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개봉한 영화 '당신의 부탁'의 이동은 감독 (사진=명필름/CGV아트하우스 제공)
지난 19일 개봉한 '당신의 부탁'은 사별한 남편이 남긴 아들과 어쩌다 보니 같이 살게 된 '뜻밖의 엄마'의 이야기를 다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 안 어둠이 걷혔을 때 드는 생각은 '너무 잔잔한 것 아냐?'였다. 사람을 극한으로 모는 상황, 복잡하게 얽힌 사건과 인간관계 등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담백하고 슴슴한 맛이 좋았지만, 뭐랄까 '한 방'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어떤 장면들이 일상에서 이따금 떠올랐다. 남편이 남기고 간 아들과 같이 살지 도움말을 구하는 장면에서 별안간 "근데 오빠(남편)랑 좀 닮은 것 같다"며 한가한 소리를 하는 효진(임수정 분)이나, 하도 말이 없어 무슨 말을 하면 대답 좀 하라는 효진에 말에 정말 '네'만 하는 낯선 아들 종욱(윤찬영 분)이 생각나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난다.
여기에 벌써 할머니가 된 거냐며 짓궂은 농담을 하는 미란(이상희 분), 호감을 무기로 섣부른 단정을 해 버리는 정우(한주완 분)의 가벼움이나, 마치 내가 뭘 잘못하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이 서운하게 말하는 명자(오미연 분)까지. 어디선가 살고 있을 법한 평범한 인물들의 말투와 행동이 잔상처럼 남았다.
맞춤옷을 입은 듯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처럼 먼 영화 속 누군가가 아니라 주위를 둘러보면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가득 등장하는 '당신의 부탁'. 편안한 108분을 선사한 이동은 감독을 지난 12일, 서울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 얼마 전(4월 6일) 언론 시사회가 있었다. 개봉 버전으로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 혹시 새롭게 든 생각이 있는지 궁금하다.지난해에 부산영화제에서 처음 상영하고 관객들과 3번 정도 봤다. 프랑스분들과도 봤고. 연극 보듯 보는 분들이 많더라. 되게 집중해서, 하나하나에 반응하면서. 개봉 버전은 이전보다 축약됐다.
▶ 어떤 부분이 줄어들었나.단순하게 얘기하면 효진의 시선을 따라간다. 원래는 종욱과 효진의 삶을 각자 보여주는 방식이었는데, (지금은) 효진의 삶을 보여주다가 효진과 종욱의 첫 만남은 학교에서 하는 거로 바꾸었다. 부산영화제 버전에는 종욱과 주미(서신애 분)의 이야기가 조금 더 들어있다.
▶ 효진의 시선을 따라가는 쪽으로 바꾼 이유는.극장에서 만나야 하다 보니 문턱을 낮춘다고 해야 할까. 여러분들이 보셔야 하니 집중도를 높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시나리오도 만화나 원작보다는 축약됐지만, 개봉 판을 본 그림 작가가 '줄어든 게 낫다'고 하더라. '당신의 부탁'은 개봉 버전이 집중도가 좀 더 좋은 것 같다.
▶ 주미 부분이 빠지게 됐다니 아쉽다. 주미는 종욱의 엄마 찾기에도 동행할 만큼 친하게 지내면서도 서로 사귀는 관계는 아니다. 또, 예상치 못하게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았어도 가장 현명한 방법을 찾아내려 애쓰는 어른스러움이 묻어나는 흥미로운 캐릭터였다.말씀하신 것처럼 주미라는 캐릭터는 그런 부분이 있다. 너무 발랄한 10대로 이상적으로 그릴 순 없고, 고통받는 10대로만 그리기도 뭐해서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자칫 잘못하면 주미의 선택이 마치 도덕적으로 방종한 10대처럼 보일까 봐 걱정했다. 신애 씨는 20대 초반이라 (극중 역할보다) 좀 더 나이가 있는 성인이어서 도덕적으로 제가 덜 미안하기도 하고, (신애 씨는) 주미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도 잘 이해를 했다.
임수정은 죽은 남편이 남기고 간 아들과 졸지에 함께 살게 되는 효진 역을 맡았다. 데뷔 후 처음으로 하는 첫 엄마 역할이다. (사진=명필름/CGV아트하우스 제공)
▶ '당신의 부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역시 효진이다. 그 효진 역을 임수정이 맡았다. 엄마 역은 처음인데, 임수정에게서 효진의 어떤 부분을 찾아냈나.효진과 종욱 두 사람이 만나 가족을 이루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각자 올곧은 개인으로서 성장하는 것도 표현하고 싶었다. 가족 내에서 엄마의 역할을 기대하거나 강조하는 게 아니었고. 남편이 죽고 나서 정상적인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효진이 삶에 안착해 다시 새롭게 본인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종욱도 자신의 과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다가, 효진과 같이 살면서 사춘기를 겪지 않나. 이 친구(효진)는 아마 앞으로 더 잘 살아갈 것 같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도 않고 남도 돌봐줄 줄 알고 여유가 생겨서.
임수정 배우는 연인으로 출연한 영화도 많았지만 '각설탕'이라든지 원톱 영화도 하는 등 본인만의 색깔을 갖고 있었다. 주인공으로서의 호감도 물론 있어야 하지만, 효진 캐릭터가 좀 예민하기도 하고 뭔가 아픔을 가졌어야 했는데 그것과 잘 맞았다. 그 아픔이 마냥 우울하지만도 않은 것, 친구와 있을 때 털털하게 지내는 것도 효진과 어울렸다.
▶ 임수정과 작업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어떻게 보면 임수정 씨가 저보다 더 (경력으로) 선배이지 않나. (웃음) 저도 일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수정 씨는 워낙 어린 나이부터 주인공을 하고 연기해 온 시간이 기니까. 경험이 많은 배우들은 직관적으로 연기하는 부분이 뛰어나서 신뢰가 있었지만, 제가 연출하면서 느낀 건 (수정 씨가) 대단히 지적인 배우라는 거였다. 제가 판단하기에 이 배우는 직관도 있지만 지적인 접근을 하면서 영화 전체를 바라보더라. 그런 것들이 좋았다.
예를 들어 프레임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계산했다. 어떻게 보면 이 캐릭터 자체가 아주 도드라진 캐릭터는 아니지 않나. 성격도 그렇고. 표현하는 부분이 많지 않고 대사도 정제돼서 배우로서는 힘들 수도 있다. 그래서 저랑 얘기를 많이 했다. 사실 효진은 제가 알던 캐릭터지만 연기할수록 임수정이라는 배우가 효진을 더 잘 알게 됐다. '제가 효진이라면 이럴 것 같아요. 지금 효진의 감정은 이것 같아요' 하면서 제안을 주었을 때 오히려 반갑고 좋았다.
'당신의 부탁'에서 각각 주미, 종욱 역을 맡은 배우 서신애와 윤찬영. 주미의 이야기는 부산영화제 버전에서는 좀 더 풍성하게 담겨 있었으나 개봉 판에서 줄어들었다. (사진=명필름/CGV아트하우스 제공)
▶ 배우들이 내는 의견을 평소에 잘 받아들이는 편인가.늘 열려 있다. 그래서 그런 제안 듣는 게 너무 좋다. 어차피 선택은 제가 하는 거라, 아니다 싶으면 그건 아니라고 한다. 효진 남편의 동생 역이 원작에서는 약간 더 나쁜 남자로 나온다. 효진을 압박하는 역할이었다. 근데 김민재 배우가 읽고 나서 자기가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예의 바른 사람은 아니라도 평범하게 할 것 같다고 하더라. 듣고 보니 그게 더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사가 담백해졌다. 이게 공동작업을 할 때 오는 시너지라서 좋은 거다. 한편으로는, 이 배우를 만났기 때문에 이런 피드백을 얻은 것이니까. 제가 많은 작품을 한 건 아니지만, 이래서 인연이 소중하구나 하는 것도 느낀다. (이번 작품에서) 모든 배우가 캐릭터와 비슷해서 실제 자신과 비슷한 쪽으로 제안도 많이 주셨고, 그런 것들이 작품과도 잘 맞았다.
▶ 다들 캐스팅이 잘 됐다는 평이 나오지만, 무뚝뚝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종욱과 윤찬영이 잘 어울린다는 반응이 많았다. 윤찬영은 어떤 배우였나.친한 친구들 사이에선 밝고 활발하다고 하더라. 저희하고 있을 때는 종욱이랑 되게 비슷했다. 말수도 많이 없고 의젓한 부분이 있었다. 아역이었던 친구치고는 늘 연기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했다. 어릴 때 경험이 각인된 친구들이 많은데 (찬영 씨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릴 때 학원 간 것 빼고는 연기 배운 적도 없다고 하고. 오히려 백지 같은 면이 있어서, 제안하면 바로 습득하곤 했다.
▶ '당신의 부탁'에서 유머를 맡은 건 누가 뭐래도 이상희였다. 보통 정적인 역할을 주로 맡았는데 어떻게 이런 '밝음'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저도 상희 씨를 독립영화 쪽에서 오랫동안 봐 왔다. 내성적이고 진지한 역할을 자주 맡아 왔더라. 효진이 좀 더 그림자가 있다면, 미란은 날것의 건강한 느낌인데 그런 게 잘 어울릴까 했다. 막상 만나니 본인이 지닌 건강함이 있더라. 그래서 잘 어울렸고. 배역 크기나 이런 걸 떠나서 본인과 안 맞는다고 거절할까 걱정했는데 밝은 역할이 오랜만이라 좋다고 했다. 저는 상희 씨와 수정 씨가 한 영화에서 만나면 관객으로서 되게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연기하면서도 진짜 자연스러운 모습의 케미가 좋았던 것 같다. (관객도) 다행히 좋게 봐 주셔서 좋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효진을 상담해주면서 호감을 쌓는 정우 역은 배우 한주완이 맡았다. (사진=명필름/CGV아트하우스 제공)
▶ 효진은 종욱을 만나기 전 호감을 느끼는 상대가 있다. 자신의 우울 증세를 살펴봐 주는 정우다.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결말이 열려 있었는데 이유는. 캐스팅 계기도 궁금하다.부산영화제 버전이나 초고, 원작에서는 정우 이야기가 좀 더 있다. 그 부분이 편집돼서 아쉽긴 하다. (저는) 정우와 잠깐의 관계였던 걸로 생각했는데 배우가 가진 느낌이 선명해서인지 정우 부분을 언급하는 분들이 많더라. 나중에 버스에서 다시 만났을 때 두 사람(효진-정우)이 웃길 바랐다. 혹시나 잘될 수 있다는 느낌으로. (정우라면) 종욱이를 만나서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완 씨도 그동안 진지한 역을 많이 해서, 약간 철없기도 한 남자 역을 수락할까 했는데 만나보니 강아지 같은, 소년 같은 느낌이 있었다. 성격이 밝고 건강하더라. '진짜 정우 같다' 싶었다.
▶ 캐스팅 얘기는 마지막이다. 효진의 죽은 남편 경수 역의 김태우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진짜 우정 출연이었다. 대사 한 마디 없고 이미지만 나오는 거라. 다 거절할 것 같았는데 흔쾌히 해 주셨다. 멀리 지방 촬영인데도 와 주셨다. 본인은 처음에 명필름과의 인연 때문에 시작했지만, 작품 읽고 이건 하고 싶어졌다 해서 너무 감사했다. 잠깐 등장하는 씬을 찍을 때, 제 연출력 부족으로 결과물에는 그게 잘 나타나지 않았는데 현장에서 찍을 땐 정말 좋았다. 진짜 수정 씨도 그런 말 했고, 저도 느꼈는데 소름이 돋았달까.
김태우 씨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대사는 안 하지만 복잡미묘하고, 미안한 감정이 있어야 했다. 본인 아들을 부탁하는 상황이지 않나. 눈빛 연기를 해 주셔서 너무 좋았다. 경수는 말을 한마디도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것도 선뜻 동의해주셨다. 또, 경수는 극중에서 연상의 여인과 연을 맺었고 효진과도 알콩달콩 산 인물이라 그게 이해되는 '타당한 매력'이 있어야 했다. 김태우 씨 보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연민이 가면서도 누군가에게는 연인이 되어줄 수 있는. VIP 시사회에도 와 주셔서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