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이 겨울도 '냉골 지하 틈'에 그들이 있다

"네 평 남짓한 지하 컨테이너 휴게실. 햇살 넘치는 교정과는 한참 떨어져 있고 학생들 수백 명이 머리 위를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우박 내리듯 들리고, 한여름에도 뼛속이 시리도록 춥고, 어둡고…"
- 책 <양춘단 대학 탐방기> 중
소설 '양춘단 대학 탐방기' 속 양춘단 할머니는 용역업체 소속의 대학 청소노동자입니다. 낭만 가득한 캠퍼스에서 그가 쉴 곳은 '지하 컨테이너 휴게실'입니다. 박지리 작가는 양 할머니가 '실제인물'이라고 주장하는데요. 저자의 말에서 "분명 본 적 있을 거다"라고 썼죠.
실제로 주변에서 청소노동자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학교, 병원, 아파트 등 여러 곳에서 보게 되는 그들은 대부분 일하는 모습입니다. 쉬는 시간이 없을까요? 끼니를 때우고, 몸을 기대는 잠깐의 여유는 가질 텐데요. 하지만 그 모습은 쉽사리 보이지 않죠.
청소노동자 휴게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곳, 일부는 '지하나 계단 밑'에 있기도 합니다.
    
2년 전 일입니다. 심장질환을 앓던 60대 청소노동자가 한여름 에어컨과 창문조차 없는 휴게실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여름엔 내부가 더운 데다 곰팡이 냄새도 심해, 고인은 생전 환풍기와 선풍기를 손수 마련했는데요. 겨울이면 냉기가 드는 틈새를 휴지로 막기도 했죠.
대학들 중 가장 많은 국가지원을 받는 서울대학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서울대 공과대학 제2공학관 직원휴게실은 원래 창고였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 있던 1평 남짓한 간이공간을 개조해 휴게실로 만든 것이죠.
당시 서울대 관악캠퍼스의 청소노동자 휴게실은 모두 146곳이었습니다. 23곳에 냉방시설이 없고, 10곳에 난방시설이 없었는데요. 지하 23곳, 계단 아래인 곳은 12곳이었죠.
서울대 측은 뒤늦게 개선에 나섰습니다. 지난달 16일 서울대 캠퍼스관리과는 정보 공개 자료를 통해 청소노동자 휴게실에 냉난방시설을 모두 설치했으며, 134개소 중 4개소만 지상이 아닌 곳에 있다고 밝혔는데요. 이는 이용자 의견을 듣고서 존치한 것이라고 합니다.  
    
앞서 2018년 고용노동부는 근로기준법과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사업장 휴게시설 설치·운영 가이드'(이하 가이드)를 마련하고 산업현장에 배포했습니다. 고용부는 '냉난방 시설 설치'를 필수라고 기재했지만, 필수사항을 꼭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필수사항은 휴게시설 설치시 가급적 동 내용이 모두 충족되도록 설치하고, 권장사항은 사업장 작업 특성‧인원 규모 등을 감안하여 자체적으로 설비를 유지‧관리하기 바랍니다"
가이드에 적힌 내용입니다. 휴게실 위치도 가급적 지상에 있어야 한다고 돼있는데요. 이런 요건들을 '가급적'이 아니라 '반드시' 충족하도록 했다면 어땠을까요?  
A대학 미화원대기실에 우풍이 심해 청소노동자가 사비로 방한지를 붙인 모습. 민주노총 제공A대학 미화원대기실에 우풍이 심해 청소노동자가 사비로 방한지를 붙인 모습. 민주노총 제공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지하나 계단 밑은 냉난방시설이 더욱 중요합니다. 지난 10월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이 교육부에 받은 자료를 보면, 국립대 청소노동자 휴게실 1358곳 중 26곳에 난방시설이 없습니다. 부산대, 전남대, 제주대에서는 냉방·난방·환기 시설이 모두 없는 휴게실도 조사됐습니다.
지하와 계단 밑에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부산대 청소노동자 휴게실. 이탄희 의원실 제공지하와 계단 밑에 샌드위치 패널로 지어진 부산대 청소노동자 휴게실. 이탄희 의원실 제공
특히 부산대는 전체 대비 69.2%인 18개 휴게실이 난방시설 미비로 조사 대학 중 가장 많았고, 계단 옆이나 지하 자투리 공간에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휴게실 역시 다수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교육부는 화재 취약성을 우려해 2025년까지 전국 초중고교에 샌드위치 패널을 교체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미 2019년 교육부는 각 대학에 청소노동자 휴게실을 고용부 지침에 맞게 개선하도록 권고했습니다. 국립대 시설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고, 사립대학에도 공문을 보내 개선계획을 제출받았는데요. 이에 전체 국립대 41개교와 사립대 150여 곳 가운데 약 20%인 34개교만이 개선 의지를 밝혔죠.      
    
CBS노컷뉴스가 국내 319개 대학에 '청소노동자 휴게실 점검 결과'를 정보공개 청구했습니다. 이에 약 75%인 238개 대학이 점검 자료를 공개했습니다. 일부 대학은 "휴게실은 있으나 정기 점검을 하지 않는다" "별도 휴게실 점검표가 없다" 등 정보 미공개 사유를 밝혔습니다.
추가로 319개 대학에 휴게실 점검부서 지정 여부를 물었습니다. 이에 151개 대학의 유효응답을 살펴보면 130개 대학은 지정된 본교 부서가, 15개 대학은 용역업체 측이 청소노동자 휴게실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또 6개 대학이 아예 점검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습니다.   
C병원 청소노동자는 휴게실이 없어 계단 밑에 플라스틱 의자를 놓고 쉰다. 병원 측은 공간이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제공C병원 청소노동자는 휴게실이 없어 계단 밑에 플라스틱 의자를 놓고 쉰다. 병원 측은 공간이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제공
열악한 휴게환경에 처한 청소노동자가 학교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C병원에는 아예 휴게실이 없어 계단 밑에서 겨우 허리를 펴는 이도 있습니다. 이 공간에선 더위도, 추위도 중앙 냉난방시설로 이겨내야 하는 상황이죠.
    
"새벽같이 출근해 일하다 폐기물박스를 깔고 계단 밑에서 누워 쉬는 사람의 심정을 아십니까"
지난달 16일 국회에서 '2021 병원 청소노동자 휴게실 실태 증언대회'가 열렸습니다. 보건의료노조 자료집에 따르면, 서울의 한 대형병원 청소노동자 D씨는 "휴게실이 없어 좁은 탈의실에 몇 명이 들어가면 나머지 사람들은 구석진 자리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다"며 "공기질을 측정해보니 계단 밑이나 엘리베이터 앞 등 휴게공간이 이산화탄소 농도도 높았고, 겨울엔 히터도 없이 추위를 어떻게 견딜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90명이 사용하는 본원의 휴게실 지하주차장 한복판에 있습니다"
경기도의 한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 E씨도 겨울이 걱정입니다. 가장 많은 인원이 이용하는 휴게실이 차가 오가는 지하주차장에 있어 시끄럽기도 하고, 온열장치도 제대로 돼있지 않습니다. 이마저도 코로나 감염 우려에 층마다 있는 오물처리실에서 쉰다고 밝혔죠.
    
공공기관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윤건영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13개 정부청사의 전체 133개 청소노동자 휴게실 가운데 36.8%인 49개가 지하에 있습니다. 3개 중 1개 이상인 셈이죠. 지상 10층 규모의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을 청소하는 노동자들은 지하 4층 주차장 근처 휴게실에서 쉬고 있습니다.
지난 6월 '청소노동자 휴게공간 보장을 의무화해달라'는 국민청원에 23만 2천여 명이 동의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캡처지난 6월 '청소노동자 휴게공간 보장을 의무화해달라'는 국민청원에 23만 2천여 명이 동의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캡처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냉난방 등 편의시설을 보장받도록 강제해주세요"
지난 6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소노동자들이 화장실에서 식사하지 않도록 휴게공간을 보장할 것을 의무화해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왔습니다. 청원인은 "청소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그동안 사건사고가 발생할 때만 간헐적으로 지적되어 왔다"며 "실질적인 휴게공간 보장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청원에는 23만 2천여 명이 동의했습니다.
청원 답변에서 고재형 고용노동비서관은 고용부의 가이드에 따라 사업장 휴게실을 지속적으로 지도점검해왔다고 밝혔는데요. 고용부가 대학 휴게실들을 얼마나 점검했는지 알아봤습니다.
CBS노컷뉴스가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2018~2020년 공공부문 및 대학 용역 근로자 근로조건 실태점검 결과' 일부를 확인했습니다. 2018년 66건, 2019년 56건, 2020년 5건의 대학 휴게실을 점검했으며, 휴게실 미설치로 안전보건규칙 79조를 위반한 4건에 대해 시정조치했습니다. 
2020년 들어 고용부의 대학 휴게실 점검 건수가 현저히 줄었는데요. 이에 지난달 22일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고용부 관계자는 "2018, 2019년에는 대학 휴게실 이슈가 많아 사립대까지 추가적으로 점검했던 것"이며 "20년도에는 공공기관을 집중점검하기 위해 점차 줄여나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전국 대학이 330여 개에 달하는데 지도점검은 현저히 부족합니다. 또, 휴게실 유무에 대해서는 확인했지만 지하 대기환경, 노후한 냉난방시설 등 청소노동자가 몸소 겪는 '쉼의 질'까지 고려해 시정조치가 이뤄지진 않습니다. 근로감독을 통한 개선권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강제사항이 아니기에 노동자들이 변화를 체감하기란 요원하죠.
앞서 고용부는 청원 답변에서 "실질적인 휴게공간이 제공되지 않는 등 휴게시설 설치제도가 완전히 정착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며 "휴게시설 설치의무에 벌칙규정이 없고, 설치기준 또한 가이드에 머물렀기 때문이다"고 밝히기도 했죠. 그러나 가이드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쉴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휴게실이 청소노동자들의 현실입니다.  
    
지난 7월 사업장 내 휴게시설 설치·관리를 의무화한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이 개정법은 2022년 하반기에 시행될 예정입니다.
법은 더뎌도, 사람은 빠를 수 있습니다. 청소노동자들에게 올 겨울만 견디면 된다고 하기보다, 당장의 추위를 벗어날 수 있도록 따뜻한 관심을 보이고 변화를 촉구할 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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