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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성폭력에 취약한 드라마 제작환경 바꿔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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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투', 성폭력에 취약한 드라마 제작환경 바꿔낼까

    [14년 전의 미투, 도착하다] <하> 성범죄 방지 교육 도입, 문제 인력 퇴출에도 '공감대'

    '미투'(#Me_Too, '나도 말한다'는 뜻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밝히는 것)라는 말이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기도 전인 2004년에도 '미투'가 있었다. 드라마 단역배우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현장 반장 다수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수사 과정에서 숱한 2차 가해를 겪은 후 목숨을 끊은 다연(가명) 씨의 얘기다. 단역배우 자매 사망사건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 사건은, 2018년의 '미투' 물결에 힘을 받아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14년 전의 '미투'는 현재를 어떻게 바꿔낼까.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상> 단역배우 두 딸 잃은 母 "가해자들 쓰는 회사, 벼락 맞아야"
    <하> '미투', 성폭력에 취약한 드라마 제작환경 바꿔낼까
    (끝)

    드라마 촬영 현장.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자료사진/노컷뉴스)

     

    드라마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다수의 진행 반장에게 성폭력을 당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연(가명) 씨의 사례(단역배우 자매 사망 사건)는 분명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벌어지는 성희롱 목적의 모욕적 언사나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은 '이야깃거리'조차 안 될 만큼 흔한 일에 가깝다.

    최소한의 보호 장치는 마련돼 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업주·상급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 내의 지위를 이용하거나 업무에 관해 다른 근로자에게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이러한 요구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근로조건 및 고용에서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직장 내 성희롱')고 명시하고 있다.

    사업주나 상급자는 근로자가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매년 해야 하고, 본인들도 참여해야 한다. 이 내용은 모두가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는 장소에 항상 갖춰져 있어야 한다. 또한 성희롱이 일어났을 때, 성희롱 예방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성희롱 가해자에 대한 조치가 없을 때는 과태료와 벌금을 물어야 한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지난 2016년부터 Q&A 형식으로 구성된 '보조출연자 기본권리 찾기'를 배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법이 없는 것 같이 굴러간다. 보조출연자들은 촬영 현장에서 연장근로수당 미지급, 각종 성폭력을 비롯한 비인격적 대우에 오랜 시간 노출돼 있었다. 이런 '부당함'이 더 자주, 힘주어 말해지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노동시간 대비 임금이 낮고, 일 수급이 안정적이지 않은 데다, 방송사에서 일을 가져오는 진행 반장의 권한이 워낙 강해서 '한 번 찍히면' 완전히 배제되는 '구조' 때문이다.

    ◇ "인권 보장? 전혀 없었다"… "말 못 할 일 많을 것"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은 직장 내 성희롱이 발생했을 때 조치를 명시하고 있다. (사진='국가법령정보센터' 홈페이지 캡처)

     

    회당 출연료가 수천만 원, 억대에 이르는 톱배우들은 촬영 현장에서 총지휘권을 가진 PD만큼 '높은'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대사가 주어지는 일이 드물 정도로 비중이 작고 주변적인 역할을 하는 보조출연자의 경우 상황이 다르다. 근로 시간, 노동 강도 등에서 최소한의 '보호'를 받기 어렵고, 혹여나 눈 밖에 나면 바로 현장에서 사라지는 위치라는 점에서 근로계약서 한 장 안 쓰고 일한다는 프리랜서 스태프들과 사정이 비슷하다.

    현장에서 보조출연자들의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치가 있느냐는 질문에 25년 경력의 보조출연자 A 씨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좋아진다고는 하지만 아직 멀었다"고 답했다. 똑같은 사람인데도 보조출연자들의 인권은 무시되기 일쑤다. A 씨는 "사람대접을 해 줬으면 좋겠다. 반말은 기본이고 욕도 많이 한다. 자식 같은 사람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 별생각이 다 든다"면서 "보조출연자도 하나의 직업인데, 인격적인 대우를 받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A 씨는 그래도 남성인 자신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고 했다. 그는 "여자 동료들 상황이 더 열악하다. 쌍시옷 발음 들어가는 욕을 밥 먹듯이 듣는다. 남자 출연자들의 10배 정도라고 보면 된다. (여자 출연자들을) '성 노리개' 정도로 여기는 반장들도 있다"며 "그런데 보조출연자들은 항의를 못 한다. 말하면 다음에 일을 안 시키니까"라고 설명했다.

    보조출연 일을 시작한 지 올해로 9년째를 맞은 B 씨는 여성이다. 그 역시 기획사 반장이 '기분 나쁘게 말하는 것'을 숱하게 들었다. B 씨는 "보조출연자가 없으면 그 방송도 할 수 없지 않나. 얼마든지 좋게 말할 수 있는데… 반장 중 진짜 괜찮은 분은 4~5명 정도밖에 안 된다"고 토로했다. 키가 크고 늘씬한 여성 보조출연자들은 졸지에 반장의 '트로피'가 되기도 했다. B 씨는 "예쁘면 반장들이 되게 좋아했다. 예전에는 여자 출연자들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하는 장면도 많이 봤다"고 전했다.

    여성 보조출연자들에게는 추행하는 일도 잦았다. B 씨는 몸이 닿으면 반사적으로 쳐냈고, 그래서 불쾌한 신체 접촉 경험이 적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못한 여자 후배들은 B 씨에게 하소연했다. 모르는 척 브래지어 끈 있는 곳을 건드리거나 팔 안쪽 여린 살을 왜 만지는지 모르겠다면서. 언제까지 대기하다가 촬영에 임해야 하는지 자세한 설명 없이 다짜고짜 '왜 이렇게 늦게 와?' 하면서 겨드랑이와 팔뚝을 잡고 밀면, 여자 출연자 중 몇몇은 멍이 들기도 했다.

    B 씨는 "남자들은 (안 좋은 소리를 들으면) 욱할 수도 있고 달려들 수도 있지만 여자들은 무서워서 말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반장들은 여자 출연자들만 있을 때 더 들으라는 듯이 막말을 했다"며 "저는 나이가 좀 있으니 말할 수 있다. 어린 애들은 피해를 보고도 이런 말 못 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명 담당 스태프로 드라마 현장에서 20년간 일해 온 C 씨는 "제가 볼 때 (업계 내 성폭력은) 드라마 쪽이 가장 심할 수도 있다. 드러내지 못하는 건, 다들 생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파리 목숨이다. 더구나 우리는 유명인이 아니지 않나. 그럼 기사화되기도 어렵고… (알려졌다간) 현재 구조에서 그 사람은 아예 '매장'이다. 어디다 항의할 데도 없다"고 전했다.

    안전망은 고사하고 혹시나 신원이 드러날까봐 자기 경험을 말하기조차 어렵다는 게 공통된 증언이었다. 거기다 제대로 된 실태조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보조출연자들의 노동 환경 관련 조사는 지난 2013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시행한 게 가장 최신 통계일 정도다.

    ◇ 문제 제작사와 인력 퇴출 줄곧 요구해 온 '보조출연자 노조'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이규석 사무국장과 문계순 위원장 (사진=황진환 기자)

     

    모두가 보조출연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한 건 아니었다. 지난 2006년 9월 설립된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한국노총 산하, 위원장 문계순)은 드라마 기획사들의 최저임금법, 근로기준법, 파견법 등 각종 법령 위반 사실을 방송사에 알리고, 이 같은 일이 반복되는 기획사와는 계약하지 말 것을 지속해서 요구해 온 단체다. 현재 '재수사' 요구 여론이 들끓고 있는 '단역배우 자매 사망 사건'을 발견하고 초기부터 공론화하기도 했다.

    2012년 9월, 문계순 위원장이 어머니 장연록 씨를 찾았을 때 장 씨는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죽을 날을 받아놨는데 왜 왔느냐며 온몸으로 '거부 의사'를 밝혔던 장 씨를 설득했고, 이 사건에 관심 있는 언론과 연결해 줬다. 당시 민주통합당 최민희 의원과 기자회견을 열고 '재수사'를 촉구하는가 하면, 지상파 3사(KBS-MBC-SBS)에 공문을 보내 가해자들이 포함된 회사와는 계약을 해지해 달라고 주장했다.

    문 위원장은 "보조출연자들은 언제나 '무방비 상태'에 있다. 방송사에 문제가 있는 기획사와 인력을 현장에서 퇴출할 것, 현장 관리 감독을 잘해 줄 것,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할 것 등을 담은 공문을 수차례 보냈다. 답변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이어, "대기 중인 보조출연자들이 10만 명 정도 된다. 노조는 4천 명 규모이니 무시해도 된다는 식"이라며 "면담 요청을 해서 두 번 정도 (방송사 관계자를) 만났는데 '이런 일이 있는지 몰랐다. 알아보고 내년에는 바꿔보겠다'는 말만 하더라. 다음 해에 가면 담당자는 바뀌어 있고… 그러니 신뢰할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규석 사무국장은 "가장 큰 문제는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가해자들이 그대로 일하는 환경이다. 방송사는 공적 책무가 있지 않나. 그런 회사들이 불법을 저지른 곳과 거래하는 셈"이라며 "정식으로 등록된 허가 업체와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미투'가 방송사에 미친 영향

    단역배우 자매 사망사건으로 두 딸을 잃은 장연록 씨는 지난 8일 각 방송사와 여성가족부 장관에게 공문을 보내, 가해자들을 보조출연업계에서 영구 퇴출해 달라고 요구했다. 25일까지 회신을 달라고 했으나 아직 공식적인 답변을 받지 못했다. (사진=김수정 기자)

     

    10여 년 동안 더디지만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비록 노조에는 응답하지 않았으나, 방송사들은 용역 계약을 맺는 기획사에 공문을 보내 '관리 감독'을 더 철저히 하라고 주문해 왔다는 게 노조의 설명이다. '미투 운동' 이후 방송사들이 본격적으로 현장 '정비'에 나선 것도 변화 중 하나다.

    JTBC의 경우 CP(책임 프로듀서) 급에서 성폭력 방지에 관심을 두고 의욕적으로 나서, 지난해 여름부터 대본 첫 장에 '드라마 제작 현장 성희롱 예방 가이드'를 마련했다. 성차별적 농담과 음담패설을 삼갈 것,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으며 제작 현장 전체의 문제임을 인식할 것, 피해자는 발생일시, 유형, 증거 등을 기록하고 도움을 요청할 것 등 구체적인 내용이 담겼다. 성폭력이 발생할 시 바로 연락할 수 있게 CP 연락처도 표기했다.

    JTBC 관계자는 "이제 드라마 제작도 프로듀서 시스템이 되면서 다방면 검증과 평판을 통해 스태프가 꾸려지고 있다. 요즘에는 드라마 연출자부터 현장이나 후반 과정에 악영향을 미칠 스태프는 피하고 있다. 조직이 작으니 합심하기가 수월했고, (시행 후) 현장 반응도 좋았다"며 "근본적으로는 급히 편성이 나서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게 밀어붙이는 관행을 건강하게 고쳐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고 밝혔다.

    KBS도 지난 16일 '성범죄 및 안전사고 관련 협조 요청'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드라마 기획사 대표들에게 보냈다. 최근 성범죄 사건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만큼, △성범죄 사고 발생 시 관련자 방송제작 업무 배제 등 신속한 조치 의무 이행 △성폭력 사고 예방을 위한 교육 시행 등을 요구한 내용이다. 그러면서 계약서상의 성범죄 관련 조항 준수에 '만전을 기해' 달라고 강조했다.

    MBC는 성범죄 예방 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 '위대한 유혹자', '손 꼭 잡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자', '부잣집 아들', '미치겠다, 너 땜에!' 등 최근 시작하거나 방송을 앞둔 드라마의 전 출연진과 제작진을 대상으로 교육을 했고, 앞으로도 이어갈 예정이다. 성폭력에 연루된 인력 및 업체 퇴출에 대해 MBC 관계자는 "그 부분은 아직 정해진 바 없지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현장 교육을 강화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SBS는 올해 초부터 대본에 성폭력 방지 가이드라인을 추가했다. 촬영장에 위험 요소가 생기면 바로 신고하게끔 했고, 상호 간 인격을 존중하고 차별적 언행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겼다. SBS 관계자는 "현장에서 그런 일(성폭력)이 벌어지지 않게 다들 조심하고 있다. 앞으로도 서로 존중하는 문화로 가야 한다고 본다"고 답했다.

    tvN과 OCN도 최근 드라마 대본에 성희롱 예방 가이드와 촬영 현장 안전수칙 2가지를 넣었다. CJ E&M 관계자는 "대본 읽기 전에 다 같이 그 내용을 읽게 하고, 이런(성폭력) 이슈 없는 건강한 촬영 현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고 당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폭력 문제 발생 시 대처 방안을 두고는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던 거로 안다. 발생할 경우에는 엄중하게 처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드라마 제작 현장 내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해 각 방송사가 시행 중인 대책 (표=김수정 기자)

     

    ◇ "분위기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아직…"

    방송사의 '개선 노력'은 촬영 현장에까지 닿았을까. 이 사무국장은 "미투 운동으로 인해 (업계 내 성폭력이) 조명받는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썩은 것들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하루아침에 나쁜 관행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겠지만 이런 목소리가 표출된 이후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보조출연자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B 씨는 "미투 운동으로 인해 조금 나아진 점이 있다. (촬영) 시작하기 전부터 살벌하게 대했다면 요샌 그 정도까진 아니다. 폭언하는 빈도도 절반으로 줄었다. 신생 회사들은 심한 욕은 안 하더라"라고 말했다. A 씨는 "'미투' 운동 덕분에 뭔가 나설 수 있는 분위기가 된 건 맞다. 야한 농담과 험한 말이 많이 줄었다. 그래서 이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아직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는 반응도 있다. C 씨는 "현장 스태프에게까지는 도착하지 않은 것 같다. (방송사의 '성폭력 방지 가이드라인'은) 얘기도 못 들었다. 자기들만 공유한 게 아닐까. 한 번 촬영장에 직접 오시면 이곳이 얼마나 사각지대에 있는지 아실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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