임대차보호법' 자체가 세입자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법의 준수가 곧 정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법적 정의는 그 효용만큼이나 한계도 많으며, 이 책에서 종종 인용되는 철학자 자크 데리다 역시 정의는 언제나 법 너머에 있다고 보았다.

    저자는 법적 정의를 정의와 등치시키는 정의 이해와 더불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악마화하는 '손쉬운 정의'에도 반대한다. 역시 리쌍 사건의 경우, 임대인과 세입자 가운데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이들이 반대편을 정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불합리한 상가임대차보호법'과 같은 사태의 근본 원인을 직시하는 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으며, 그저 스스로의 정의감을 과시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결국 우리는 정의가 그렇게 단순 명확한 것이 아니며, '나의 정의'가 틀릴 수도 있음을 늘 의심하고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언급했듯 이 책은 인문학적 성찰이 곧 비판적 저항을 낳고, 그 저항이 정의의 확산으로 연결됨을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해야 할 저항을 네 가지 차원에서 제시한다. 정치적 저항, 사회적 저항, 종교적 저항, 그리고 윤리적 저항이 바로 그것이다. 정치, 사회, 종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내용이 결정되며, 또 역으로 우리 개개인의 삶이 정치, 사회, 종교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처럼 네 측면에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총 네 개의 장인 '정의를 위하여'의 구성은 그 같은 저자의 구분을 따르고 있다.

    정치적 저항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억압하며 적대와 소외를 제도화하는 정치체제에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1장에서 저자는 세월호 참사,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건, 노동문제, 난민문제 등 국내와 국외의 정치를 아우르는 정치적 상황을 소재로 이런 세계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사유하게 한다.

    사회적 저항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차별과 억압을 '정상/비정상'의 틀로 정당화하는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바꾸고자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책의 2장에서는 그런 사회를 분석하고 조명하기 위해 젠더, 인종, 계급, 계층, 나이, 장애 여부, 성적 성향, 국적 등과 같은 렌즈로 여성 및 성소수자 혐오, 갑을관계의 일상화 등 한국사회에 산재한 각종 고질적 문제를 들여다보고 근본 원인을 성찰한다.

    종교적 저항은 신의 이름으로 여성, 성소수자, 다른 종교를 향한 배제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종교를 직시하고 비판 및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종교는 대체로 한국 개신교를 가리킨다. 3장에서 저자는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가 억압과 해방이라는 상충적인 역할을 해왔음을 상기시키며, 억압과 폭력을 생산하는 ‘나쁜’ 종교의 모습을 억제하고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확장하는 '좋은' 종교의 모습을 키워나가야 함을 역설한다.

    마지막은 윤리적 저항이다. 앞의 세 저항이 구조적인 데 초점을 두는 반면 윤리적 저항은 자신 속의 이기심, 한계, 물욕, 권력욕 등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정의가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과 스스로의 인식이 닿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있을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으며, 잘못을 저지른 타자라도 일방적으로 정죄 및 악마화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윤리적 저항은 이 세상을 사는 것이 곧 타자들과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임을 인지하게 함으로써 정치, 사회, 종교적 모순의 개선에 참여하게 하는 동력을 제공한다.

    강남순의 인문학적 성찰을 담은 이 책은 정의의 윤곽을 어슴푸레 그려줄 뿐, '이것이 바로 정의'라거나 '이러이러하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를 확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각자가 처한 정황 안에서 스스로 사유하게 돕는다. 저자가 강조하듯이 인문학적 성찰은 정해진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지면서 각자에게 맞는 대안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그 사유를 토대로 세상의 모순에 저항하며, 끝내 이 정의가 부재한 세계에서 정의의 지분을 조금씩이나마 늘려가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지침서가 되어줄 것이다.

    책 속으로

    비판적 사유는 비판적 저항으로 이어진다. 비판적 저항을 통해서 ‘보편적’ 인간의 범주로부터 배제되었던 ‘개별인’들로서의 다양한 인간들의 권리·평등·정의가 확장된다. 이러한 권리·평등·정의가 확장되어야 비로소 인간의 자유 역시 확대된다. (…) 현대의 다양한 인문학적 담론들은, 비판적 사유와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자유와 해방의 확장을 위하여 약자들과의 연대 및 사회적 책임의 의미를 인식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비판적 저항으로서의 인문학이다. -14~15쪽

    ‘인문 정신’이란 보다 평등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연대와 책임적 삶에 자신을 던지는 정신이다. 따라서 인문학적 사유란 우아한 문화 활동이 아니다. 나·타자·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들과 마주하고 씨름하는 치열한 행위이며, 비판적 성찰과 고뇌의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조금씩 이 세계를 향하여 개입하고 자신을 던지는 사유이고 실천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인문학적 소양이란 확실성을 경계하고 불확실성 속에서 사유하는 것이며, 고정된 정답을 찾기보다 새로운 질문을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18쪽

    이 세계에서 ‘살아있음’이란 자유를 지닌 존재로서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유를 지켜내기 위한 저항은 살아있음의 확인이다. 희망의 근거는 보장된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와 정치를 향하여 씨름하는 그 과정 자체 속에 바로 희망의 근거가 있다. 이기는 싸움이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할 싸움이기에 싸우고 저항해야 한다. -44쪽

    그람시는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생충처럼 ‘기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무관심은 인간의 지성을 파괴하면서 역사 속에서 더욱 나은 세계를 향한 최선의 계획들을 뒤틀고 망가뜨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봤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보다 정의롭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위한 변화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87쪽

    ‘좋은’ 종교는 타자들에 대한 책임·환대·포용·연민·연대·평등·평화·정의의 가치를 실천하고 확산하고자 한다. 즉, 종교 자체를 존속시키기 위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 종교인들, 신을 향한 사랑이 타자들을 향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이해하는 종교인들이 바로 ‘좋은’ 종교를 만들어가는 이들이다. 이러한 ‘좋은’ 종교를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모든 종교인의 과제이다. -146쪽

    다른 동물과 차별화되는 인간의 독특한 점은, 절망과 무의미성의 삶 한가운데에서 희망과 유의미의 세계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인간만이 보다 나은 세계를 동경하고 추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 자살을 한다. (…) 희망이란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원동력이다. 희망은 낙관처럼 구체적인 사실과 자료에 근거한 ‘무엇 때문에’가 아니라, 그 눈에 보이는 조건들이 암담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가치로 작동한다. -218~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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