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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여자'를 자칭하는 후죠시, 그들은 누구인가



문화 일반

    '썩은 여자'를 자칭하는 후죠시, 그들은 누구인가

    [페미니즘으로 문화 읽기 ⑥] 1990~2010년대 동인문화와 '여자 오타쿠'의 발견

    2015년 이후 '여성혐오'와 '페미니즘' 이슈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문화 콘텐츠들을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읽으려는 시도들이 활발해졌다. 성균관대 문과대학 CORE 사업단이 주최하고 성균관대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와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이 주관하는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도 한 예다. 영화·미술·공연·대중음악·웹툰·팟캐스트·SNS·게임 등 여러 장르에서 전개되는 페미니즘 문화비평을 두루 다루는 이 강의는 16일부터 27일까지 이어진다. 1강부터 10강까지 전 강의를 지상 중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약 100년 전,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애정발표'를 했다
    ② 영화 '아가씨' 히데코-숙희 옷으로 보는 크로스드레싱
    ③ "이게 작품이냐?"… 여성이기에 폄하 당했던 예술가들
    ④ '이상한 여자'… 1970년대 미디어의 성매매 여성 낙인찍기
    ⑤ 미치거나 죽거나, 급기야 사라진 한국영화 속 여성들
    ⑥ '썩은 여자'를 자칭하는 후죠시, 그들은 누구인가
    <계속>

    한 분야에 깊게 심취한 사람을 뜻하는 '오타쿠'(オタク)은 한국식 대체어('덕후')까지 생길 만큼 널리 알려진 말이다. 1970년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이 말은 특정 취미나 사물, 인물 등에 깊이 몰입하는 이들을 부를 때 쓰인다.

    '오타쿠'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대강 이런 것이다. 뚱뚱하고 안경을 쓰고 다소 촌스러운 패션에, 미소녀 캐릭터 쿠션을 들고 다니며 이상한 말투를 구사하는 남성. 기행을 하는 인물들을 보여준 과거 예능 '화성인 바이러스' 방송 이후 이런 이미지가 대중에게도 각인됐다.

    당연하게도 '여자 오타쿠'가 존재하지만, 여자 오타쿠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그나마 이야기되기 시작한 것은 오래 되지 않았다. 아마추어 창작 동인지를 만들고, 이를 사고 파는 거대한 코믹 마켓의 큰 부분을 여성이 차지한다는 게 밝혀지면서 비로소 '여자 오타쿠도 있구나' 하는 데까지 발전한 것이다.

    23일 오후,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성평등 도서관에서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화사' 6강 '후죠시는 말할 수 있는가─1990~2010년대 동인문화와 여자 오타쿠의 발견' 강의가 진행됐다.

    문화인류학자 김효진 씨는 동인녀, 야오녀(やおい+女, 주로 여성들이 창작하는 남성 동성애물 '야오이'를 즐기는 여성), 후죠시(腐女子, 문자 그대로는 썩은 여자라는 의미이지만 남성 동성애물을 즐기는 여자 오타쿠를 이른다)로 명명된 여자 오타쿠들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나갔다.

    ◇ '후죠시'를 이야기하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NHK WORLD에서 방송된 'THE SECRET OF COMIKET'이라는 다큐멘터리. 일본의 코믹 마켓 '코미켓'을 다뤘다. (사진='THE SECRET OF COMIKET' 캡처)

     

    우선 김효진 씨는 여자 오타쿠 '후죠시'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을 설명했다. 한국에서 후죠시보다 더 먼저, 보편적으로 쓰였던 '동인녀'는 커다란 공동체 안의 사람들(동인, 同人)을 뜻하는 '동인문화'에서 유래됐다.

    동인문화는 △같은 취향과 기호를 가진 사람들을 찾고자 하는 문화 △제도화된 기성 문단에 반대하고 자신들의 문학(평론)을 펼치기 위한 창작의 장 '동인지'에서 따온 말 △만화 장르에서 문학 동인과 같은 시도가 활발했던 것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김효진 씨는 "한국은 동인문화, 일본은 동인지문화라고 볼 수 있다"며 "일본 만화에서의 동인지 운동은 기성 출판사의 상업만화를 지겨워 한 젊은 작가, 독자들이 스스로 원하는 만화를 창작하고 평론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1974년에 시작된 일본 코믹 마켓 '코미켓(COMIKET)을 대표적인 동인지 이벤트로 들 수 있다. 일본 방송사 NHK WORLD는 지난 2015년 'THE SECRET OF COMIKET'이라는 다큐에서, 3일 간 5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는 거대한 이벤트를 소개했다. 김효진 씨는 "정부 입장에서도 코미켓의 경제적 효과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라며 다큐 탄생의 배경을 짚었다.

    그러면서 "한국의 경우, (동인녀의) 독자성을 무조건 강조하긴 어렵다. 일본 만화의 강력한 영향권 안에서 성장했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면서도 "일본 동인지문화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한국의 독특한 사건과 맥락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효진 씨는 "한국 오타쿠를 정의할 때는 일본 오타쿠 정의를 그대로 갖고 오면 안 된다. 당시 (한국) 오타쿠의 경우, 일본 만화 원본을 가질 만큼 돈이 많고, 일본어가 어느 정도 된다는 걸 의미했다"며 "일본 오타쿠가 이러니 한국 오타쿠도 이럴 거야 라고 하는 생각은 맞지 않다"고 밝혔다.

    ◇ 그렇다면 '후죠시'는 누구인가

    (사진='THE SECRET OF COMIKET' 캡처)

     

    후죠시는 주로 여성 작가가 여성 독자를 위해 그린 남성 동성애물(Boys' Love, BL)을 즐기는 소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국의 경우, 1990년대에는 특정 용어 없이 여성만화팬이라고 인식됐고,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는 동인녀(야오녀)로 불렸으며, 2000년대 중반 이후 비로소 후죠시(썩은 여자)라는 말이 들어왔고 글러(글 쓰는 사람), 그림러(그림 그리는 사람), 커뮤러(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사람) 등의 용어로도 불렸다는 게 김효진 씨의 설명이다.

    김효진 씨는 "썩은 여자라는 의미는 자조적이면서도 자긍심이 섞인 호칭으로, 일본에서는 (후죠시) 본인들이 사용한 말이었다. 뇌가 썩어서 남자 둘만 붙어 있으면 (커플로) 엮으려고 한다는 건데, '너희들이 썩었다고 하든 말든 뭐 어때?' 하는 태도였다"고 밝혔다.

    또한 "명칭에 여성(女)이 포함돼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현실의 여성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회적 여성성'이다. BL을 즐기는 남자는 후단시(썩은 남자)가 아니라 '명예 후죠시'라고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이 용어에서의) 보편적 젠더가 여성이라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일본에서 탄생한 후죠시란 말은 중국에서 '푸조', 영어권에서 fujoshi라고 쓰이고 있다.

    ◇ 현재의 후죠시를 있게 한 한국 동인문화의 흐름

    김효진 씨는 후죠시로 대표되는 '여성 중심의 하위문화인 한국 동인문화의 특징과 역사'를 살펴보기도 했다. 국내 동인문화는 1980년대부터 본격화됐는데, 당시에는 군부 정권의 검열 체제와 출판사 주도의 양산형 만화에 맞서는 '젊은 만화가들의 실험적 창작 발표의 장'으로서의 동인지가 등장해 문화운동 성격이 강했다.

    김효진 씨는 "그 당시 출판사 요구로 일본 만화를 그대로 가져와 번역하고 한국 이름만 붙이는 게 아니라 직접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계속 그리다 보니 실력이 늘어서 (한국 만화계가) 굉장히 빨리 따라갔다고 한다"며 "초기 순정만화 작가들 만화를 보면 일본 만화책을 베낀 게 많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다. 소중한 역사이기 때문에 일본 것을 따라했다고 무조건 욕하기보다는 언젠가는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23일 오후,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성평등 도서관에서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문화사' 6강 '후죠시는 말할 수 있는가─1990~2010년대 동인문화와 여자 오타쿠의 발견' 강의가 진행됐다. 문화인류학자 김효진 씨가 발제하고 있는 모습 (사진=김수정 기자)

     

    1980년대 프로 작가와 프로 작가를 지망하는 아마추어 여성 작가들이 중심이 된 만화동호회 시대를 거친 후 맞게 된 1990년대는 한국 만화시장의 활황기이자 일본 대중문화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한 때였다. 김효진 씨는 "야오이물(Y물)의 수입과 PC통신 발달에 따른 정보의 공유가 활발했다. BL 캐릭터간 관계를 재해석하는 쪽으로 팬들이 급속 이동하며 분위기가 바뀌게 됐다"고 부연했다.

    김효진 씨는 "한국에서는 (일본 동인지문화에 따른) 2차 창작 문화가 항상 안 좋은 것으로 인식돼 왔다. 일본에서 온 작품의 2차 창작이므로 피해야 된다는 관념이 컸다. 그러다 작가→팬 중심 만화로 바뀌면서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엄청 늘어나며 베이스가 확 커졌다"며 "일부 평론가들은 (이런 문화를) 안 좋게 생각하는 분들도 많지만,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성취를 폄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만화 축제인 코믹월드가 열리고 한국 내 일본 대중문화 오타쿠가 생겨난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는 인터넷 발달+일본 대중문화 개방 조처 이후 일본 동인문화 직접 교류가 더 활발해졌다. 반면 동성애를 유해매체로 규정해 검열 소동이 일어났고, 소설 동인 커뮤니티가 비밀주의를 띠게 된 때도 2000년대였다.

    김효진 씨는 "야오이, BL이 명확한 강세를 보였다. 소위 여성향(만화)이 대세가 된 것이다. 코믹월드의 경우 작가 및 독자의 90%가 여성이었다. 또 2005년에는 영화 '왕의 남자'가 대흥행을 거둔 후 영화계 등에서 동성애 코드를 이용한 작품이 인기를 끌었다. 주류 사회는 그제야 동인녀, 야오이 세대를 하나의 '소비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김효진 씨는 강연 말미, △BL의 가시화 및 주류화를 둘러싼 반발 △콘텐츠가 정치적으로 올바른가에 대한 논쟁 △우익 콘텐츠 및 동인이벤트 신고 등 한국 동인문화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을 거론했다. 그는 "작품이 많이 나와야 질이 높아지듯, 많은 이야기가 나와야 많은 논의가 될 수 있고, 더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며 '적극적인 말하기'를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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