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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쓰나미가 휩쓴 미야기현…복구에도 상처 남아



아시아/호주

    3년전 쓰나미가 휩쓴 미야기현…복구에도 상처 남아

    • 2014-03-02 18:23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이제 겨우 치웠을 뿐이고 부서진 건물은 아직 다 짓지 못한 상태.

    동일본대지진 3주년을 앞두고 지난달 27일부터 4일간 둘러 본 미야기(宮城)현은 이런 인상을 풍겼다.

    지진과 쓰나미가 강타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가정하면 곳곳에서 벌어지는 지반 공사 등이 신도시 건설 현장을 떠올리게 할만 했다.

    현 곳곳에 남은 앙상한 구조물이 부서진 제방 등이 재해 지역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었다.

    지난달 27일 찾아간 게센누마(氣仙沼)시의 리아스아크 미술관의 사진과 전시물을 통해 3·11로 폐허가 된 당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지진·쓰나미가 휩쓴 직후의 미야기현은 가옥, 공공시설물, 자동차 등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구조물과 도구가 완전히 부서져 거대한 쓰레기장 같은 형상이었다.

    종잇조각처럼 구겨진 자동차 부품·세탁기·자전거, 흙투성이가 된 책, 노트북, 졸업장, 곰 인형 등 피해 지역에서 수집한 전시물이 '재해'나 '재난' 등의 단어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참혹함을 일부나마 보여줬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거대한 잔해를 치우고 다시 터를 닦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원전사고가 난 후쿠시마(福島)현의 '악명'에 가려 그리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미야기현은 쓰나미의 직격탄을 맞아 가장 맞은 사망자가 발생한 곳이다.

    동일본대지진 때 일본의 6개 현에서 561㎢가 침수됐는데 이중 약 60%에 해당하는 327㎢가 미야기현에 있다.

    하시모토 시게요시(橋下茂善·65) 게센누마 관광컨벤션협회 사무국장은 게센누마에서만 2년간 160만t에 달하는 잔해를 치웠다고 쉽지 않은 복구 과정을 설명했다.

    그럼에도 이곳이 경제활동을 하고 생활하는 공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아직 미야기현이 가야 할 길은 멀어 보였다.

    주민들은 특히 가설주택에서 생활하는 피난민이 여전히 많고 경제 상황이 회복됐다고 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지난달 28일 미나미산리쿠초(南三陸町)의 가설 상가에서 만난 스가와라 미노루(菅原實·58)씨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생선초밥집을 운영하는 그는 지진 전의 매출을 70% 정도 회복했고 다른 초밥 가게들과 함께 계절별로 주 재료가 바뀌는 '기라키라돈'('반짝반짝 덮밥'이라는 뜻)이라는 특색 있는 음식을 개발해 주목받고 있지만 여전히 사는 게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느끼는 고통은 의외로 돈 문제가 아니었다. 스가와라 씨는 "여전히 3분의 1 정도는 가설 주택에서 생활하고 있고 매일 만나던 사람을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만날 수 있는데 그게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주민의 정신적 고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미나미산리쿠초 방재대책청사를 찾아갔다.

    가느다란 줄이 철골 구조의 3층 건물에 일반인이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었고 앞에 놓인 탁자에 놓인 꽃다발이 바람에 흔들리며 황량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곳은 주민 다수가 피신했다가 쓰나미로 옥상까지 물에 잠기는 바람에 목숨을 잃은 곳이다.

    삼삼오오 찾아와 한동안 건물을 살펴보는 이들도 있었고 이곳을 찾는 것이 일상이 된 듯 근처에 차를 세우고 합장한 뒤 불과 수십초만에 떠나는 추모객도 있었다.

    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해 청사를 남겨놓자는 주민과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흉물"을 없애자는 의견이 여전히 갈리고 있다고 대지진·쓰나미 피해를 설명하는 가이드로 자원봉사하는 스가와라 기요카(菅原淸香·63·여) 씨가 알려줬다.

    청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구라(戶倉)초등학교의 청사는 쓰나미와 함께 시간이 멈춘듯한 모습이었다.

    본관 정면의 시계는 2시 48분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다. 대지진은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46분에 발생했다.

    금이 간 유리창으로 들여다보이는 칠판에 분필로 적힌 "3월 12일 졸업식"이라는 표기가 예행연습을 하다 서둘러 학교를 떠난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스가와라씨는 학교 측이 학생들은 옥상이 아니라 근처 산으로 대피시킨 덕에 대참사는 피했다고 설명했다.

    미야기현에는 3·11 전의 일터나 사업장을 아직 회복하지 못한 주민이 많다. 그럼에도 "힘들다"는 반응보다 "재해가 났을 때는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고맙다", "힘내서 살겠다"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쓰나미에 가게가 파손돼 가설 상가에서 문방구를 연 구마가이 아쓰미( 熊谷あつみ·60·여) 씨가 대표적이다. 그는 두 번이나 쓰나미의 피해를 겪었지만 "힘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6살 때 칠레 지진의 여파로 생긴 쓰나미가 미나미산리쿠초를 덮치면서 구마가이 씨는 어린 나이에 쓰나미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구마가이 씨는 "물건이 없어진 것은 문제는 아니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지고 형제·자매가 죽는 것이 외롭고 고통스럽다"며 "그래도 작년에 미국 고등학생도 오고 중국인 관광객도 와서 많이 도움이 됐다"고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미야기현에서 부흥의 가장 모범 사례로 꼽히는 마쓰시마초(松島町)는 특유의 관광 자원의 덕을 많이 누렸다.

    이곳도 침수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 삼경의 하나로 꼽히는 다도해를 바탕으로 재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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