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시동' 최정열 감독을 만났다. (사진=박종민 기자)
영화 '시동'(감독 최정열)은 조금산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원작이 조금 더 무겁고 어둡고 가라앉은 정서가 도드라졌다면, 영화는 포스터에서도 알 수 있듯 명랑하고 발랄한 느낌이 훨씬 더 살아났다. '시동'에서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거석이 형(마동석 분)의 시그니처 컬러이자, 무대인사 의상 색으로도 선택된 연분홍색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단번에 보여준다.
지난 2016년 개봉한 영화 '글로리데이'로 장편 연출자로 데뷔한 최정열 감독은 웹툰을 보고 '반해버려서' 이번 영화 작업을 하게 됐다. 개봉 이틀 전인 지난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정열 감독은 '시동'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너무너무 재미있었고, 보통의 콘텐츠에서 잘 표현하지 않는 것을 담아내서 매력을 느꼈다고 전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지난 주말에 무대인사를 했는데 어땠나.정말 너무너무 재밌었다. 저도 그렇고 배우들도 그렇고, 극장이 꽉꽉 차서 정말 힘이 나더라. 재밌게 봤다고 하는 분들도 많았고. 그래서 배우분들이 정말 재미있게 했다. 객석에 올라가서 사진도 찍었다. 배우분들의 파이팅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감사했고, 영화가 잘됐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마음을 갖고 돌아왔다.
▶ 다 같이 연분홍색 옷을 맞춰 입었더라. 누가 정한 건가.저희 제작사, 홍보·마케팅 쪽에서 했다. 밝은 느낌도 주면서 거석이 형 시그니처 색깔이기도 하고. 되게 좋았다. 이럴 때 아니면 이런 분홍색 옷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으니. (웃음)
▶ 거석이 형 시그니처 색이 연분홍인 줄 몰랐다.웹툰에서는 그렇게까지 연분홍은 아니고 거석이 형 캐릭터가 좀 더 건조한 느낌이다. 영화로 옮겨오면서 좀 더 사랑스럽고 좀 더 친숙한 느낌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의상실장님 아이디어로 여러 가지 색을 입혀 본 끝에 나온 건데, 실제로 너무 소화를 잘하시더라. 너무 완벽하게 어울려서 과감하게 분홍색으로 했다. (웃음)
▶ 처음에 어떤 계기로 이 작업에 참여하게 됐는지 궁금하다.원작을 보고 너무 반했다. 원작은 굉장히 일상적인 걸 다루면서도, 보통 콘텐츠에서 표현하지 않는 것들을 표현하는 비범함이 굉장히 매력적이더라. 캐릭터들이 너무너무 재미있고 생기가 넘쳤기 때문에 너무 하고 싶었다. 이런 이야기는 영화로 많이 만들어지는 종류의 것은 아니라서 만들어 보고 싶었다.
▶ 이런 이야기가 영화로 많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가.예를 들면, 음… 보통의 영화들은 한두 명의 주인공이 굉장히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끝까지 달려가다가 이뤘을 때의 쾌감에 집중한다. '시동'이라는 이야기 자체는 사실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여러 명의 인물이 나오고 다양한 사연을 다루면서도, 이들의 정서와 감정을 마지막에 모여서 폭발시키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지난 18일 개봉한 '시동'은 정체불명 단발머리 주방장 거석이 형(마동석 분)을 만난 어설픈 반항아 택일(박정민 분)과 무작정 사회로 뛰어든 의욕충만 반항아 상필(정해인 분)이 진짜 세상을 맛보는 이야기다. (사진=외유내강 제공)
▶ '시동'은 어설픈 반항아 택일(박정민 분)과 의욕 충만 반항아 상필(정해인 분)이 세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겪어내는 이야기다. 두 캐릭터를 웹툰에서 영화로 옮겨오며 가장 중점에 둔 건 무엇인지.전체적으로 캐릭터들을 친숙하고 사랑스럽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 영화는 캐릭터가 굉장히 중요한 캐릭터 무비이기 때문이다. 원작보다는 좀 더 착하다. 원래는 애들 돈도 뺏는 나쁜 친구들인데, (영화에서는) 사실 좌충우돌하면서도 그 경계선에 있지 않나. 그 밸런스(선)를 지키려고 많이 노력했다. 큰 줄기에서는 마지막에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각색했던 것 같다. 원작은 웹툰이라서 대사로 직접 이야기하려는 것들이 많았는데, (저희는) 그런 걸 좀 생략하고 (관객이) 상상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 택일과 상필은 같은 동네에 살고, 오랫동안 알고 지낸 절친이다. 둘이 어떤 사이라고 생각했나.어릴 때 친구. 택일 모(염정아 분)가 경찰서에서 할머니(고두심 분) 얘기를 할 정도로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동네 친구다. (둘 다) 나쁜 짓을 하는 캐릭터라기보다는 허세 있고 그 나이대 할 법한 느낌들이었던 것 같다. 이 친구들이 자퇴도 하고 비행도 하니까 나쁜 애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중고 오토바이가 오프닝에 나오지 않나. 별로 쓰고 싶어 하지 않고, 고치고 싶지도 않고, 고장 난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그 오프닝이 (영화의) 축소판이지 않을까. 시동 잘 걸고 싶은데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모르는. '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택일-상필도) 그런 인물들이었던 것 같다. 얼핏 보면 고장 난 것 같고 문제도 있어 보이지만 고치는 법을 알려주면 잘 달릴 수 있는 오토바이 같은.
▶ 택일은 군산에 가서 우연히 장풍반점에 들어가고, 거기서 배달부로 일한다. 미스터리한 주방장, 사연 있어 보이는 사장, 자주 맞는 것 같은 배달부 등 겉으로 보기엔 수상한데, 같이 지내면서 택일에게 '가족' 같은 존재로 있어 준다.그렇게 봐주셔서 되게 감사하다. (웃음) 보통 이런 데 오면, 공사장(김종수 분)이라는 어른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그렇게 살면 안 된다든지 뭔가를 얘기하는 게 그간의 표현이었다면, 그런 걸 최대한 배제했다. 공사장만 해도 택일에게 계속 존댓말을 한다. 있는 그대로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택일이) 열심히 일하는 걸 가만히 바라본다. 배구만(김경덕 분) 같은 캐릭터도 어눌해 보이지만 꿈을 위해서 전진하고 있다. (그런 모습이) 택일이한테 자연스럽게 묻어나고 스며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장풍반점이라는 공간 자체가 도피처가 되지 않았으면 했다. 거기서 열심히 일하며 땀의 가치를 배우고, 돌아왔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배우분들이 너무 잘해주셨다. 사실 그런 연기가 너무 어렵다. 특히 공사장 연기한 김종수 배우님은 대사가 많지 않다. 가만히 바라봐야 하고, 표현 절제하면서도 큰 울림을 줘야 하는 역할이었는데 시나리오에서는 잘 표현 안 됐던 것들이었는데 김종수 배우님을 만나면서 완성됐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나왔다. 선을 지키면서도 뭔가 큰 어른 같다는 느낌을 주니까.
▶ 갑자기 생각난 건데, 배구만은 왜 그렇게 자주 맞는 건가.맞는다기보다 밀침을 당하는 거다. (웃음) '깡' 하는 소리가 나는데 거석이 형이 괴력의 소유자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구만도 택일처럼 여기에 왔다가 스며든 인물이다. 거석이 형이 그랬듯이. (장풍반점은) 그런 인물들이 거쳐 가는 공간이다. 거기서 유사 가족이 되는 긴 여정을 배구만 캐릭터를 통해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시동' 팀은 개봉 전주였던 지난 14~15일, 연분홍색 옷을 입고 무대인사를 하러 다녔다. 연분홍색은 극중 거석이 형의 시그니처 컬러다. (사진=NEW 제공)
▶ 경주(최성은 분)는 스쳐 지나가는 캐릭터인 줄 알았는데 택일과 꼬인 인연으로 만나 조금씩 가까워진다. 경주 캐릭터도 원작에서 바뀐 부분이 있나.새아빠가 있고 새아빠에게 폭행당해 가출하고 떠도는 아이인데, 그런 설정을 작업하면서 조금 손봤다. 원작에서도 (경주는) 되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경주 역할에서 가장 중점을 둔 건,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지만 당당하다는 거다. 이런 인물에게는 보통 드라마를 만들어서 슬픈 감정을 주는 편인데, 그런 걸 최대한 절제했다. 그리고 복싱은 원래도 했다. 원작에서는 새아빠가 복싱 관장이어서 거기서 복싱을 배운 설정이었다.
▶ 택일은 원래 공부하기 싫어하고 엄마와도 사사건건 대립하니까 가출한 게 이해가 갔는데, 상필이 사채업 같은 불량한 길로 빠지는 건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큰돈을 빨리 벌고 싶었을까.저는 (그 이유가) 할머니였던 것 같다. 어쨌든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캐릭터고, 또 그게(사채업이) 나쁜 일이라고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이) 쉽게 풀리고 돈을 쉽게 버는 데다가 처음에는 위협적인 일을 하는 게 아니었다. 하다 보니까 돈도 벌리고 나쁜 일 같지도 않다는 생각을 한 거다. 어느 순간 나쁜 일이 훅-하고 들어오고 그만두냐 아니냐 고민할 때 직접 아는 사이인 택일토스트(택일 엄마가 운영하는 가게) 상황을 보고 '아, 내가 정말 안 좋은 일을 하고 있었구나' 안 거다. 언제든 내게도 위협이 올 수 있겠다고 느끼고. 상필이가 무서워하면서도 용기를 내지 않나. 그 장면이 너무 좋더라. 자기 친구를 위해 용기 낼 수 있는 게 상필 캐릭터였던 것 같고, 돌아와서 우리(관객)에게 안도감을 주는 게 좋았다.
▶ 박정민은 인터뷰 때 택일이 갑자기 개과천선하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
('시동'은) 모든 인물이 성장하는 영화다. 보통 상업영화 안에서 보여줬던 패턴이라면, 누군가가 굉장히 이끌어서 한계를 극복한다든지 우승을 한다든지 어떤 성취를 할 것이다. 저도 박정민 배우님과 비슷한 생각인데, '시동'의 가장 큰 장점은 누가 누구를 가르치거나 막 선도해서 이 인물이 뭔가를 깨우쳐서 뭔가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거다.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상호작용하고, 묵묵하게 사는 사람들이 돌아와서 다시 출발선에 서는 것, 그게 이 영화가 주는 미학과 가치인 것 같다.
▶ 전반적으로 영화가 웹툰보다 더 밝은 분위기라고 알고 있다. 결말에도 차이를 주었나.(원작에서는) 택일 모가 식당을 차리면서 끝난다. 상필과 글로벌 파이낸셜 사람들이 모두 같이 운영하면서 끝나는데, 가장 크게 했던 고민은 여기 나오는 사채업자들이 합법적인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이 사람들을 미화해서도 안 되고, (이들이) 다시 좋은 길로 돌아왔을 때 (관객의) 감정을 강요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쁜 사람들은 확실히 나쁜 사람들로 만들되, 변화하는 사람을 뒀다. 그게 동화(윤경호 분)다. 상필이 무섭다고 털어놓는 순간을 보면서 깨우칠 수도 있지 않나.
택일과 상필은 서로 다른 일을 하면서 정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나. 택일은 중국집에서 배달하는 되게 일상적인 느낌이라면, 상필은 점점 무서운 형들을 만나면서 달라진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선을 넘는 건 정말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를 살 때 우리도 계속 택일 쪽의 인생을 사는 건 아닐 거다. 갑자기 상필의 순간을 맞을 수도 있으니. 그래도 마지막에 다시 돌아오고, 그때 안도하지 않나. 그래서 '아, 괜찮구나', '잘살고 있구나', '다행이구나' 이런 느낌이 더 강조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계속>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거석이 형 역 마동석, 택일 역 박정민, 택일 모 정혜 역 염정아, 상필 역 정해인 (사진=외유내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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